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개혁 이후 자주독립의 의지를 다짐하기 위해 세운 기념물이다.
갑오개혁(1894∼1896)은 내정개혁과 제도개혁을 추진하였던 개혁운동이다. 그러나 외국세력의 간섭으로 성공하지 못하였고, 나라의 자주독립 또한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국민들은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는 어떠한 간섭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중국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게 되었다.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협회의 주도하에 국왕의 동의를 얻고 뜻있는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으며,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독립문을 완성하였다.
화강석을 쌓아 만든 이 문의 중앙에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있고, 왼쪽 내부에는 정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다. 정상에는 돌난간이 둘러져 있으며, 홍예문의 가운데 이맛돌에는 조선왕조의 상징인 오얏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그 위의 앞뒤에는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는 글씨와 그 양옆에 태극기가 새겨져 있다. 문앞에는 영은문주초(사적 제33호) 2개가 남아있다.
원래 남동쪽으로 70m떨어진 길 가운데에 있었는데, 1979년 성산대로 공사에 따라 지금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전문설명
독립문< 獨立門 >은 갑오경장< 甲午更張 > 이후 자주독립 결의를 다짐하려고, 중국< 中國 > 사신< 使臣 >을 영접하던 사대외교< 事大外交 >의 상징인 영은문< 迎恩門 >을 헐고 만든 우리나라 근대사< 近代史 >에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룬 19세기말의 자주민권< 自主民權 > 자강운동< 自强運動 >의 한 기념물이다. 조선< 朝鮮 > 고종< 高宗 > 건양< 建陽 > 원년< 元年 >(1896) 서재필< 徐載弼 > 박사의 발의< 發議 >로 국왕의 동의를 얻어 뜻있는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광범위한 호응을 받아 동년 11월 21일 정초식< 定礎式 >이 이루어지고, 만 1년 1개월 후인 광무< 光武 > 2년(1898) 1월 중순에 완공하였다. 건축양식은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 凱旋門 >을 모형< 模型 >으로 한 것인데, 독일< 獨逸 > 공사관< 公使館 > 스위스 기사< 技士 >가 설계도를 작성하였으며, 공역< 工役 >은 한국인 기사 심의석< 沈宜碩 >이 담당하고, 노역< 勞役 >은 중국인< 中國人 > 노무자를 주로 써서 만들었다. 화강석< 花崗石 >으로 쌓은 이 문은 높이 14.28m, 너비 11.48m로 중앙에 홍예문< 虹예門 >이 있고, 왼쪽 내부에서 옥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으며, 문 앞에는 사적 제33호인 영은문주초< 迎恩門柱礎 > 2개가 서 있다. 원래 남동쪽 70m 지점인 도로 가운데에 있었으나 1979년 성산대로< 城山大路 > 건설에 따라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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