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33호 서울 영은문 주초

오늘의 쉼터 2008. 2. 8. 19:37


종     목

사적  제33호

명     칭서울 영은문 주초 (서울 迎恩門 柱礎)
분     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역사사건/ 역사사건
수량/면적 사적32호에포함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945
시     대조선시대
소 유 자국유
관 리 자종로구
일반설명

조선시대에 중국의 사신을 맞아들이던 모화관 앞에 세웠던 주춧돌이다.

개화기에 우리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다짐하는 의미로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면서 그 기둥을 받치던 밑돌인 주초만 남게 되었다. 모화관은 조선 태종 7년(1407)에 처음 세우고 모화루라 하였는데, 그 뒤 세종 12년(1430)에 모화관이라 이름을 바꾸고 그 앞에 상징적인 의미의 홍살문을 세웠다. 중종 32년(1537)에 홍살문보다 격식을 갖춘 형식의 문을 만들고 ‘영조문’이라 하였다가, 중종 34년(1539)에는 중국 사신의 건의로 영은문이라 이름을 고쳤으며, 연주문·연은문이라고도 하였다.

중종 때 만들어진 문은 1칸 규모이며 두 개의 긴 주춧돌 위에 원기둥을 세우고 우진각지붕을 얹었는데, 지붕은 청기와로 덮고 각종 동물 모양을 조각한 잡상을 배치하였다. 남아 있는 2개의 주초는 2단의 사각형 받침돌 위에 기둥처럼 길게 세워져 있다. 위에 놓인 받침돌에는 2개씩의 안상(眼象)이 조각되어 있다.

1896년 독립문이 세워지면서 주초만 그 앞에 세워두었는데, 1979년 성산대로 공사로 인해 독립문과 함께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게 되었다.


전문설명

 

조선시대 대명(對明) 사대외교(事大外交)의 표상물인 모화관(慕華館) 앞에 있던 일각문(一脚門)터의 주초석(柱楚石)이다.

1896년(건양(建陽)1) 미국 망명에서 돌아온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설립하고 자주독립의 결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영은문 철거와 독립문의 건립을 발의하고 국민의 지지와 국왕의 동의를 얻었다. 때를 같이하여 모화관(慕華館)을 개수하여 독립관(獨立館)이라 부르고, 영은문(迎恩門)을 헐어낸 후 그 자리에 독립문(獨立館)을 세우게 되자 영은문의 기둥을 받쳤던 초석만 남아 있게 된 것이다.

명(明)의 사신(使臣)을 영접하던 건물인 모화루(慕華樓)를 지금의 위치인 서대문밖에 처음 세운 것은 태종(太宗)7년(1407)이다. 세종(世宗) 12년(1430)에는 모화관(慕華館)으로 개칭하고 그 앞에 홍살문(紅箭門)을 세웠다. 중종(中宗)31년(1536) 김안로(金安老)의 주청(奏請)으로 격이 낮은 홍살문을 헐고 청기와를 얹은 영조문(迎詔門)을 세운 것이 영은문(迎恩門)의 전신(前身)이다. 중종(中宗) 34년(1539)에 명나라의 사신으로 온 설정총(薛廷寵)이 이르기를 "사신(使臣)이 올 때에는 조칙(詔勅)이나 상사(賞賜)등을 가지고 온다. 그러므로 다만 영조(迎詔)라 하는 것은 타당한 것 같지 않다"라고 말하고, '영은문(迎恩門)'이란 이름을 써서 이를 걸도록 한 것이다. 선조(宣祖) 39년(1606)에 명의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와서 문의 액판(額板)을 다시 써서 그 낙관(落款)에 《흠차정사김릉주지번(欽差正使金陵朱之蕃)》이라 하였다. 영은문(迎恩門)이라는 이름은 '연주문(延柱門)' 혹은 '영은문(迎恩門)'으로도 표기 되었음을 고지도(古地圖)로 확인할 수 있다.

이 주초는 1896년 독립문(獨立門) 공사시 독립문 앞에 남게 되었으나, 1934년에 원래 위치에서 약간 남쪽으로 옮겨놓았다. 1963년에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1979년에 이앞을 가로지르는 성산대로가 개설되면서 독립문과 함께 원위치에서 서북방으로 약 70m 지점에 옮겨 세워져 있다.

《중종실록(中宗實錄)》에는 영은문은 두 개의 기둥을 세운 1칸 규모로, 지붕에는 청기와를 얹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철거되기 전의 모습인 1890년의 사진자료에 따르면, 문은 두 개의 장초석(長礎石)위에 두리 기둥을 세우고, 기둥머리에 창방과 평방을 걸고 평방위에는 6구의 다포작(多包作)을 배열했다. 겹처마에 우진각지붕을 하고 있으며 용마루는 회를 높이 바른 양성을 두었고, 용마루 양 끝에 취두(鷲頭)를 추녀마루에는 잡상(雜象)을 얹었다. 양 기둥사이에는 낙양(落陽)으로 장식하고 그 위에는 풍혈이 새겨진 인방재가 있고, 중앙에 '영은문(迎恩門)'이란 편액(扁額)이 걸려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주초석(柱礎石)은 화강석(花剛石)으로, 네모난 지대석(地臺石)과 대석(臺石) 그리고 네모난 높은 초석(礎石)으로 구분하여 깎았는데, 대석의 각 면에는 안상(眼象)이 좌우로 2구씩 새겨져 있다. 이 위에 민흘림을 가진 장초석(長礎石)이 모각되어 있는데 사방의 모를 약간씩 죽였다. 초석상면에는 목조가구(木造架構)를 고정시켰던 홈이 패어있고 또 상부 언저리에는 철 띠를 돌려 초석(礎石)의 파손(破損)을 방지(防止)한 것 같다.




영은문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