고령은 대가야의 옛 지역으로서 현재 무덤이 수백 기에 이르고 있다. 그 중 지산동 무덤들은 겉모습이 확실하고 봉분이 비교적 큰 무덤에 한하여 번호를 매겨 지금은 72호 무덤까지 정해져 있다.
이들 무덤의 겉모양들은 모두 원형의 봉토를 하고 있고, 봉토의 규모에 따라서 대형·중형·소형무덤으로 구분한다. 봉토는 흙을 높이 쌓아서 무덤의 형태를 만드는 것을 말한다.
주로 대형무덤은 산등성이의 위쪽에 많이 있으며 중형무덤은 산등성이의 중간 정도에 모여 있고, 작은무덤들은 대형무덤과 중형무덤 주위나 그 밑에서 발견이 된다.
내부구조는 돌널무덤(석상묘) 돌덧널무덤(석곽묘), 돌방무덤(석실묘) 등 여러 형태가 나타나는데, 돌널무덤의 경우 청동기시대 돌널무덤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한 봉분 안에 여러 무덤이 나타나는 것은 가족무덤의 성격이라기 보다 딸려묻기(순장)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대형무덤에서 많은 양의 토기와 함께 금동관·갑옷 및 투구·칼 및 꾸미개 종류가 출토되고 있으며, 4∼6세기 정도에 만들어진 대가야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전문설명 고령(高靈)은 대가야(大伽倻)의 고지(故地)로서 읍남(邑南)과 읍북(邑北)에 고분(古墳) 수백기(數百基)가 있으며 지산동(池山洞)은 그 읍북군(邑北群)으로 1970년 현재(現在) 200기(基)가량의 고분(古墳)이 산재(散在)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시대(時代)가 떨어지는 것도 있으나 대구(大邱)에서 고령(高靈)으로 들어가면서 보면 읍(邑)과 산능선(山稜線)에 큰 봉분(封墳)이 4,5기(基) 보인다.
이들 고분중(古墳中) 1915년, 1917년, 1918년에 수기(數基)가 발굴(發掘) 또는 조사(調査)되었으며 1918년 조사(調査)의 1,2호분은 할석(割石)을 사용(使用)한 장방형석곽(長方形石槨)이었고 1호분(號墳)은 동서장축(東西長軸), 동서(東西) 3.3m, 남북(南北) 1m 미만(未滿), 고(高) 1m 정도였다. 그러나 1939년에 발굴(發掘)된 고분(古墳)은 고령(高靈) 고아동(古衙洞)의 벽화고분(壁畵古墳)처럼 ㄱ자형(字形)의 석실분(石室墳)이면서도 남북벽(南北壁)은 직립(直立)이나 동서(東西)의 장벽(長壁)은 내경(內傾)하되 양벽(兩壁)이 천정(天井)에서 ∧자형(字形)으로 합치고 있는 특수형(特殊形)이어서 공주(公州) 백제고분(百濟古墳)과의 연결(連結)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렇게 고령지방(高靈地方)에서는 상자형 석곽(箱子形 石槨)과 고구려(高句麗), 백제식 ㄱ자형(百濟式 ㄱ字形)(연문(羨門)이 남벽(南壁)의 동(東)쪽) 석실분(石室墳)이 함께 있되 전자(前者)가 시기상(時期上)으로 앞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 고령 지산동 고분군 44호분 고령 지산동 고분군 45호분 고령지산동고분군전경 고령지산동고분군(전경) 고령지산동고분군(전경) 고령지산동고분군(근경) 고령지산동32-35호분발굴현장 정비된고분군 유대양이부호(지산동32호분출토) 기대및장경호(지산동35호분석실출토) 은상감당초문환두대도병부 갑옷및투구일습 금동관(고령지산동32호분석실출토) 고분군 원경 정상부 제279호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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