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묘지

2. 남이장군 묘

오늘의 쉼터 2008. 1. 12. 14:50
 

남이장군 묘(경기도 기념물 13호)                                 written by 나홀로 테마 여행

2007년 5월 말, 나홀로의 제10차경기 수원, 화성, 광명 권역, 능원묘 답사 일정에 남이장군 묘를 포함시켜 놓고는

광나루도 처음으로 가 보았습니다. 묘지 답사시 수도권에서 먼 권역은 대중교통으로는 찾아가기가 어렵고 그나마

승용차를 이용 하더라도 네비게이션의 도움없이는 답사지 근처에 접근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 남이장군 묘역 입구 전경

 ▲ 남이장군 묘역으로 오르는 산길

남이장군 묘역 근처에 오면 안내판은 있습니다. 좁은 시골길을 따라서 마을 어귀의 약간 언덕길을 지나면 마을이

보이고 좌측에 안내판이 있습니다. 안내판을 따라서 5분여를 올라가면 남이장군 묘역이 보입니다.

묘역 주변은 축대로 둘려 있으며, 묘역으로 오르면 좌우로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각각 한 쌍씩서 있으며, 상석 우측

으로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묘비가 서 있습니다. 봉분은 쌍분이며, 봉분에 둘레석도 근래에 둘러 놓은 것 같으며,

문인석만 당시의 석물인 것으로 추측됩니다.

조선 초기의 무신인 충무공 남이(1441∼1468) 장군의 묘소이다. 세조 3년(1457)에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세조 13년(1467)에는 이시애의 난을 토벌하여 적개공신 1등에 봉해진

후, 여진을 토벌하여 이등군공에 올랐으며 26세의 나이에 병조판서에 올랐다.

 

그러나 1468년에 예종이 즉위하자 유자광의 모함으로 역모를 꾀한다하여 28세 때 처형당하였다. 그 뒤 순조 18년

(1818)에 복직되었으며, 서울 용산의 용문사 및 충민사에 배향되었다. 현재 묘역에는 장군과 부인이 합장되어 있

고 봉분은 2기이며, 봉분 아랫부분은 둘레석이 둘러져 있다. 묘 앞에는 묘비가 세워져 있고, 좌우에는 문인석과

망주석이 1쌍씩 있다.

 

 

 

南怡 : 1441 ~ 1468
시호는 충무.

남이는 1441년(세종23)에 남휘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태종의 넷째 딸인 정선공주이다.

17세 때인 1457년(세조3)에 무과에 장원 급제한 남이는 세조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벼슬에 올랐다.

그리고 세조의 신임이 두터운 권람의 딸과 혼인을 하였다.

1467년 남이는 세조의 명을 받아 포천, 영평 등지의 도적을 토벌했다.

같은 해에 세조가 왕권을 강화하여 지방에 관리를 파견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이시애가 함경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우대장이 된 남이는 싸움터로 나아가 반란군을 물리쳤다.

그리고 그 공을 인정받아 적개공신 1등에 오르고 의산군에 봉해졌다.

이어서 서북쪽 국경 부근에 있는 여진족의 본거지를 정벌할 때에도 선봉으로 적진에 쳐들어가 적의 기세를 꺽었다.

이때 남자의 기개를 드높이 세우겠다는 결의를 담아 읊은 남이의 시는 유명하다.

백두산 높은 봉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두만강 깊은 물은 말을 먹여 다 없애리라
남아 이십 세에 나라를 평정 못하면 누가 대장부라 일컬으리.

남이의 용맹을 높이 평가한 세조는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국방을 책임지는 병조 판서라는 중책을 맡겼다.

한계희를 비롯한 일부 신하들이 외척에게 병권을 맡기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세조는 이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러나 남이를 총애하던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자,

형조 판서 강희맹과 한계희 등이 남이에게 병권을 맡기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하여 남이는 병조 판서에서 해직되었다.

이 무렵 남이는 궁궐에서 숙직을 서다가 혜성이 나타난 것을 보고 무심결에 '옛것은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나타날 징조'라고

말했는데, 평소에 남이를 시기하던 유자광이 이 말을 엿듣고는 남이가 역적 모의를 꾸민다고 모함하였다. 더구나 남이의 유명한

시조 가운데 '나라를 평정 못하면'이라는 말을 '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 바꾸어 남이를 대역 죄인으로 몰았다.

이 일로 남이는 28세의 젊은 나이로 억울하게 처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 뒤 400여 년이 지난 1818년(순조18)에 남이는 억울한 누명을 벗고, 벼슬과 '충무'라는 시호를 받았다.
출처 : 네이버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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