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석비로,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 추정된다. 1979년 입석마을 입구에서 발견되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기도 했지만 비의 중요성을 몰랐던 동네 주민들이 우물가의 빨래판으로 사용하기도 하여 발견된 당시 비문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석비는 돌기둥 모양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4면에 모두 글을 새겼는데, 그 형태가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비슷하다. 비문은 심하게 닳아 앞면과 왼쪽 측면 일부만 읽을 수 있는 상태로, 내용 중 처음에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는 글자가 보이는데 여기에서 고려는 고구려를 뜻한다.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제위(諸位)’·‘사자(使者)’ 등 고구려 관직 이름과 광개토대왕 비문에서와 같이 ‘고모루성(古牟婁城)’등의 글자가 보이고, ‘모인삼백(募人三百)’·‘신라토내(新羅土內)’ 등 고구려가 신라를 불렀던 말들이 쓰여 있어 고구려비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고구려 영토의 경계를 표시하는 비로,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고 한반도의 중부지역까지 장악하여 그 영토가 충주지역에까지 확장되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신라, 백제 3국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전문설명
중원고구려비는 오랜 세월의 풍화로 비문이 심하게 마멸되어 분명하게 확인할 수는 없으나 장수왕 때에 고구려가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고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서 5세기 후반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면비(四面碑)로서 전면 23자씩 10행으로 된 230자의 명문(銘文)이 있으며 좌측면에도 155자가 새겨졌는데 뒷면과 우측면은 9행과 6행의 명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판독된 비문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신라, 백제국의 관계를 밝혀 주는 귀중한 금석문(金石文)이다. 처음 입비(立碑) 당시부터 대석(臺石)과 개석(蓋石)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의 모양이 만주(滿洲) 즙안현(輯安縣)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의 축소된 형상이다.
이 석비는 1979년 4월 8일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에 의하여 발견 조사된 국내 유일의 고구려 비인데 1981년에 이 비의 보호각을 만들어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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