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70호 부안 진서리 도요지

오늘의 쉼터 2008. 2. 10. 22:26


종     목 사적  제70호
명     칭부안 진서리 도요지(扶安鎭西里陶窯址)
분     류 유적건조물 / 산업생산/ 요업/ 도자기가마
수량/면적 180,896㎡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전북 부안군  진서면 진서리 56
시     대고려시대
소 유 자국유,사유
관 리 자부안군
일반설명

유천리가마터(사적 제69호)와 함께 고려 중기의 대표적 청자가마터로, 유천리 가마터에서 멀지 않은 해변에 위치한다. 특히 철회청자 조각이 많이 발견되는 곳인데, 현재는 논밭으로 변하거나 바로 해안가에 있는 것이 많아서 파괴가 심하다.

진서리는 연동과 신작리·구작리의 촌락을 모두 일컫는 것으로, 모두 40여 곳의 가마터가 남아있다. 가마는 발견 당시 해안으로 뻗어나간 언덕의 남쪽 경사면에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아래쪽은 이미 바닷물에 의해 무너진 상태였다.

가마는 경사면에 긴 구덩이를 파고, 양쪽 윗부분으로부터 둥글게 쌓아올렸으며 위로는 2개의 연기 구멍이 있다. 몇 개의 칸을 가진 칸막이 가마로서, 칸막이의 밑부분에는 2개씩의 창살이 있다. 가마에서는 주로 13세기경에 속하는 많은 양의 초벌구이 조각과 적은 양의 청자조각들이 발견되었다.

발견되는 도자기의 형태는 대접·접시·밥그릇(발) 종류가 가장 많으며, 매병·병·장구·합(뚜껑있는 작은 그릇)·완·주전자 등이 있다. 음각·양각·상감·철화 등의 다양한 수법이 사용되었고, 문양장식은 국화무늬·연꽃무늬·모란무늬·덩굴무늬·구름과 학무늬·버들무늬가 이용되었다.


전문설명


진서리 요지는 유천리 요지에서 서쪽으로 4㎞남짓 떨어진 곰소만의 해변가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1929년에 발견될 당시 이미 해변가에 위치한 관계로 요지 일부가 유실된 상태였으며, 현재는 전답으로 변하면서 파괴가 극히 심한 상태이다.

진서리는 연동<蓮洞>·진서리<鎭西里>부락·신작리<新鵲里>·구작리<舊鵲里>를 총칭하는 것으로, 이 4개의 부락에 40여개의 요지가 산재하고 있다. 유천리에서 들어오는 초입에 있는 연동에 6개소가 있고, 진서리에 4∼5개소,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해변가인 신작리 구작리에 있는데, 이중 연동의 파편이 비교적 우수한 편이다.

이곳 요지군에서는 고려시대 11세기에서 13세기에 걸친 청자류들이 번조되었는데, 출토되는 기형에는 대접·접시·발·대반<大盤>·잔탁·완·호·주전자 등이 있으며, 문양장식에는 음각·양각·상형<象形>·상감·철화·철채·퇴화 등의 수법이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문양으로는 국화·연화·모란·당초·초화·보상화·연판·운학·수금<水禽>·버들문 등이 음각이나 상감으로 베풀어져 있다. 유색은 회청색·담청색·담록색·암록색·황갈색 등 여러 가지이다. 태토는 정선되지 못해 잡물이 섞여 거친 예가 많으며, 규석받침도 있지만 흙비짐받침으로 포개어 구운 예가 많다.

진서리 12호 요지에서는 일제시 일인학자<日人學者 > '야수 건'<'野守 健'>에 의해 가마유구가 조사되어 보고된 바 있다. 가마는 발견 당시 해안에 돌출된 구릉의 남쪽 경사면에 축조되어 아래쪽은 이미 해수에 의해 유실된 상태였다. 폭이 약 70∼100㎝ 정도의 기다란 구덩이를 파고 점토로 양벽을 궁륭상으로 축조하였으며, 뒤편의 가장 높은 곳에 2개의 연기구멍을 만들고, 밑부분에 봉통을 만들었지만 유실되었다. 가마의 내부에는 약 2m 정도의 간격을 두고 중간에 창살기둥을 세워 2개의 불창을 만든 칸가마로, 요상<窯床>에는 모래를 깔았다. 가마에서는 다량의 초벌구이편과 소량의 청자편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이 진서리 요지군은 인근의 유천리 요지와 함께 고려 중엽의 대표적인 요지로서, 특히 철화청자편이 많이 발견되는 것이 특징이다.




부안진서리도요지전경

가마터발굴현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