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묘지

1. 김유신장군 묘

오늘의 쉼터 2008. 1. 12. 14:48

 

 

  김유신장군묘역 (사적 제21호)    

                                                           

광나루의 신라 왕릉 여행에서는 왕릉뿐만 아니라 신라 고분이나 묘지가 왕릉 정도로 조성된

왕에 버금가는 인물에 대한 묘도 함께 소개합니다.

 ▲ 묘역 입구 우측의 비각 전경

 ▲ 비의 이수 부분 모습

 ▲ 흥무문(興武門)

괘릉에서 대기하던 택시를 다시 타고 김유신장군 묘로 가는데, 상당히 멀더군요. 요금도 4만원인가 나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무더운 날씨에 이틀을 꼬박 걸어 다니기만 하다보니 너무 덥고, 힘들어서 어쩔 수 없이 큰 맘먹고 택시를 탔었는데, 앞으로도 답사를 계속 다니겠지만 택시타는 일은 아마도 유일무이 할 겁니다.

 

김유신장군 묘역 입구 우측에는 비각이 있으며, 비각 안에는 비가 한 기 서 있는데, 언제 세운 비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묘역 입구는 흥무문이 세워져 있으면, 흥무문으로 들어서서 조금 올라가면 아래 사진과 같이 김유신 장군의 묘가 보입니다.

▲ 김유신 장군 묘역 전경

계단을 오르면 봉분이 있는 김유신 강군의 묘역입니다만, 묘역 주변에 잔디는 없고, 굵은 모래같은 사질의 흙이 누렇게 보여서 개인적으로는 벌거벗은 묘역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봉분 앞의 좌우에는 비석이 한 기씩 서 있는데, 좌측 비는(아래 사진 좌) 1710년 경주 부윤이 세웠다는 비에는 '新羅太大角干 金庾信墓(신라태대각간 김유신묘)'라 새겨져 있으며, 우측의 비(아래 사진 우)는 '開國公純忠壯烈興武王陵(개국공순충장열흥무왕릉)'이라 새겨져 있습니다. 우측 비는 100년 이내로 세운 비 같으며, 김유신장군 묘를 흥무왕릉으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 묘역 좌우로 서 있는 2기의 비석

김유신장군 묘를 보면 바로 앞에서 소개한 괘릉의 봉분과 둘레석 그리고 난간석과 거의 똑 같아 보입니다. 12지신상 역시, 괘릉의 12지신상과 비슷합니다. 다만, 12지신상의 의상이 다르고,

괘릉 조각보다는 돋움이얕으나 조각술은 더 세련되었으며, 보존이 잘되어 있어서 12지신상 조각들이 선명하게 잘 보입니다.

 

▲ 김유신 장군 묘의 좌우 전경

경주 송화산 동쪽 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 장군 김유신의 무덤이다. 김유신(595∼673)은

삼국통일에 중심 역할을 한 사람으로, 김춘추(후에 태종무열왕)와 혈연관계를 맺으며 정치적 발판을 마련하였고, 여러전투와 내란에서 큰 공을 세웠다. 660년에 귀족회의의 우두머리인 상대등이 되어 백제를 멸망시켰으며, 668년에는 신라군의 총사령관인 대총관(大摠管)이 되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아 신라 삼국통일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무덤은 지름이 30m에 달하는 커다란 규모이며, 봉분은 둥근 모양이다. 봉분 아래에는 둘레돌을 배치하고 그 주위에는 돌난간을 둘렀는데, 둘레돌은 조각이 없는 것과 12지신상을 조각한 것을 교대로 배치하였다. 12지신상은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몸은 사람의 형체이고 머리는 동물 모양이다. 조각의 깊이는 얕지만 대단히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 뒤편에서 바라 본 김유신장군 묘

1973년 5월 봉분에서 북북서쪽 16m 거리 땅속에서 납석으로 만든 해상(亥像) 하나가 발견되었다. 이 해상(亥像)은 갑옷을 입고 오른손에 칼을 들고 천의 자락을 나부끼며 몸을 약간 뒤로 젖힌 위엄 있고 당당한 모습이었는데, 크기는 높이 40.8㎝·너비 21㎝·두께 12.5㎝였다.

이 납석상의 발견으로 인하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1974년 김유신묘 주위의 발굴조사와 석조물

복원을 위한 실측조사 작업이 실시되었다. 그때 정동(正東)의 땅속에서 묘상(卯像)의 파편이 발견되었다. 다른 방위에도 납석제가 묻혀 있었던 것이나 표토가 이미 유실되어 납석제 12지신상이 남아 있지 않았다. 서쪽 묘역에서는 산신제를 지내는 제단 같은 장방형 판석도 묻혀 있었으며 혼유석이 있었던 자리도 찾아내어 혼유석을 복원하였으며 없어져버린 난간석도 복원하였다.

김유신장군 묘의 둘레석에 새겨진 12지신상 모습

12지신상을 묘의 호석에 조각한 것은 통일신라 묘제의 고유한 양식이다. 중국에는 묘실내에 12지신상을 만들어넣은 것은 있어도 봉분 주위에 조각한 것은 통일신라만의 독특한 창의물이다.

묘의 봉분 주위에다 12지신상을 조각하여 배치한 것은 성덕왕(702∼737)릉부터로 보고 있다.

 성덕왕릉 12지신상은 완전 입체상으로 독립되게 만들어져 봉분 주위에 방위에 따라 서 있다.

12지 조각상 때문에 김유신묘의 학술논쟁도 있었다.

《삼국유사》에 보면 흥덕왕 때 "김유신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하였는데 그 릉은 서산

모지사(毛只寺) 동향(東向)한 산봉에 있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지금의 김유신묘의 12지신상은 흥덕왕대 흥무왕으로 추존된 후에 왕릉의 예로 묘를 조성하면서 12지신상을 조각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사기》에 보면 673년 7월 1일 79세로 김유신이 죽자 문무왕은 채색 비단 1천필과 2천석의 조(租)를 내리고 군악대(북과 나팔수) 100명을 보내 금산원(金山原)에 예장(禮葬)하고 유사(有司)로 하여금 비(碑)를 세워 그의 공적을 기리고 민호(民戶)를 배정하여 묘를 수호하게 하였다.

그러나 현재의 묘역에 이 비는 없고, 1710년 경주부윤이 세운 '신라태대각간 김유신묘(新羅太大角干 金庾信墓)'의 비가 서 있다.

▲ 숭무전(崇武殿) 전경

묘역 입구 주차장 우측편으로 돌아 내려가면 숭무전이 있으니 묘를 먼저 둘러 보고 숭무전을 가셔도 되고, 숭무전을 먼저 보고 묘역으로 가셔도 됩니다. 아래의 묘역 안내도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김유신 장군은 김해김씨 시조이신 가락국의 초대왕, 김수로의 12세 손으로 태종무열대왕 과 문무대왕, 흥무대왕으로 추봉된 분이다. 장군은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남북통일의 표징으로 삼고자 신라 천년고도 경주(慶州)에서 통일전을 만들어 세 분의 영정을 모셨습니다.

김유신장군 묘역 안내도

 

김유신장군 묘역 주변에도 석실이...

▲ 공개 석실고분 전경

김유신장군 묘역을 돌아 나오면서 주변에 문화재 안내판이 있어서 언덕을 올라가 보니 석실이 있었습니다. 이 석실은 공개 석실고분이라고 하는데, 통일 신라시대의 돌방무덤으로 도굴되었던 것을 1974년 수습 발굴함으로써 내부 구조가 밝혀지고, 발굴조사 당시에 말뼈 32점만 출토되었을 뿐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있는 유물은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김유신장군 묘 위치도

 

 김유신장군 묘는 화살표 방향 맨 위에 ↑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충효동 산7-10

출처 : 나홀로테마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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