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조선 태조에서부터 조선 철종 때까지 25대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편년체(編年體:역사적 사실을 일어난 순서대로 기술하는 역사서술의 한 방식)로 기록한 책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 사회, 경제, 문화, 정치 등 다방면에 걸쳐 기록되어 있으며, 역사적 진실성과 신빙성이 매우 높다. 또한 사료의 편찬에 있어서 사관이라는 관직의 독립성과 기술에 대한 비밀성도 보장되었다. 실록을 편찬하는 작업은 다음 왕이 즉위한 후 실록청을 열고 관계된 관리를 배치하여 펴냈으며, 사초는 임금이라 해도 함부로 열어볼 수 없도록 비밀을 보장하였다. 사료가 완성된 후에는 특별히 설치한 사고(史庫:실록을 보관하던 창고)에 각 1부씩 보관하였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소실되었지만 20세기 초까지 태백산, 정족산, 적상산, 오대산의 사고에 남아서 전해내려 왔다.
정족산사고, 태백산사고의 실록은 1910년 일제가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하였다가, 광복 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었다. 오대산사고본 실록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가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되어 남은 27책만이 경성제국대학(현재 서울대학교)으로 돌아왔고(1932년), 추가 확인된 47책은 93년만인 2006.7월 일본으로부터 반환되었다. 오대산사고본 47책은 기존 규장각 소장 오대산사고본과 동일본으로서 국보 제151호에 추가 지정되었다(2007. 2.26)
적상산사고본 실록은 구황궁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가 한국전쟁 당시 북한이 가져갔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태백산사고본 848책은 국가기록원 부산지원으로 이관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정족산본 1,181책, 태백산본 848책, 오대산본 74책, 기타 산엽본 21책 총 2,077책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1) 태백산본(太白山本)(848책(冊)) : 태조(太祖)부터 명종(明宗)까지 실록(實錄)은 임란(壬亂) 평정후 선조(宣祖) 36년(1603) 7월부터 동왕(同王) 39년(1606) 3월 사이에 사사고실록(四史庫實錄) 중 유일한 현존본(現存本)인 전주사고본(全州史庫本)을 모본(母本)으로 하여 새로 인출(印出)한 4부(部) 중의 하나이다.
최하한(最下限)인 고종(高宗) 2년(1865)에 인출(印出)한 『철종실록(哲宗實錄)』에 이르기까지 역대(歷代) 실록(實錄)이 편찬되는 대로 첨가되어 온 것으로서, 선조(宣祖) 39년(1606)부터 1910년 일제강점시(日帝强占時)까지 계속 태백산(太白山) 사고(史庫)에 봉안(奉安)되어 오다 일제강점후(日帝强占後)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로 이관(移管) 중(中) 1930년에 당시의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현 서울대학교)으로 이관(移管)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단 1권(卷)의 낙권(落卷)(『문종실록(文宗實錄)』권(卷)11)이 있기는 하나, 거의 완전한 현존본(現存本)으로서 정족산본(鼎足山本)과 함께 그 문화적 가치는 매우 크다.
(2) 정족산본(鼎足山本)(1,181책(冊)) : 태조(太祖)부터 태종(太宗)까지의 실록(實錄)은 세종(世宗) 27년(1445)에 그 이전의 찬진본(撰進本)(춘추관본(春秋館本)·충주사고본(忠州史庫本))을 등사(謄寫)하고, 그 이후 명종(明宗)까지 역대왕(歷代王)의 실록(實錄)은 편찬되는 대로 하한(下限) 선조(宣祖) 4년 『명종실록(明宗實錄)』 전주사고(全州史庫)에 봉안(奉安)되어 오다 선조(宣祖) 25년(1592) 임진란(壬辰亂) 때 전주(全州) 유생(儒生) 안의(安義)·손홍록(孫弘祿) 2사람에 의하여 태조(太祖)부터 명종(明宗)까지의 실록(實錄)을 기타 동사고(同史庫) 소장(所藏) 전적(典籍)과 함께 정읍군(井邑郡) 내장산(內藏山)으로 운반하여 병화(兵火)를 면하게 하였다.
이듬해 7월(1593) 정부가 인계받아 해주(海州)로 옮겼다가 다시 동왕(同王) 29년(1596)에 강화도(江華島), 그리고 또다시 동왕(同王) 32년(1599)에는 영변(寧邊) 묘향산(妙香山)으로 소개(疎開) 이장(移藏)시켰다. 평란(平亂) 후(後) 선조(宣祖) 36년(1603) 7월부터 39년(1606) 3월 사이에 이 유일한 전존본(傳存本)을 모본(母本)으로 하여, 4부(部)의 실록(實錄)을 인출(印出)한 뒤, 강화도(江華島) 마니산(摩尼山)에 봉안(奉安)하고, 그 이후 실록(實錄)이 편찬되는 대로 첨가해 왔는데, 인조(仁祖) 14년(1636)의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청군(淸軍)에 의한 피해를 입어 많은 낙권(落卷) 낙장(落張)이 생겼다. 또 효종(孝宗) 4년(1653)에는 실화(失火)로 약간(若干) 권(卷)을 잃은 바도 있어, 현종(顯宗) 6년(1665)에 이를 보수(補修)하였다.
숙종(肅宗) 4년(1678)에는 같은 강화도(江華島) 안의 정족산(鼎足山)에 새로 사고(史庫)를 짓고, 마니산사고본(摩尼山史庫本)을 이곳으로 이장(移藏)하였으며, 이후 계속 편찬되는 것이 또한 여기에 추가되었다. 1910년 일제강점후(日帝强占後) 전래(傳來)의 규장각도서(奎章閣圖書)와 함께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로 이관(移管) 중(中), 1930년에 다시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현 서울대)으로 이관(移管)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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