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국가무형문화재

국가무형문화재 제3호 남사당놀이

오늘의 쉼터 2008. 2. 7. 11:50


종     목

국가무형문화재  제3호

명     칭

남사당놀이 (男寺黨놀이)

분     류

무형문화재 / 전통 공연·예술 / 연희

수량/면적

단체

지 정 일

1964.12.07

소 재 지

서울특별시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황수로

관 리 자

황수로

일반설명

남사당놀이는 꼭두쇠(우두머리)를 비롯해 최소 40명에 이르는 남자들로 구성된 유랑연예인인 남사당패가 농·어촌을 돌며, 주로 서민층을 대상으로 조선 후기부터 1920년대까지 행했던 놀이이다. 남사당놀이는 서민사회에서 자연 발생한 민중놀이로, 양반들로부터 박대를 당해 마을에서 공연하는 것도 자유롭지 못했다.

남사당패는 꼭두쇠를 정점으로 공연을 기획하는 화주, 놀이를 관장하는 뜬쇠, 연희자인 가열, 새내기인 삐리, 나이든 저승패와 등짐꾼 등으로 이루어지지만, 남사당놀이는 풍물, 버나, 살판, 어름, 덧뵈기, 덜미 등으로 구성된다. 풍물은 일종의 농악놀이로 공연 시작을 알리면서 구경꾼을 유도하기 위한 놀이라 볼 수 있다. 버나는 중국의 접시 돌리기와 비슷하게 쳇바퀴나 대접 등을 막대기나 담뱃대 등으로 돌리는 묘기이다. 살판은 오늘날의 덤블링(재주넘기)과 같은 땅재주로, 잘하면 살판이요 못하면 죽을 판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어름은 줄타기 곡예를 이르는 말로 얼음 위를 조심스럽게 걷는 것만큼 어렵다 하여 남사당패내에서만 쓰여지던 말이었으나 점차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게 되었다. 덧뵈기는 탈을 쓰고 하는 일종의 탈놀이이다. 인형극을 이르는 덜미는 인형극에 나오는 중요등장인물에 따라 꼭두각시놀음, 박첨지놀음, 홍동지놀음이라고 부른다. 특히 꼭두각시놀음은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오고 있으며, 우리나라 전통인형극이 남사당놀이밖에 없다는데 역사적 의미가 크다.

남사당놀이는 서민층에서 발생하여 서민들을 위해 공연된 놀이로서 당시 사회에서 천대받던 한과 양반사회의 부도덕성을 놀이를 통해서 비판하며 풀고, 민중의식을 일깨우는 역할을 했다.


전문설명 

 

조선후기에서 1920년대까지도 ‘굿중패 ’또는 남사당(男寺黨)이라고 부르던 전문적인 유랑연예인들이 우리나라 농어촌을 돌아다니며 민중오락을 제공해 왔다. 그들의 주요 상연은 풍물, 버나(대접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보기(가면극), 덜미(꼭두각시) 등으로 재인 광대의 가무백희(歌舞百戱)의 전통을 이어온 것이었다.

특히 꼭두각시놀음은 주로 남사당패가 오늘날까지 전승하고 있다. 이들 연희자들은 인형극을 덜미라고 부르지만 일반적으로는 꼭두각시놀음, 박첨지(朴僉知)놀음 또는 홍동지 놀음이라고 부른다. 이같은 명칭은 모두 인형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우리나라 인형극은 삼국시대인 고구려 때부터 있었으며 대륙으로부터 중국을 거치거나 북방에서 전래된 서역악(西域樂)의 일종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점은 고구려 무악 중에 서역에서 전래된 가면무악과도 서로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형극은 주로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 남한 일대에서 유랑연예인 남사당에 의하여 공연되었던 것 같다. 현존하는 꼭두각시놀음의 극본이 형성된 시기는 그 내용으로 보아 조선후기 서민문화의 대두와 때를 같이하여 이루어졌으며, 극본 내용은 산대도감계통극(山臺都監系統劇)과 같은 계통의 것이다.

첫째 무속과 관련되는 기반문화 요소의 잔존을 조선후기에서 1920년대까지도 ‘굿중패 ’또는 남사당(男寺黨)이라고 부르던 전문적인 유랑연예인들이 우리나라 농어촌을 돌아다니며 민중오락을 제공해 왔다. 그들의 주요 상연은 풍물, 버나(대접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보기(가면극), 덜미(꼭두각시) 등으로 재인 광대의 가무백희(歌舞百戱)의 전통을 이어온 것이었다.

특히 꼭두각시놀음은 주로 남사당패가 오늘날까지 전승하고 있다. 이들 연희자들은 인형극을 덜미라고 부르지만 일반적으로는 꼭두각시놀음, 박첨지(朴僉知)놀음 또는 홍동지 놀음이라고 부른다. 이같은 명칭은 모두 인형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우리나라 인형극은 삼국시대인 고구려 때부터 있었으며 대륙으로부터 중국을 거치거나 북방에서 전래된 서역악(西域樂)의 일종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점은 고구려 무악 중에 서역에서 전래된 가면무악과도 서로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형극은 주로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 남한 일대에서 유랑연예인 남사당에 의하여 공연되었던 것 같다. 현존하는 꼭두각시놀음의 극본이 형성된 시기는 그 내용으로 보아 조선후기 서민문화의 대두와 때를 같이하여 이루어졌으며, 극본 내용은 산대도감계통극(山臺都監系統劇)과 같은 계통의 것이다.

첫째 무속과 관련되는 기반문화 요소의 잔존을 볼 수 있으며, 둘째 파계승에 대한 풍자인데 이 두 가지는 모두 그 정도가 심하지 않다. 셋째 일부처첩(一夫妻妾)의 갈등과 평민층의 생활상, 넷째 양반계급의 횡포에 대한 조롱, 다섯째로 내세의 명복을 비는 불자(佛者)에의 귀의 등을 7내지 8막으로 나누어 다룬다. 박첨지가 설명의 역할을 하여 각 막(幕)을 이어 일관성을 유지한다.

꼭두각시놀음의 구성은 남운룡(南雲龍) 구술본에 따르면 서막에서 박첨지를 시작으로 전막의 각 인형을 차례로 포장막 위로 선보이고 나서, 제1막 박첨지 유람가, 제2막 상좌중춤, 제3막 꼭두각시에서 박첨지와 본처인 꼭두각시와 첩인 덜머리집과의 삼각관계의 갈등에서 꼭두각시는 중이 되려고 입산한다. 제4막 이시미, 제5막 작은 박첨지, 제6막 동방삭, 제7막 표생원, 제8막 깜벡이, 제9막 치도(治道), 제10막 평안감사 매사냥( 이 막에서 양반의 횡포를 보인다.), 제11막 평안감사 상여( 이 막에서 양반에 대한 여러가지 모욕이 있다.)가 있다. 종막에서는 절을 짓고, 복을 비는 축원을 한다.

우리나라 인형극의 조종법은 중국의 인형극과 대체로 동일하며, 일본 인형극과도 동일계통이다. 그러나 인형 조종자가 반주음악에 따라 조종과 창과 대사를 겸하는 일인삼역을 하여 일본의 인형극처럼 분화되지 않았다. 무대는 포장을 치고, 그 뒤에서 조종자가 인형을 포장막 위로 내보내 놀리며 무대와 마주앉은 반주자와 대화를 나눈다.

사용되는 인형은 박첨지, 꼭두각시, 홍동지, 홍백가, 소무당, 덜머리집, 상좌(2), 평안감사, 상제, 이시미, 새, 마을 사람(4) 등이며, 상여, 만사, 법당 등 소도구가 사용된다.




남사당놀이(꼭두각시놀음)

남사당놀이(꼭두각시놀음)

남사당놀이(인형극박첨지놀음)

박첨지놀음

박첨지놀음

박첨지놀음

인형극박첨지놀이

박첨지놀이

대잡기

버나(대접돌리기)

덧뵈기(탈놀이)

풍물놀이(농악)

살판(땅재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