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서울유형문화재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33호) 척화비

오늘의 쉼터 2023. 4. 20. 00:21

 

 
종 목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33호)
명 칭
척화비 (斥和碑)
분 류
기록유산 / 금석각류 / 비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2022.10.13
소 재 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시 대
19세기
소 유 자
한국순교복자수녀회
관 리 자
한국순교복자수녀회
문화재설명
척화비(斥和碑)는 1866년 병인양요(프랑스가 조선 침략)가 일어나자 대원군이 “서양 오랑캐가 침입해 오는데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일이며, 그들과 교역하면 나라가 망한다.”라는 내용의 글을 전국에 반포하여 통상수교 거부정책으로 삼았다. 1871년 미국이 침략한 신미양요가 일어나자, 미군이 퇴각한 4월 25일 대원군은 서울 종로 네거리, 경기도 강화, 경상도 동래군·함양군·경주·부산진 등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우도록 하였고, 6월 24일 교서가 반포되어 척화비가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1873(고종 10년) 최익현의 상소로 대원군이 물러나면서 척화비 건립이 중단되었다.
종로 네거리에 척화비를 세운 것은 1871년 7월 2일 이전으로, 비문의 내용은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서양 오랑캐들이 침범하니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라는 내용을 큰 글씨로 새겼다. 그 왼쪽에 본문보다 한 자를 낮추어 그보다 작은 글씨로 “戒我萬年子孫, 우리 만대 자손에게 경계한다.”라는 내용의 취지를 붙였고, 그 왼쪽에 다시 한 자를 낮추어 “丙寅作辛未立, 병인년에 만들고 신미년에 세웠다.”라고 비석의 제작 연도와 제작 시기를 표기하였다.
건립 시기를 병인년에 만들거나 짓고, 신미년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은 아마도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상기하고자 한 의도가 보인다. 지역이 다르고, 각 지역에서 세운 비석의 건립연도가 같다는 것은 조정에서 내려보낸 교서에 따랐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유로 종로에 세운 척화비를 탁본하여 지방으로 내려보냈다고 하기도 한다.
내용은 1882년(고종 19년) “이미 서양과 수호를 맺은 만큼 경외(京外)에 세운 척양(斥洋) 비석들은 상황이 달라졌으니 모두 뽑아버리도록 하라. 너희 사민들은 각기 이런 뜻을 잘 양지하라.”라고 전교하고 의정부가 게시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전국의 척화비가 뽑혀 묻히거나 파괴되었다.
한국순교복자수녀회에서 소장하고 있는 척화비는 횡성읍 횡성성당 앞 개울에서 발견하여 옮겨온 것으로, 원래는 이 수녀회 정문 오른쪽 화단에 있었으나 이번 문화재 지정 신청을 계기로 자연 훼손을 방지하고자 실내 전시관 앞으로 옮긴 상태이다. 비의 형태는 비수(碑首)와 일체로 된 비신(碑身)을 받침대인 비좌(碑座)에 삽입한 형태로 비신의 크기는 높이 110cm, 가로 50cm, 두께 22cm이다. 비수는 관석탑비형(冠石塔碑形)으로 크기는 높이 42cm, 가로(너비) 59cm, 두께 30cm이며, 구름 문양을 새겼다. 비좌는 사각형으로 높이 33cm, 가로(너비) 88cm, 두께 56cm이다. 비좌에는 위쪽에서 아랫면 방향으로 구름 문양을 새겼고, 정면과 측면에는 가운데에 안상처럼 음각 테두리를 두르고 그 안에 다시 구름 문양을 새겼다. 비문의 크기는 가로 38cm, 세로 102cm이다.

 

척화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