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신라

황복사지(皇福寺址) 삼층석탑

오늘의 쉼터 2018. 5. 30. 01:24

 

황복사지(皇福寺址) 삼층석탑

 

 

경주 낭산(狼山)의 동북쪽에 위치해 있는 이 사지에는 현재 신라시대 전형석탑중 전기에 해당하는 삼층석탑 1기와 귀부 및 일부 석조물들이 산재해 있다. (국보37호)

 

원래는 이름을 알지 못하였으나 1937년 이 부근에서 황복사(皇福寺)명 기와가 발견되어 사찰명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황복사(皇福寺)의 창건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三國遺事 “의상전교(義湘傳敎)”조(條)의 기록으로 볼 때 653년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義湘이 29세(眞德女王 7년, 653년)에 황복사(皇福寺)에서 머리를 깎은 후 출가하였다는 기록을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같은 문헌 “전후소장사리(前後所藏舍利)”조(條)의 내용과 다른 점이 있어 앞으로 연구되어야 할 문제중의 하나이다.

 

“전후소장사리”조에는 의상의 출가를 선덕여왕(善德女王) 13년(645)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해는 의상의 나이가 20세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황복사(皇福寺)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신라 화엄종의 교조인 의상이 머리를 깎고 불가에 입문한 곳이기도 하지만 그가 당나라에서 돌아온 후 이곳에 주석하면서 신라의 10대 대덕 중의 한 사람인 표훈(表訓)과 고승인 진정(眞定)에게 “華嚴一乘法界圖”를 가르친 곳이기도 하다.

 

또 다른 기록에는 표훈이 이곳에 주석할 당시 불국사와 석불사를 창건한 김대성 [당시의 중시(中侍) 김대정(金大正)으로 밝혀짐]에게 삼정본(三本定)을 일깨워 주었다고 한다.

                                                                                         (균여(均如), {十句章圓通記})

 

현재 황복사지(皇福寺址)에는 삼층석탑 1기와 귀부 2기, 당간지주가 남아 있으며 발견된 비편 일부는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삼층석탑을 제외한 나머지들은 주변에 흩어져 있거나 묻혀 있는 상황이며 사찰의 가람배치나 전면적인 모습들은 현재까지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물론, 1928년에 조선총독부에서의 부분적 발굴과 1968년 삼산오악학술조사단(三山五嶽學術調査團)의 조사가 있었지만 사찰의 전체적인 모습을 밝힐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삼층석탑은 높이 약 7.3m로 신라시대 전형석탑 으로서 전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중기단에 삼층의 탑신을 지니고 있으며 탑신은 하나의 돌로 제작되었다.

 

이 탑의 시원적인 모델이 된 감은사지의 석탑과 비교해 볼 때, 탑신이 한돌로 제작된 모습과 규모의 축소화, 비례의 안정화 등에서 간략화되고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탑은 1943년 해체수리 당시 2층 옥개석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특히 99기의 소탑이 새겨진 이 사리함의 외면에는 이 석탑의 건립연대와 이유를 알게 해 주는 중요한 명문이 발견되었다.

 

그 명문에 따르면 효소왕(孝昭王) 원년(692년)에서 성덕왕(聖德王) 5년(706년) 사이에 이 탑이 세워졌고 신문왕(神文王)과 김씨왕족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다수의 출토유물이 있는데 순금여래입상과 좌상, 다수의 유리구슬, 은과 동으로 만든 고배 등이 있었다.

 

이 석탑은 적어도 창건 50년 후에 효소왕의 발원으로 세워진 것이기 때문에 황복사 창건당시에 세워졌던 탑으로 보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창건 당시에는 다른 탑이 존재하였다는 것인데 그러한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 자료가 있어 소개한다.

 

{三國遺事} [義湘傳敎]조(條)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의상대사가 황복사(皇福寺)에 있을 때 여러 스님들과 탑을 돌 때면 언제나 허공을 밟고

올라갔으며 층계를 밟지 않았으므로 그 탑에는 사닥다리가 없었다고 한다."

 

이 기록에 근거하면 의상법사가 황복사에 계실 때 이미 황복사에는 탑이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물론 의상대사의 출가에 대한 상이한 기록에서도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기록의 신빙성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겠으나 유물과의 연관관계 속에서 파악해 보면,

현재 황복사지(皇福寺址) 3층석탑은 의상대사가 황복사(皇福寺)에 계실 때 제작되었다고 보기에는 힘든 8세기 초반의 탑임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현재의 탑보다 선행하는 탑이 황복사(皇福寺)에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된다.

 

이 사지에는 높이 7.3m의 신라시대의 전형석탑 형태이며 기단은 2층이고 탑신부는 단일 석재로 조성시켰으며 소석재로써 탑신부를 짜 올린 종전의 양식과는 판이한 구조의 석탑이 있다.

 

일제시대 인 1943년에 이 탑을 해체수리 했는데 그 때 나온 사리함의 뚜껑 내부에 새겨져 있는 조탑명문으로 효소왕 원년(692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탑의 건립연대가 효소왕대라는 것은 이 절이 황복사라는 데에 의심을 갖게 하는 한 요인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의상대사가 29세 때인 진덕여왕 7년에 황복사에서 낙발했으니 그 때 이미 이 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절이 건립되고 50년이 넘도록 탑을 건립하지 않았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명문의 내용으로 보아 목탑이 있었던 것을 석탑으로 대치시켰다고 볼 수 있을 유적이 남아 있지 않은 것도 요인 중의 하나가 되고 있다.

 

황복사의 탑에 대해서는 의상대사가 기적을 나타낸 『삼국유사』의 義湘傳敎 기록에 남아 있다.

의상대사가 황복사에 있을 때 여러 스님들과 탑을 돌 때면 언제나 허공을 밟고 올라갔으며 층계를 밟지 않았으므로 그 탑에는 사닥다리가 없었다고 한다.

 

함께 따르던 스님들도 층계에서 三尺이나 떠서 허공을 밟고 돌았으므로 대사는 그들을 돌아보면서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보면 반드시 괴이하다고 할 것이나 세상의 교훈이 될 것은 못된다."고 했다.

당시 의상의 나이가 몇 살인지 알 수는 없으나 의상대사의 입적은 성덕왕 원년(702년)이며 그 때의 나이는 78세였다.

 

탑에서 나온 유물은 순금 여래입상과 좌상, 많은 수의 유리구슬, 은과 동의 고배 등이었다. 그러나 가장 주목받은 것은 조탑 명문이었다.

밝혀진 명문내용으로 이 탑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으나 출토유물과 명문기록상의 유물과의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즉, 제2층에 사리장치를 마련했다는 것과 불사리을 안치하였다는 것은 일치하나, 전금미타상육촌일구는 크기로 보아 출토된 2점의 조상과 입상 중 어느 것을 가리키는지 밝힐 수 없고 대다라니경 1권은 보이지 않는다.

 

대좌와 광배를 완전히 갖춘 全金銅如來立像(국보 제80호)은 반출된 좌상보다 古式을 띠고 있어 692년 탑 건립 때 안치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두 겹의 연꽃잎 臺 위에 바로 선 이 상은 머리는 소발에 육계가 큰 편이다.

 

또 다른 전금동여래좌상은 앞에 것보다는 좀 더 발달된 형태를 취하고 있어 706년에 안치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이 불상은 얼굴이 풍만하며 눈은 웃고 있다.

소발에 큰 육계가 있으며 목에는 삼도가 보이며 오른손은 들어서 바닥을 보이고 있고 왼손은 무릎 위에 얹고 있다.

 

특히 이 불상은 불신과 대좌, 광배가 분리되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사리장치와 불상 등, 이 탑에서 발견된 일괄유물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장인-사위 혈투 사연

 

신목왕후와 효소왕이 남편과 아버지 신문왕을 위해 세운 황복사탑은 폐비 김씨에 대한 슬픈 사연이 담겨 있어 이 사찰을 찾는 사람들을 숙연케 하고 있다.

 

신문왕 장인 김흠돌, 딸이 왕의 총애 잃자 모반, 대규모 반란 실패 사위 손에 죽고 딸도 내쫓겨 폐비, 뒤이은 신목왕후 황복사에 삼층석탑 건립....

 

황복사지는 경주 낭산 동북쪽 구황동(九凰洞)에 있다.

이 사찰에는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와 표훈스님이 머물렀던 것으로 알려져 한때는 번창했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화엄경의 개창자인 의상대사는 20세 때 이 사찰에서 출가했다. 경덕왕 때 재상 김대성도 이 사찰을 자주 찾았고 가끔 법회에도 참석한 것으로 되어 있다.

 

황복사지에는 삼층석탑이 있다.

이 석탑은 1942년 해체 복원될 때 사리함 속에서 명문이 발견됐다.

이 명문에는 692년 신문왕의 왕후인 신목왕후와 아들 효소왕이 신문왕을 위해 석탑을 건립했다는 기록이 있었다.

 

그런데 이 명문에서 언급되는 신목왕후가 신문왕의 정비가 된 이면에는 폐비김씨와 김씨의 부친 김흠돌의 슬픈 사연이 있다.

신문왕은 두 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첫 부인 폐비 김씨는 자식을 갖지 못했고

둘째 부인 신목황후에서 4명의 아들을 얻었다.

첫 부인이 폐비가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신문왕에게는 원래 형 소명태자가 있었다.

그는 문무왕이 임금이 되기 전 태어나 문무왕이 왕이 되자 곧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어린나이에 병을 얻어 죽어 두 번째 왕자가 태자로 책봉되어 문무왕을 이었는데,

그가 신문왕이다.

 

신라로 보면 문무왕 때는 통일을 위해 고구려와 싸워야 했고

또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도 당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기 위해 끝없는 전투를 벌여야 했다. 따라서 사실상 통일 신라의 황금기는 신문왕 때부터 시작되었다.

 

신문왕은 흠돌의 딸이 부인이 되었지만 총애하지 않았다.

 

따라서 흠돌은 태자 정명이 신문왕이 되었을 때 자신의 위치가 흔들릴 것을 걱정했고

이런 염려로 신문왕 대신 문무왕의 첩 야명 부인에서 태어난 인명을 왕으로 모시려고 했다.

 

당시만 해도 서출에 대한 차별이 없었던 시대였다.

 

흠돌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신문왕이 즉위한 지 겨우 한 달이 지나서였다.

흠돌은 김유신과는 가까운 집안이 되어 신라를 대표하는 귀족이었다.

 

기록에는 이 때 흠돌이 일으킨 반란의 규모가 상당히 컸다고 되어 있다.

신문왕은 이 사건으로 장인 흠돌을 죽이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흠돌의 딸 왕비 김씨마저 쫓아내었다.

 

김씨가 태자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흠돌의 힘이 컸다.

그러나 김씨는 아버지의 힘으로 태자비가 되었지만 신문왕의 사랑을 받지 못해 자식마저 갖지 못했던 불행한 여인이었다.

 

신문왕은 김씨가 태자비가 된 후에도 그를 좋아하지 않고 자신의 형인 소명태자의 비였던 흠운의 딸을 총애했다.

 

신문왕은 결국 김씨를 쫓아낸 후 한 때 형인 소명태자와 정혼을 한 적이 있는 흠운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이 여자가 신목왕후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임금인 사위가 장인을 죽이는 사건은 이후 500여년 뒤 조선 4대 세종 때 다시 일어났다.

 

우리에게 현군으로 알려진 세종의 장인 심온(沈溫)은 세종이 왕이 되었을 때 영의정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그의 아우 심정이 군국대사를 상왕인 태종이 처리한다는 불평을 했는데

이것이 옥사로 연결되어 심온이 수괴자로 몰려 사약을 받았다.

 

그런데 세종은 비록 장인을 죽였지만 부인 소현왕후는 폐출시키지 않았는데 반해

신문왕은 장인을 죽인 것은 물론이고 부임 김씨도 궁궐에서 쫓아내었다.

 

황복사지 탑은 ‘무구정경(無坵淨經)’이 최초로 봉안된 탑이다.

 

무구정경은

‘번뇌의 때가 없는 깨끗하고 빛나는 큰 주문에 대한 경’

이라는 뜻이다.

 

이 절터에 오면 눈여겨 보아야 할 귀중한 석물이 있는데, 그것은 12지신상이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황복사지에 12지신상이 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보지는 못했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 있는 12지신상은 땅속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12지신상은 1968년 황복사지를 발굴 할 때 금당터로 추정되는 곳에서 나왔다.

일반적으로 12지신상은 사찰이 아닌 능묘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에 절터에서 12지신상이 나온 것은 이례적이다.

 

12지신상은 그동안 탑 동쪽 밭에 묻혀 있었다.

탑에서 동쪽으로 계단식 밭이 있었는데, 이 중 3번째 밭 북쪽 끝에 밭 주위로 둥글게 묻혀 있었다.

12지신상 중 특히 말과 뱀이 새겨진 돌은 그동안 경주에 있는 모 대학교에서 연구를 한 후 남들이 보지 못하도록 슬레이트로 막아놓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놓았다.

이것은 아마 12지신상을 보호하기 위한 방책으로 보였다.

 

이 때문에 황복사지에 대한 사전 지식을 갖지 않고 이곳에 들리는 사람들은 12지신상을 보지 못하고 돌아서곤 했다.

 

그런데 얼마 전 황복사지로 가 보았더니 밭 터가 모두 논으로 변해 있었다.

 

옛날에는 비록 땅속에 묻혀 있어도 흙을 파면 12지신 상을 볼 수가 있었는데 이제는 논이 되다보니 사역 전체가 물바다가 되어 12지신상이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옛 기억을 살려 12지신상이 묻혀 있었던 자리를 찾았더니 지금은 논길이 되어 있었다.

따라서 요즘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아예 12지신상을 보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더욱이 12지신상이 묻혀 있는 곳은 논길 밑이 되어 사람들이 논길을 가면 12지신상을 밟게 되어 있어 귀중한 문화재가 훼손될 우려가 있었다.

 

밭을 논으로 만들려면 12지신상을 사전에 박물관으로 옮기든지

그렇지 않으면 보호를 위한 다른 방안을 세워야지

이처럼 논 속에 귀중한 문화재를 버려두는 것은 옳지 못하다.

 

황복사지에서 보면 보문들 너머로 딸에게 왕관을 물려준 진평왕의 능이 있다.

이 능을 보면서 딸을 태자비로 두었던 흠돌이 왜 사위를 쫓아내기 위해 반란을 일으켜

자신이 죽고 딸마저 폐비가 되어 궁궐에서 쫓겨나도록 했는지가 궁금해진다.

 

황복사지의 특징은 가람배치에 있다.

 

통일신라시대 사찰은 탑을 금당 앞 남북 축 선상에 세웠는데 이 사찰은 탑을 금당 서쪽 높은 위치에 두었다.

이것은 아마 낭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가람의 위치 때문으로 풀이되지만 탑과 금당의 위치가 일반 사찰과는 다른 특이성을 보여준다.

 

황복사지 탑은 우리나라에서 ‘무구정경(無坵淨經)’이 최초로 봉안된 탑이다.

무구정경은 ‘번뇌의 때가 없는 깨끗하고 빛나는 큰 주문에 대한 경’이라는 뜻이다.

 

불교에서 무구정경이 나타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석가가 가비라성의 정사에 있을 때 불교를 믿지 않는 한 사람이 일주일 후면 죽을 것이라는 점쟁이 말을 듣고 찾아와 자신이 죽은 후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물었다.

이 때 석가는 지옥에 갈 것이라고 답했다.

 

이에 대해 석가를 찾은 사람이 앞으로 지성으로 참회를 하겠다면서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말하자 석가는

“낡은 탑을 수리하고 따로 작은 탑을 만들어 그 안에 주문을 넣고 섬기며 생명이 연장되고 죽어서도 극락왕생 할 수 있을 것”

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보살들이 다른 중생들에게도 이와 같은 복을 줄 것을 간청해 석가가 경전을 정식으로 설법하게 되는데 이 설법이 무구정경이다.

 

탑이 석가가 죽은 뒤 생겨난 것을 생각하면 이 내용에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 경전은 704년 중국에서 번역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2년 뒤인 706년 이 탑에 최초로 봉안되었다.

 

이 경전은 불자들이 탑을 세우는 것을 가장 큰 공덕으로 해 놓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이 경전에 따라 탑을 다투어 만들었으며 이 때 만들어진 탑을 무구정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황복사지는 절의 역사와 규모에 비해 인근에 남아 있는 유물이 거의 없다.

 

그러나 탑 주위를 자세히 둘러보면 거북돌과 탑 편 등 당시 사찰에 있었던 유물이 발견된다.

 

거북돌은 탑에서 남쪽으로 20m 정도 가다가 들판으로 나 있는 길로 들어서면 논 길 옆에 있다.

이곳에는 20m 간격으로 논길에 걸쳐져 있는 화강암이 보이는데 이것이 돌거북이다.

 

탑 가까이 있는 바위는 몸돌과 머릿돌은 없지만 아직 등의 육각 무늬가 남아 있고 돌 중앙에는 구슬을 꿰어 놓은 형상이 비신이 섰던 흔적과 함께 있다.

 

이곳에서 좀더 들판 쪽으로 가면 역시 비슷한 형태와 크기의 돌이 논둑에 놓여 있는데 이것 역시 거북돌의 일부다.

이 돌은 거북 무늬는 따로 없지만 등 위에는 비신을 받혀 세웠던 자국이 선명히 파여 있다.

 

동편 논에는 석편들이 여럿 흩어져 있는데 역사학자들은 이 돌들이 신문왕릉에 둘러졌을 석편들로 본다.

 

역사학자들은 이 자리가

‘신문왕이 죽은 뒤 낭산의 동쪽에 장사를 지냈다’

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부합된다면서 황복사탑이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 역시 신문왕릉이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 해 준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들은 현재 황복사지에 있는 12지신 상은 이곳의 능이 없어지면서 흩어져 있던 돌을 사람들이 절터로 옮겨 놓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실제로 이곳에 흩어져 있는 돌들은 바깥쪽이 곡선으로 다듬어져 있어 이들을 연결하면 김유신 묘 보다 더 큰 봉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