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서애 유성룡(1542∼1607)이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징비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이다.
유성룡은 퇴계 이황의 문인이며, 김성일과 동문수학하였다. 명종 21년(1566)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예문관검열, 공조좌랑, 이조좌랑 등의 벼슬을 거쳐 삼정승을 모두 지냈다. 왜적이 쳐들어올 것을 알고 장군인 권율과 이순신을 중용하도록 추천하였고,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성곽을 세울 것을 건의하고 군비확충에 노력하였다. 또한 도학·문장·글씨 등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그가 죽은 후 문충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안동의 병산서원 등에 모셔졌다.
이것을 저술한 시기는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유성룡이 조정에서 물러나 향리에서 지낼 때 전란 중의 득실을 기록한 것이다. 내용을 보면 임진왜란 이전에 일본과의 관계, 명나라의 구원병 파견 및 제해권의 장악에 대한 전황 등이 가장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필사본『징비록』은 조수익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하고 있을 때 필자 손자의 요청으로 인조 25년(1647)에 16권 7책으로 간행하였다. 또한 이것은 숙종 21년(1695) 일본 경도 야마토야에서도 간행되었으며, 1712년에는 조정에서『징비록』의 일본유출을 금할 정도로 귀중한 사료로 평가 받았다.
이 책은 임진왜란 전후의 상황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난중일기』와 함께 높이 평가되고 있다. 전문설명 고저지(古楮紙)에 기록된 초본(草本)에 남색(藍色) 천으로 표지를 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영의정(領議政)으로서 도체찰사(都體察使)를 겸하고 임진지휘(臨陣指揮)하였던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1542∼1607)이 난후(亂後)에 귀향(歸鄕) 정리한 저술 중의 하나이다.
그 내용은 난전(亂前)의 교린사정(交隣事情)과 선조(宣祖) 25년(1592)에 발발하여 동왕(同王) 31년(1598)에 평정되었던 전황(戰況)의 골자를 수기(手記)한 것이다.
우리는 이 기록을 통해 난전(亂前)의 일본(日本)과의 교린관계(交隣關係)를 비롯하여, 임전(臨戰)에 있어서의 국민적 항쟁(抗爭), 명(明)의 구원(救援) 및 제해권(制海權)의 장악에 대한 저간(這間)의 전황(戰況)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저자는 우리나라와 겨레에게 이러한 비참한 전화(戰禍)가 또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아니되겠다는 참회와 염원에서 그 수난상(受難相)을 수기(手記)하고, 『징비록(懲毖錄)』으로 제명(題名)한 것이다.
임진왜란사(壬辰倭亂史)를 연구함에 있어서는 가장 대표적인 기본 사료(史料)가 된다.
징비록 징비록 징비록 징비록 징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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