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34호 부여 청마산성

오늘의 쉼터 2008. 2. 8. 19:47



종     목 사적  제34호
명     칭부여청마산성(扶餘靑馬山城)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415,808㎡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산1-1
시     대삼국시대
소 유 자국유,사유
관 리 자부여군
일반설명

부여 능산리 월명산에 있는 백제 산성으로, 당시 수도였던 사비를 방어하기 위하여 쌓았다.

골짜기를 성안에 두고 산 능선을 따라 돌로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전반적으로 성벽이 많이 무너져 있으나, 서쪽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계곡의 물이 흐르는 서쪽 성벽에 수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방어를 목적으로 쌓은 성이라 남문이 없다. 현재 성안에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기 위해 높이 쌓은 망대와 각시우물이라 전하는 우물터, 경룡사터, 의열사터와 건물터가 남아있다.

백제 산성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산성으로, 석성산성·성흥산성·증산성과 함께 부여를 보호하기 위한 외곽 방어시설로서 의미가 크다.


전문설명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의 월명산(月明山)에 있는 백제 시대의 석축산성으로 백제의 산성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큰 산성이다. 왕도인 사비 도성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순수한 포곡식 산성으로 현재 성내에는 망대(望臺)·우물터·건물터·절터가 있고, 수구문으로 추정되는 서쪽의 계곡 외에는 특별한 방어 시설은 보이지 않는다.

이 산성은 백제 말기에는 수도인 사비(泗비)를 방어하기 위한 외곽 시설로 축조된 것으로 보이며, 현재 서쪽 성벽이 가장 잘 남아 있는데 높이는 약 4~5m, 너비 3~4m 정도이다. 동쪽 성벽도 이와 비슷한데 많이 무너져 있다. 무너진 부분의 단면 층을 보면 기초 부분으로 내려갈수록 잡석(雜石)을 많이 넣어 축조하였고, 특히 기초 부분은 먼저 개흙(진흙)을 깔고 그 위에 잡석을 깐 다음에 성벽을 축조하고 있다. 또한 다른 성과 같이 내부는 자연적인 호를 이루고 있다. 북쪽 성벽에는 4, 5단의 석축 상태가 원형대로 남아 있다. 전반적으로 성벽의 붕괴가 심하나 성벽의 통과 지점은 확인할 수 있다. 지형상으로 보아 수구(水口)는 서쪽 성벽에 설치되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수도였던 사비와 연락하기 위하여 이 산성의 주문(主門)은 서쪽 수구문 쪽으로 있었을 것이나 무너져서 알 수 없다.

백제 산성은 방어가 목적이었던 관계로 성문이 적은 것이 특징인데, 그래서인지 남문이 없으며 시야가 트인 곳에서 망대터로 여겨지는 흔적이 있다. 성내에 있는 계곡의 위쪽으로 현재 경작하고 있는 곳이 당시 건물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성내에는 속칭 '각씨우물'이라 전해 내려오는 우물터가 있는데, 수량이 풍부하다. 경룡사지(驚龍寺址)·의열사지(義烈寺址) 등이 남아 있으며, 성 남쪽에는 유명한 능산리 백제고분군이 있다.

이 산성은 백제 왕도의 나성의 바깥을 지키는 산성으로서, 서쪽의 성흥산성(聖興山城)·북쪽의 증산성(甑山城)·남쪽의 석성산성(石城山城)과 함께 수도 사비를 보호하기 위한 외곽 방어 시설로서 큰 의미를 지닌다.




부여청마산성

부여청마산성

부여청마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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