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토기나 청자를 굽던 가마터로, 강진 대구면 용운리·계율리·사당리·수동리 일대에 분포되어 있다.
남쪽은 바다와 가까워 해로를 통한 수송이 발달했고, 북으로는 크고 작은 산과 가까워 땔감이 풍부하였다. 또한 도자기의 원료인 고령토와 규석이 산출되어 도자기를 만들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용운천 좌우에 집중적으로 가마터가 있는데, 용운천 상류에 위치한 용운리에는 75곳의 가마터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이 중 몇 곳을 제외한 대부분의 가마터는 고려 전기에 성립된 곳으로 청자의 기원과 초기청자의 특징을 밝힐 수 있는 지역으로 중요하다.
계율리는 현재 59곳의 가마터가 남아 있으며, 고려 전기와 후기에 양식화된 상감청자 조각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용운천 하류의 비교적 넓은 들에 있는 사당리에는 43곳의 가마터가 있으나, 하천의 침식과 개간·도굴들로 심하게 파손되어 있는 상태이다. 최고 수준의 청자가 만들어지던 고려 중기와 후기의 가마터로, 청자 절정기의 비색과 상감청자를 비롯한 고려청자의 여러 특징이 변화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곳이다.
수동리는 사당리 남쪽의 들판에 있는 마을로 6곳의 가마터가 있으며, 대체로 고려 후기의 것이다. 도자기의 형태와 기법이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며, 유약의 색과 모양도 매우 다채롭다.
이와 같이 대구면 일대에는 고려 전 시대에 걸치는 가마터가 남아 있으며, 각 시기의 특색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전라북도 부안의 청자가마터와 함께 고려청자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심이 되는 가마터라 할 수 있다.
전문설명
대구면 용운리(大口面 龍雲里)·계율리(桂栗里)·사당리(沙堂里)·수동리(水洞里) 일대는 고려 전기간에 걸쳐 청자를 제작하던 가마터가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최대의 요지군(窯址群)이다.
남쪽은 바다와 경계하여 해로(海路)를 통한 수송이 발달했고, 북으로는 크고 작은 산과 접해 땔감이 풍부하여 고령토와 규석이 산출되어 도자기를 제작하기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일제시대부터 고려청자의 대표적인 산지로 알려져 도굴의 피해를 입었고, 경지정리와 도로공사 등으로 가마터의 일부가 파괴되었지만, 비교적 보호관리가 잘되어 현재까지도 대다수의 유적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이곳은 1913년에 처음 알려진 이래, 몇 차례에 걸친 현장조사가 이루어지다가 1939년 고적(古蹟) 제107호로 지정되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1963년에 사적(史蹟)으로 지정하여 가마터 100여개소와 주변 18만평을 보존하였다. 1964년 이후 1977년까지 국립박물관에 의해 8차에 걸쳐 사당리 일대 요지에 대한 발굴이 진행되어 청자가마와 작업장 등을 확인하였다. 이어 1979년부터 3년에 걸쳐 용운리 10호 가마의 발굴이 실시되어, 이곳에 모두 4기(基)의 가마가 중첩되어 있는 것을 확인한 후 이전 복원하였다. 1991년에는 해강도자미술관에 의해 대구면 전지역에 대한 지표조사가 실시되어 183곳에 달하는 청자가마터가 밀집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용운리에는 75개소의 가마터가 있으며, 대체로 보존상태가 좋다. 이중 몇개소를 제외한 대부분의 가마터는 고려 초기(高麗 初期)에 제작활동을 벌이던 곳으로, 당 말기(唐 末期)의 것과 유사한 해무리굽완이 발견되고 통일신라 말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가마가 몇 군데 흩어져 있어서 청자의 기원과 초기 청자(初期 靑磁)의 특징을 밝힐 수 있는 지역으로 중요시되고 있다. 순청자·음각·양각·퇴화청자가 주류를 이룬다.
계율리에는 현재 59개소의 가마터가 있으며, 저수지 공사로 유실되거나 논으로 변한 곳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좋다. 이곳에는 고려 초기의 가마도 소수 있지만, 대부분이 고려 전기(高麗 前期)와 후기(後期)의 것이어서 땔감을 찾아 골짜기의 아래쪽으로 이동했다가 일부가 되돌아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초기와 달리 형태와 굽이 독특하게 변화된 전기(前期)의 청자파편이 주류를 이루며, 후기(後期)의 양식화된 상감장식의 청자도 다수 나타난다. 초기 청자의 종류 이외에 압인양각·상감·철화 등이 새롭게 나타난다.
사당리에는 현재 43개소의 가마터가 있지만, 하천의 침식이나 개간 등으로 파괴가 비교적 심하며, 최고 수준의 청자를 만들던 가마가 집중되어 있어 도굴의 피해가 가장 많았던 곳이다. 가마의 대부분이 고려 중기와 후기·말기의 것으로, 청자 절정기의 비색과 상감청자를 비롯하여 고려청자의 제반 특징이 점차 변화되는 과정을 밝힐 수 있어 중요한 지역이다. 고려 초부터 발전하던 장식기법 이외에도 압인양각·상감·진사채·투각·상형 등 다양한 수법이 나타나며, 문양소재도 용·연꽃·모란·여지·대나무·인물·운학·포류수금 등 수많은 종류가 등장한다. 유색은 맑고 투명한 비색과 담록색이 주류를 이루다가 점차 반투명한 회록과 갈록색으로 변화되며, 그릇에 각종 명문(銘文)이 있는 예가 다수 발견된다.
수동리에는 현재 6개소의 가마터가 있지만, 하천침식과 개간으로 파괴가 심하다. 대부분이 고려 후기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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