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청자의 전성기때 만들어진 청자대접으로 높이 6.05㎝, 입지름 16.8㎝, 밑지름 4.4㎝이다.
고려 의종 13년(1159)에 죽은 문공유의 묘지(墓誌;죽은 사람에 대한 기록을 적은 글)와 함께 경기도 개풍군에서 출토된 것인데, 연대를 알 수 있는 상감청자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굽부분이 좁고 아가리가 위로 벌어진 형태인데, 굽에서 아가리에 이르는 선은 완만한 선을 이루고 있다. 대접의 안쪽 가운데에는 원을 그리고, 그 안에 큰 꽃무늬를 새겼는데, 바탕을 백토(白土)로 상감하는 역상감기법을 쓰고 있다. 아가리 주위를 제외한 그릇 안쪽은 온통 덩굴무늬로 자유롭게 메우고 있다. 대접의 바깥쪽은 안쪽의 아가리 부분과 똑같은 문양으로 장식하였으며 중심부 5곳에 국화 한송이씩을 두고 있는데 꽃은 흰색으로, 잎은 검은색으로 상감하였다. 안쪽면이 모두 백상감된 단색인데 비해 바깥면의 호화스러운 국화꽃무늬가 잘 조화되어 전성기 청자 상감에서도 드물게 보이는 장식효과를 나타내는 작품이다.
회청색 계열의 비취빛 유약이 매우 맑고 고르게 씌어져 있어서 표면의 색조가 은은하고 상감효과도 한층 돋보인다. 이 대접은 12세기 중엽 고려청자의 상감기법이 발달하는 과정과 수준을 잘 보여주는 귀중한 작품으로서 고려청자 상감사를 연구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자료이다. 전문설명
이 대접은 고려(高麗) 의종(毅宗) 13년(1159)경에 죽은 문공유(文公裕)라는 사람의 묘지(墓誌)와 함께 경기도(京畿道) 개풍군(開豊郡)에서 출토된 것인데, 연대를 짐작할 수 있는 상감청자(象嵌靑磁)의 가장 오랜 유물이다.
안쪽에는 그릇 바닥 한가운데에 큰 단판(單瓣) 국화를 상감하고, 그 둘레를 유려(流麗)한 백상감보상화문대(白象嵌寶相華文帶)로 마감해 놓았다. 이 안쪽 상감이 모두 백상감 단색으로 된 데에 비하여 바깥면에서는 입 가장자리에 백상감 초문대(草文帶)가 있을 뿐이고, 그 아래는 5군데에 일지국(一枝菊)을 흑백으로 상감해 놓고 있어서, 안팎면이 변화 있는 조화를 이루고 있다.
청아(淸雅)한 회청색 계통의 비색유(翡色釉)가 매우 고르고 맑게 씌워져 있어서 유택(釉澤)은 은은하고 상감효과도 한층 더 돋보인다. 굽 밑에는 3개의 규석(硅石) 눈자국이 남아 있으며, 유조(釉調)로 보나 상감기법으로 보나 이 정도로 틀이 잡히려면 이미 상당한 기간 기술의 모색과 세련이 쌓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이 대접은 12세기 중엽의 고려청자 상감 발달의 실태와 수준을 잘 전해 주는 매우 귀중한 유례(遺例)로서, 고려청자 상감의 편년(編年)에 없어서는 안 될 자료이다.
유약(釉藥)과 태토(胎土)가 극도로 정선되었던 순청자(純靑磁) 전성기의 유작(遺作)에 비하면 식은테도 있고 태토(胎土)도 두꺼워졌지만, 유택(釉澤)이나 유색(釉色)의 맑은 맛은 이 무렵에 한층 더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더하게 되었음을 이 그릇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유조(釉調)에 백상감 일색의 호사스러운 보상당초문(寶相唐草文)이 잘 조화되어, 전성기 청자상감에서도 드물게 보이는 의장효과(意匠效果)를 나타내는 작품이다.
청자 상감당초문 완 청자 상감당초문 완 청자 상감당초문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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