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와 관련된 글이 새겨져 있는 불상으로, 옛 신라 지역인 경상남도 의령지방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광배(光背) 뒷면에 남아있는 글에 따르면 평양 동사(東寺)의 승려들이 천불(千佛)을 만들어 세상에 널리 퍼뜨리고자 만들었던 불상 가운데 29번째 것으로, 전체 높이는 16.2㎝이다.
머리는 삼국시대 불상으로는 유례가 드물게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큼직한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있다. 얼굴은 비교적 작은데, 살이 빠져 길쭉한 가운데 미소를 풍기고 있다.
오른손은 앞으로 들어 손바닥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으며, 왼손은 허리 부분에서 손바닥이 정면을 향하게 하여 아래로 내리고 있다. 왼손의 세번째와 네 번째 손가락을 구부리고 있는 모습은 삼국시대 불상에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모습이다. 유난히 두꺼운 옷에 싸인 신체는 굴곡의 표현이 없지만, 전체적인 체구와 약간 보이는 어깨의 골격 등에서 강인한 힘을 느끼게 한다. 새의 날개깃 모양의 옷자락은 좌우로 힘차게 뻗쳐 있는데, 날카롭고 힘있는 모습이 중국 북위 이래의 양식을 보여준다. 불상과 함께 붙여서 만든 광배는 앞면에 거칠게 소용돌이치는 듯한 불꽃무늬가 선으로 새겨져 있다.
광배의 일부분이 손상되었으나 도금까지도 완전히 남아 있는 희귀한 불상으로, 광배 뒷면에 남아있는 글과 강렬한 느낌을 주는 표현 방법 등으로 볼 때 6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고구려 불상으로 보인다.
전문설명 이 불상은 1963년 7월 경남(慶南) 의녕군(宜寧郡) 대의면(大義面) 하촌리(下村里) 산(山) 40번지에 사는 강갑순(姜甲順)씨가 발견한 것이다. 출토지가 확실하고, 더욱이 고구려(高句麗)에 속하는 명기(銘記) 있는 불상이 남한(南韓)에서 출토되었다는 점에서도 주목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광배(光背)에 일부 손상을 입었으나, 각명(刻明)한 수법이나 찬연한 금빛 및 조상명기(造像銘記)기 있는 점 등에서 고구려(高句麗) 불상의 대표가 되기에 충분하다. 상(像)은 불신(佛身)·좌대(座臺)·광배(光背)를 같이 주성(鑄成)하였는데, 좌대는 바닥이 밖으로 넓어진 원통(圓筒) 위에 특색있는 연판(蓮瓣)을 두었고, 그 위에 원추형을 거꾸로 놓은 작은 족좌(足座)가 있어서 불신(佛身)을 받치고 있다.
머리 위에는 큼직한 육계(肉계)가 있고, 보발(寶髮)은 나형(螺形)인데, 삼국불(三國佛)로서는 드문 유례(遺例)이다. 얼굴은 비교적 작은 편인데, 살이 빠져 길쭉한 가운데에 미소를 풍기고 있다. 두 귀는 타원(楕圓)의 판형(板形)이고, 바튼 목에는 삼도(三道)가 보이지 않는다. 오른손은 앞으로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은 팔을 수평으로 올려 아래로 손바닥을 보이는데, 새끼손가락 둘을 꼬부리고 있어 삼국기(三國期) 불상의 통식(通式)을 따르고 있다. 통견(通肩)의 법의(法衣)는 매우 두꺼워서 지체(肢體)는 거의 표현되지 않고 앞면에서 V자형이 되풀이되어 있다. 옷자락은 지느러미형으로 좌우로 활짝 벌어졌는데, 각법(刻法)이 날카롭고 힘차서, 북위(北魏) 이래의 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불신에 붙여서 같이 주조(鑄造)된 광배는 주형(舟形)인데, 윗부분이 안으로 굽고 아래쪽은 차츰 좁아져서 발목에 이르고 있다. 표면에는 따로 두광(頭光)·신광(身光)을 표현하지 않고 몇 줄의 각선(刻線)으로 화염형(火焰形)을 음각하였는데, 뒷면에는 4행 47자의 명문(銘文)이 음각되어 있다.
발견 당시의 평가에서 일부 혼란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후 원상(原狀)조사에 힘을 썼으며, 광배 윗부분의 잘려진 흠집을 제외하고는 도금(鍍金)마저 완전히 남아 있는 희귀한 불상이고 조상(造像)양식에서 보여 주는 세련된 기법 또한 뛰어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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