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전북기념물

전라북도 기념물 (제158호) 완주 남계리유적

오늘의 쉼터 2023. 5. 1. 23:53

 

종    목
전라북도 기념물 (제158호)
명    칭
완주 남계리유적 (完州 南溪里遺蹟)
분    류
유적건조물 / 무덤 / 무덤 / 봉토묘
수량/면적
610㎡,(묘 3기 포함)
지 정 일
2023.01.20
소 재 지
전라북도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169-65번지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전주교구천주교회유지재단
관 리 자
전주교구천주교회유지재단

문화재설명
- 2021년 천주교 전주교구 주관으로 무연고 무덤을 이장하던 중 3기에서 유물 및 유해가 확인된 곳으로 .
조사결과 피장자는 1791년 신해박해 때 순교한 윤지충과 권상연과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유지헌(윤지충의 동생)이다.
출토유물은 윤지충 묘에서 백자사발지석 1점. 권상연 묘에서 백자사발지석 1점. 윤지헌 묘에서 백자접씨 2점이 확인 되었으며. 백자사발 묵서명을 통해 윤지충과 권상연의 무덤 임이 확인되었으며 DNA분석 통해 각각 해남윤씨. 안동권씨 친족들과 일치하는 것을 확인하였다.
조선왕조 증조실록 33권(1791년)에 윤지충과 권상연을 사형에 처하고. 순조실록 3권(1801년)에 형을 집행한 기록이 실여있다.
윤지충 묘 출토 백자재기에는 묵서로 < 성균생원 윤공지묘 속명 시충 성명 보록자우당 기묘생 건융오십칠년 임자 시월십이일. 권공묘재좌 권상연묘 출토 백자재기에는 묵서로 권공학생지묘 휘 상연 자 경삼 신미생 본안동. 건륭오십칠년 임자시월십이일. 윤공묘 재좌>라 쓰여있다.
신해박해와 신유박해는 조선후기 전통적 유교사상과 당시 서학으로 시작된 천주교사상이 충돌하는 시대적 상황으로 남계리 유적에서 확인된 윤지충 권상연 윤지헌은 조선후기 사회상을 반영하는 역사적 인물로서 학술적 천주교사적 가치가있다.
※ 윤지헌은 본관이 해남(海南)이다. 공재 윤두서(尹斗緖)의 증손자로 1764년(영조 40) 전라도 진산[현재 충남 금산군과 논산시 지역]에서 아버지 윤경(尹憬)과 어머니 안동권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791년의 신해박해 때 순교한 윤지충(尹持忠)의 동생이다. 1789년(정조 13)에 형 윤지충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그러나 1791년 윤지충이 돌아가신 어머니의 신주(神主)를 모시지 않고 천주교식으로 장례(葬禮)를 치렀다는 ‘진산사건(珍山事件)[辛亥迫害]’으로 순교하자 더 이상 고향에서 살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윤지헌는 가족을 데리고 진산을 떠나 전라도 고산의 운동[현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으로 이주해 순교할 때까지 살았다. 이주 후에 윤지헌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천주교에 입교시켰다. 1795년(정조 19)에는 고산을 방문한 주문모 신부에게 성사를 받았으며, ‘대박청래(大舶請來)사건’에 참여했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유항검을 비롯한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감영의 감옥에 갇혔다. 그리고 ‘대박청래사건’이 드러나면서 동료들과 함께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포도청과 형조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의금부에서 마지막 문초를 받은 뒤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했으며, 다시 전주로 이송되어 1801년 10월 24일[음력 9월 17일]에 능지처참(陵遲處斬) 형을 받고 순교했다. 당시 윤지헌의 나이는 37세였다. 윤지헌이 순교한 뒤 고산에 갇혀 있던 아내와 가족은 모두 먼 곳으로 유배되었다.

 

완주 남계리유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