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하류의 넓은 평야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분산의 정상에 둘레 약 900m에 걸쳐 돌로 쌓은 산성이다.
처음 쌓은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시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전기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박위가 수리하여 쌓은 뒤, 임진왜란(1592) 때 무너진 것을 고종 8년(1871)에 다시 쌓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산 위의 평탄한 지형을 둘러서 그 주위에 남북으로 긴 타원형을 이루도록 쌓았다. 서남부는 험준한 천연 암벽을 그대로 이용하였으며, 현재 성벽이 부분적으로 남아있다. 성 안에 이르는 통로는 산성 서쪽에 있는 계곡을 거쳐 북쪽 뒤편에서 들어가는 길을 이용한 듯 하다. 현재 성 안에 우물과 암자, 그리고 민가가 있으며, 산꼭대기에는 3기의 비석이 있다.
성 주변에는 가야 무덤들과 수로왕비릉, 가야의 건국설화와 관련있는 구지봉이 있어 이 성과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전문설명
경상남도 김해시 동쪽에 있는 해발 330m의 분성산(盆城山) 정상부를 에워싼 삼국시대의 석축(石築) 산성(山城)으로 둘레 약 929m의 성벽이 험준한 암벽을 이용하여 타원형으로 산 위의 평탄지를 감싸고 있다.
현재 성벽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높이 3-4m이고 너비가 2-7m에 이르도록 자연할석으로 축조되었다. 이 산성은 낙동강 하류의 넓은 평야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산 위의 요해지인 분산(盆山)의 정상에 있고, 남쪽으로 한층 낮아진 곳에도 약간의 토루 흔적이 있어서 본디는 보다 규모가 컸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분산(盆山)이라고도 불리는 이 산은 큰 수목들이 자랄 수 없는 바위로 되어 있으며, 성은 산 위의 평탄한 지형과 안부(鞍部)를 둘러서 그 주위에 남북으로 긴 타원형을 이루는 테뫼형 산성으로, 2개의 문지와 1개의 암문이 남아 있다.
성벽은 부분적으로는 천연의 암벽을 그대로 이용하였는데, 특히 구(舊) 김해시에 면한 서남부는 높은 암석들이 솟아 있어서 매우 험준하다. 성내에 이르는 통로는 산성 저편에 있는 계곡을 거쳐 북쪽 후면에서 들어가는 길을 주로 이용한 것 같으나, 지금은 동남쪽으로 오르는 길이 많이 이용되기도 한다. 성벽은 산꼭대기의 평탄부로부터 약간 내려온 경사면에 축조하였으며, 수직에 가까운 석벽은 높이가 3∼4m 가량 되는데 무너진 부분이 적지 않다.
현재의 성벽이 축조된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정국군박공위축성사적비(靖國君朴公위築城事蹟碑)에 의하면 고려 말에 박위(朴위)가 옛 산성에 의거하여 수축한 뒤, 임진왜란 때 허물어진 것을 1871년(고종(高宗) 8)에 다시 현재의 성벽으로 개축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산성은 성터의 선정법이 우리나라 삼국시대 산성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테뫼형을 따르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초축연대가 삼국시대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즉 가락국의 중심 근거지를 이룬 산성으로 판단된다.
산성의 아래쪽 산자락에 있는 고분군(古墳群)들도 역시 이 시대의 유적지들이어서 이 산성의 편년을 밝히는 자료가 되고 있다. 한편 그 서편 산 아래로는 인접해서 수로왕비릉(首露王妃陵)과 구지봉(龜旨峯)이 위치하고 있다. 산성의 서남쪽에는 분산 봉수대(烽燧臺)가 있었으나, 허물어진 것을 최근 복원(復元)하였다.
김해 분산성 보수 공사 후 분산성 분산성항공사진 분산성 분산성원경 분산성전경 성벽상태 분산성내봉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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