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북천변(北川邊)에 있는 이 능(陵)은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 26m, 높이 6m이다.
봉토 밑에 판석조(板石造) 호석(護石)을 둘렀는데 밑에 지대석(地臺石)을 놓고 그 위에 판석(板石)으로 면석(面石)을 세웠으나, 현재 면석은 없어진 것이 많다. 면석 사이에는 탱석(撑石)을 끼워 면석을 고정시키고 아울러 탱석에는 등간격으로 방향에 따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였으며 그 위에 갑석(甲石)을 덮었다.
현재 십이지신상은 해(亥), 자(子), 축(丑), 인(寅), 묘상(卯像)의 5개만 남아 있다. 또 호석(護石) 밖으로는 석주(石柱)를 세워 돌난간을 설치하고 호석(護石)과 난간(欄干) 사이 바닥에는 판석(板石)을 깔아 회랑(廻廊)으로 하였다. 난간(欄干) 석주(石柱)는 상하로 두 개의 원공(圓孔)이 뚤려 관석(貫石)을 끼우게 되어 있으나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외에는 아무런 외호물(外護物)이 없다. 아마도 이 능(陵)의 전방으로 흐르고 있는 경주의 북천(北川)이 범람하여 능(陵)의 일부가 유실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제41대 헌덕왕(憲德王)(재위(在位) 809∼826)은 본명이 김언승(金彦昇)이며, 조카인 애장왕(哀莊王)을 죽이고 즉위하였다. 재위기간에 농사를 장려하고 친당정책(親唐政策)을 폈으나, 김헌창(金憲昌)의 반란과 김범문(金梵文)의 반란이 일어나는 등 국내정세가 매우 혼란스러웠고, 치적 또한 두드러지지 않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826년에 왕이 죽자 시호를 헌덕(憲德)이라 하고 천림사(泉林寺)의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구당서(舊唐書)》와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는 831년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현재 천림사(泉林寺)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이 왕릉의 남쪽에 사지(寺址)가 있어 이를 천림사(泉林寺) 터로 비정하기도 하지만 근거가 확실한 것은 아니다.
전문설명 경주 북천변(北川邊)에 있는 이 능(陵)은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 26m, 높이 6m이다.
봉토 밑에 판석조(板石造) 호석(護石)을 둘렀는데 밑에 지대석(地臺石)을 놓고 그 위에 판석(板石)으로 면석(面石)을 세웠으나, 현재 면석은 없어진 것이 많다. 면석 사이에는 탱석(撑石)을 끼워 면석을 고정시키고 아울러 탱석에는 등간격으로 방향에 따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였으며 그 위에 갑석(甲石)을 덮었다.
현재 십이지신상은 해(亥), 자(子), 축(丑), 인(寅), 묘상(卯像)의 5개만 남아 있다. 또 호석(護石) 밖으로는 석주(石柱)를 세워 돌난간을 설치하고 호석(護石)과 난간(欄干) 사이 바닥에는 판석(板石)을 깔아 회랑(廻廊)으로 하였다. 난간(欄干) 석주(石柱)는 상하로 두 개의 원공(圓孔)이 뚤려 관석(貫石)을 끼우게 되어 있으나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외에는 아무런 외호물(外護物)이 없다. 아마도 이 능(陵)의 전방으로 흐르고 있는 경주의 북천(北川)이 범람하여 능(陵)의 일부가 유실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제41대 헌덕왕(憲德王)(재위(在位) 809∼826)은 본명이 김언승(金彦昇)이며, 조카인 애장왕(哀莊王)을 죽이고 즉위하였다. 재위기간에 농사를 장려하고 친당정책(親唐政策)을 폈으나, 김헌창(金憲昌)의 반란과 김범문(金梵文)의 반란이 일어나는 등 국내정세가 매우 혼란스러웠고, 치적 또한 두드러지지 않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826년에 왕이 죽자 시호를 헌덕(憲德)이라 하고 천림사(泉林寺)의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구당서(舊唐書)》와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는 831년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현재 천림사(泉林寺)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이 왕릉의 남쪽에 사지(寺址)가 있어 이를 천림사(泉林寺) 터로 비정하기도 하지만 근거가 확실한 것은 아니다.
경주 헌덕왕릉 경주 헌덕왕릉 경주 헌덕왕릉 호석 세부 십이지신상 난간석 병풍석 석상 경주 헌덕왕릉 전경1 경주 헌덕왕릉 전경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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