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송화산 동쪽 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 장군 김유신의 무덤이다.
김유신(595∼673)은 삼국통일에 중심 역할을 한 사람으로, 김춘추(후에 태종무열왕)와 혈연관계를 맺으며 정치적 발판을 마련하였고, 여러전투와 내란에서 큰 공을 세웠다. 660년에 귀족회의의 우두머리인 상대등이 되어 백제를 멸망시켰으며, 668년에는 신라군의 총사령관인 대총관(大摠管)이 되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아 신라 삼국통일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무덤은 지름이 30m에 달하는 커다란 규모이며, 봉분은 둥근 모양이다. 봉분 아래에는 둘레돌을 배치하고 그 주위에는 돌난간을 둘렀는데, 둘레돌은 조각이 없는 것과 12지신상을 조각한 것을 교대로 배치하였다. 12지신상은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몸은 사람의 형체이고 머리는 동물 모양이다. 조각의 깊이는 얕지만 대단히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처럼 무덤 주위의 둘레돌에 12지신상을 조각하는 것은 통일신라 이후에 보이는 무덤양식으로, 성덕왕릉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유신이 죽자 흥덕왕은 그를 흥무대왕으로 받들고, 왕릉의 예를 갖춰 무덤을 장식한 것으로 보인다. 또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이 죽자 문무왕이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고 그의 공덕을 기리는 비를 세웠다고 전한다. 그러나 현재 그 비는 전하지 않고, 조선시대에 경주부윤이 세운 비만 남아있다.
※(김유신묘 → 경주 김유신묘)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전문설명
경주 충효동 송화산(松花山) 줄기가 동쪽으로 뻗은 구릉위에 자리잡고 있다. 묘의 봉분 지름이 약 30m에 이르는 원형분인데 봉분 둘레에는 호석(護石)을 두르고 그 외곽에는 석난간(石欄干)을 둘렀다. 묘 봉분 앞에는 혼유석(魂遊石)이 배치되어 있다.
봉분의 호석(護石)은 벽석(壁石)·연헌석(緣軒石)·연대석(緣臺石)으로 짜여 있는데, 둘레에는 높이 95㎝쯤 되는 탱주석(撑柱石)을 세웠다. 이 탱주석(撑柱石)은 12지신상(支神像)이 조각된 것과 아무 조각이 없는 것이 있는데 신상(神像)이 조각된 것과 조각이 없는 탱주석(撑柱石)을 교대로 배치하고 있다. 12지신상석(支神像石)은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는데, 몸체는 사람의 형체이며 머리는 동물상이다. 방위 따라 자상(子像)(쥐)·축상(丑像)(소)·인상(寅像)(호랑이)·묘상(卯像)(토끼)·진상(辰像)(용)·사상(巳像)(뱀)·오상(午像)(말)·미상(未像)(양)·신상(申像)(원숭이)·유상(酉像)(닭)·술상(戌像)(개)·해상(亥像)(돼지)이다. 몸의 자세는 서서 약간 뒤로 젖힌 자세이다. 12지(支) 조각은 양각으로 새겼는데 조각의 깊이는 얕지만 대단히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1973년 5월 봉분에서 북북서쪽 16m 거리 땅속에서 납석으로 만든 해상(亥像) 하나가 발견되었다. 이 해상(亥像)은 갑옷을 입고 오른손에 칼을 들고 천의 자락을 나부끼며 몸을 약간 뒤로 젖힌 위엄 있고 당당한 모습이었는데, 크기는 높이 40.8㎝·너비 21㎝·두께 12.5㎝였다.
이 납석상의 발견으로 인하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1974년 김유신묘(金庾信墓) 주위의 발굴조사와 석조물 복원을 위한 실측조사 작업이 실시되었다. 그때 정동(正東)의 땅속에서 묘상(卯像)의 파편이 발견되었다. 다른 방위에도 납석제가 묻혀 있었던 것이나 표토가 이미 유실되어 납석제 12지신상(支神像)이 남아 있지 않았다. 서쪽 묘역에서는 산신제를 지내는 제단 같은 장방형 판석도 묻혀 있었으며 혼유석(魂遊石)이 있었던 자리도 찾아내어 혼유석(魂遊石)을 복원하였으며 없어져버린 난간석(欄干石)도 복원하였다.
12지신상(支神像)을 묘(墓)의 호석(護石)에 조각한 것은 통일신라 묘제의 고유한 양식이다. 중국(中國)에는 묘실내(墓室內)에 12지신상(支神像)을 만들어넣은 것은 있어도 봉분 주위에 조각한 것은 통일신라만의 독특한 창의물이다.
묘(墓)의 봉분 주위에다 12지신상(支神像)을 조각하여 배치한 것은 성덕왕(聖德王)(702∼737)릉(陵)부터로 보고 있다. 성덕왕릉 12지신상(支神像)은 완전 입체상으로 독립되게 만들어져 봉분 주위에 방위에 따라 서 있다. 12지(支) 조각상 때문에 김유신묘의 학술논쟁도 있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보면 흥덕왕(興德王) 때 "김유신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하였는데 그 릉(陵)은 서산(西山) 모지사(毛只寺) 동향(東向)한 산봉에 있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지금의 김유신묘(金庾信墓)의 12지신상(支神像)은 흥덕왕대(興德王代) 흥무왕(興武王)으로 추존된 후에 왕릉(王陵)의 예로 묘(墓)를 조성하면서 12지신상(支神像)을 조각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면 673년 7월 1일 79세로 김유신이 죽자 문무왕(文武王)은 채색 비단 1천필과 2천석의 조(租)를 내리고 군악대(북과 나팔수) 100명을 보내 금산원(金山原)에 예장(禮葬)하고 유사(有司)로 하여금 비(碑)를 세워 그의 공적을 기리고 민호(民戶)를 배정하여 묘(墓)를 수호하게 하였다. 그러나 현재의 묘역에 이 비는 없고, 1710년 경주부윤이 세운 '신라태대각간 김유신묘(新羅太大角干 金庾信墓)'의 비(碑)가 서 있다.
묘역전경 호석세부근접 묘비 경주 김유신묘 전경 경주 김유신묘 봉분 난간 십이지신상 태대각간비 홍무대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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