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81호 창녕 송현동고분군 <해제>

오늘의 쉼터 2008. 2. 14. 17:13



종     목 사적  제81호
명     칭창녕 송현동고분군(昌寧松峴洞古墳群)
분     류 유적건조물 / 무덤/ 무덤/ 고분군
수량/면적 190,558㎡
지 정 일 1963.01.21 ~ 2011.07.28
소 재 지 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 20-1
시     대삼국시대
소 유 자국유, 공유, 사유
관 리 자창녕군

일반설명

창녕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진한의 12개 나라 중 하나인 불사국으로, 비사벌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송현동 무덤들은 크게 2개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1지역은 목마산 기슭에서 서쪽으로 80여기의 무덤이 있던 큰 무덤들이었으나, 지금은 16기 정도만이 남아 있다. 2지역은 송현동석불이 있는 부근에 20여 기 정도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대부분이 논으로 변하여 원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무덤은 겨우 몇 기 정도이다.


근처의 교동무덤들과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무덤의 구조와 유물의 성격이 거의 같다고 여겨진다. 교동무덤과 함께 89·91호 무덤이 1918년에 발굴되어 많은 양의 유물들이 발견되었는데, 유물 중 일부는 행방을 알 수 없게 된 것도 있다고 한다.


대부분의 무덤이 도굴되었고 주변이 논으로 변하였기 때문에 이 무덤의 성격을 확실하게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교동무덤과 같은 성격의 무덤이라고 한다면 5세기 전반에서 후반에 걸쳐 만들어진 무덤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성과 특성을 고려한 인접지역 고분군 통합  재지정 : 사적 514호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전문설명


송현동 고분군은 크게 2개 지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군은 창녕의 동북쪽 목마산(牧馬山) 기슭에서 서쪽으로 송현동 일대에 위치하며 그 일부는 도야리로 통하는 도로를 넘어 교동지역(校洞地域)에까지 넓게 분포되어 있다. 원래는 80여기 정도의 큰 고분군이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16기에 불과하며 횡구식 석곽의 입구가 노출되어 있는 것도 있다.


2군은 송현동 석불이 있는 부근에 20여기가 있으며 대부분 논으로 개간되어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몇 기 되지 않는다. 이 유적은 교동 고분군과 인접하고 있어 유구나 유물의 성격이 거의 같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18년 교동 고분군과 함께 발굴된 89·91호분의 보고서가 나오지 않아 이를 확인할 수는 없다.


이 고분군은 일제시대에 대부분 도굴되었거나 주변이 경작지로 변해 성격 파악이 어렵다. 송현동 고분군을 비롯한 창녕지방 고분군은 일제시대의 약탈적인 발굴을 겪었다. 예를 들면 1918년 엄청난 양의 유물에 대한 도굴행위를 시작으로 권력과 결탁한 도굴행위가 대낮에도 공공연하게 행하여졌으며 도굴한 유물의 대부분은 상인의 손을 거쳐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현재 일본의 '오쿠라(소창(小倉)) 컬렉션'이라는 것도 당시 대구에 살고 있던 오쿠라가 수집한 것으로 그 대부분은 가야의 유물이다. 창녕 고분군의 경우 그 부장품이 방대하였던 것은 출토품의 메모가 남아 있는 교동 7호분의 목록을 참고하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고분군의 출토유물은 굽다리접시(고배(高杯)), 항아리(호(壺)) 등이 대부분이다.




창녕송현동고분군

창녕송현동고분군전경

창녕송현동고분군1

창녕송현동고분군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