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죽헌 이완장군 약사(梅竹軒 李浣將軍 略史) - 매죽헌의 자(字)는 징지(澄之)이고, 그의 호(號)가 매죽헌(梅竹軒)이다. 1685(숙종11)년에 정익(貞翼)이란 시호(諡號)를 받았고, 병조판서 수일(守一)의 아들로 지금의 서울 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222 번지에서 살았다.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1624(인조2)년 무과(武科)에 급제한뒤 이서(李曙)의 추천으로 만포첨사(滿浦僉使)가 되었으며 1627년에는 영유현령(永柔縣令)을 거쳐, 1629(인조7)년 상원군수(祥原郡守)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숙천부사(肅川府使)를 지냈으며, 1631년에는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 兵馬節度使)에 승진되었다. 1636(인조 14)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도원사 김자점(都元師 金自點)휘하의 별장(別將)으로 출전하여 정방산성(正方山城)을 지키다가 적을 동선령(洞仙嶺)으로 유인, 대파하는 공을 세웠다.
1638년에는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로 나갔으며, 이해 7월에 최명길(崔鳴吉)의 추천으로 내직(內職)인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으며, 1640년에는 황해병사(黃海兵使)로 나갔다. 그뒤 청의 지탄을 받아 한때 벼슬에 나가지 못하였다. 1643(인조 21)년에 양주목사(楊州牧使)로 부임하였다가5월에 경기도 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제사에 제수되어 수도 외곽을 방어 하였다.
그뒤 충청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내상(內喪)을 당하여 칩거 하였다. 인조(仁祖)말년에 어영대장(御營大將)으로 부임 하였다. 1650년(효종 1)에 우포도대장(右捕盜大將)을 거쳐 한성부 우윤(漢城府 右尹)이 되었다. 이때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종이 금사(禁史)를 구타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여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았으나 효종은 그해 어영대장에 임명하고 12월에 김자점(金自點)의 모반사건을 해결키 위해 포도대장을 겸직하게 하였다.
어영대장으로 있으면서 군영(軍營)의 체모를 갖추고 안산 덕물도(安山 德勿島)를 개간하여 둔전(屯田)을 마련하고, 강화도 방비에 진력 하였다. 1653년(효종 4)에 훈련대장(訓鍊大將)에 임명되어 신무기 제조, 성곽의 개수, 신축 등, 전쟁 준비를 서둘렀다. 1655년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이어 공조판서가 되었다가 곧 형조판서에 제수되었으며 이듬해 다시 훈련대장에 재임되었으나 1659년 효종의 별세로 북벌 계획이 중지되었다.
1666년(현종 7)에 판의금(判義禁)에 제수되고, 그해 12월에 다시 병조판서에 임명 되었으나 신병과 또 병조(兵曺)와 훈련도감(訓鍊都監)을 겸할수 없다고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667년에 훈련도감의 폐지론이 대두 되었으나 그의 반대로 폐지되지 않았다.
이해에 왕(王)이 온양에 가고,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도성(都城)을 지켰으나 성기(省記)문제로 병조(兵曺)와 다투어 파직 되었다. 다시 포도대장이 되고 그 뒤에 판윤, 형조판서, 병조판서 등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모두 사양 하였다.
1671년(현종 12)에 수어사(守禦使)제수 되었으며 1674년에는 우의정에 제수되었으나 국역 변동에 대한 유소(遺疏)를 남기고 세상을 떴다. 그의 작품으로 시조(時調) 2수가 전한다.
끝
사진은(사)정통풍수지리학회에서 퍼온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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