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충남유형문화재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37호 한원진 초상 일괄

오늘의 쉼터 2018. 3. 16. 00:24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37호

명 칭

한원진 초상 일괄

분 류

유물 / 일반회화 / 인물화 / 초상화

수량/면적

7폭

지정(등록)일

2016.03.10

소 재 지

충남 홍성군 홍성읍 아문길 20, 홍주성 역사관

시 대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홍주성 역사관

관리자(관리단체)

홍주성 역사관



일반설명

 

한원진(韓元震, 1682~1751)은 숙종 영조 연간의 문인으로 자가 덕소(德昭), 호는 남당(南塘)이고 본관은 청주이다. 8세 때부터 조부를 따라 결성(結城, 현 홍성)으로 내려와 학문을 닦았고 1702년(숙종 28), 21세 때 황강(黃江)의 한수재(寒水齋)에 머물던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1641~1721)를 찾아가 입문하였다. 이후 기호성리학의 계보, 즉 이이(李珥) - 김장생(金長生) - 송시열(宋時烈) - 권상
하(權尙夏)를 잇는 호학(湖學)의 종장(宗匠)으로서 학문적 입지를 다졌다. 한원진(韓元震) 초상은 그가 59세 되던 해인 1740년(영조 16) 5월, 그의 문인 용재(庸齋) 김근행(金謹行, 1713~1784)의 주도 아래 화원 진응회(秦應會, 1705~?)가 처음 그렸다. 하지만 당시 제작된 작품은 전하지 않으며, 현존하는 초본과 정본 초상화는 모두 후대의 이모작(移摹作)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알려진 ‘한원진(韓元震) 초상’은 총 9점이며, 황강영당본과 국립중앙박물관본을 제외한 나머지 7점이 홍성의 종가 이다. 9점 모두 심의복건상(深衣幅巾像)이라는 공통점을 지니며, 단일 인물의 초상화로서 ‘송시열 초상’에 버금가는 수량이지만, 각각의 작품이 제작된 경위와 시기, 화가를 밝혀놓은 화기(畵記)가
전혀 없다. 기타 관련 자료에 따르면, 김근행(金謹行)이 ‘한원진(韓元震) 영정’을 모사해 경기도 고양의 서재에 봉안하는 등 18세기말~19세기 전반 예산 집성사(集成祠), 남포 신안사(新安祠), 성주 노강사(老江祠) 등 각지에 사우(祠宇)가 건립되고 그의 초상화가 봉안되었다고 전한다. 또 1843년(헌종 9)에는 한원진(韓元震)이 거주했던 홍성에 양곡사(暘谷祠)가 건립되어 한원진(韓元震)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기도 했으나 1868년~1871년 흥선대원군이 추진한 서원훼철령에 의해 대부분의 사우가 훼철됨에 따라 ‘한원진(韓元震) 초상’들은 수습해 홍성의 종가로 옮겨 보관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종가 소장 초상화 7점은 화풍 분석에 의거해 제작시기를 유추해볼 수밖에 없는데, 18세기말부터 20세기까지 장기간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되며 그 중 20세기에 제작된 <한원진(韓元震) 전신좌상>은 시기가 내려올 뿐 아니라 회화성도 떨어져 가치가 덜하지만, 나머지 6점은 전통 초상화의 형식과 화법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는 사례로서 의미가 있다. 20세기 작품을 제외한 나머지 6점의 ‘한원진(韓元震) 초상’은 다시 초본 3점과 정본 3점으로 나뉜다. 초본은 갈색 유지(油紙)에, 정본은 비단에 그려졌고, 규격은 조금씩 다르다.


①<한원진초상초본, 초본본(韓元震肖像草本, 初本本)>은 복건이 높게 그려지고 양쪽 굴곡이 둥글게 형상화되었다. 각진 얼굴선과 광대뼈, 숱이 적은 눈썹과 움푹 들어간 눈꺼풀, 입가의 주름 등 한원진 용모의 특징을 묵선 위주로 묘사하였다. 풍성한 턱수염에는 희끗희끗한 수염이 섞여 있는데, 양쪽 콧방울이 모두 그려진 점은 다른 2점의 초본과 형태가 다르다.


②<한원진초상초본, 재본본(韓元震肖像草本, 再本本)>은 ‘초본본’과 비교할 때 복건이 낮아지고 양쪽 굴곡이 뾰족해졌으며, 왼쪽 콧방울은 묘사하지 않아 콧날이 더 날카로워 보인다. 또 턱수염뿐 아니라 콧수염에도 흰 수염이 섞여 있고 눈꼬리의 주름살도 늘어났다. 특히 관자놀이부터 광대뼈와 턱으로 이어지는 굴곡을 도드라지게 묘사해 얼굴이 더욱 핼쑥한 느낌을 주고 있다.


③<한원진초상초본, 당옹본(韓元震肖像草本, 塘翁本)>은 복건과 심의 깃에 ‘초본본’이나 ‘재본본’
에 비해 연한 먹을 사용했고, 깃 부분에는 수정한 흔적이 남아 있다. 복건이나 용모는 ‘재본본’에 가까우며, 얼굴의 굴곡과 주름살에 의식적으로 음영을 넣어 입체감을 살렸다.


④<한원진반신상(韓元震半身像)>은 본래의 장황이 보존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한원진 초상’ 중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추정되는 ‘황강영당본’과 같은 자세이나 얼굴과 옷주름에 음영이 가미되어 더 입체적으로 표현하였다.


⑤<한원진전신좌상(韓元震全身坐像)>은 본래의 장황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나 두어 군데 비단이 찢기고 손상되어 있다. 제작시기는 18세기말~19세기 초반으로 추정되며, ④<한원진반신상(韓元震半身像)>보다 먼저 그려진 것으로 판단된다.


⑥<한원진전신좌상(韓元震全身坐像)>은 정본 ‘전신좌상’ 중 규모가 가장 큰 작품으로. 전체적으로 비단의 박락과 오염이 심한 편이며, 최근에 개장한 족자 형식으로 보관 중이다. 기본적으로 주인공의 자세와 용모, 복식 등이 ⑤<한원진전신좌상(韓元震全身坐像)>과 상통하지만 화면의 규격이 커지면서 신체가 더 장대하게 묘사하였다. 제작시기는 18세기말 이후인 것으로 판단된다.


⑦ 홍성 종가에 전해온 정본(正本) 초상화 4점 중 하나이다. ⑥<한원진전신좌상(韓元震全身坐像)>을 모본(母本)으로 광목 바탕에 채색을 사용해 그렸는데, 일부 안료는 수채화 물감으로 판단된다. 즉, 20세기에 수채화 기법으로 그린 초상화로 진한 갈색을 선염해 표현한 안면의 입체감이 어색하고, 옷주름에 가한 묵선과 선염도 들떠 있는 상태이다. 전통 초상화법이 적용된 여타의 종가 소장품에 비해 완성도가 떨어지며 족자로 장황하면서 사용한 재료 역시 비단이 아니라 무늬가 있는 두꺼운 종이이다. 홍주성 역사관 소장 <한원진 초상> 벼슬을 멀리한 채 평생 유학자로서 학문에 매진했던 주인공 인물의 정체성을 시각화시킨 전형적인 문인 초상화로 모두 심의복건상으로서 17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기호성리학 계열 문인집단의 초상화 제작 관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4점의 정본뿐 아니라 3점의 초본까지 보관되어 있어 전통 초상화의 제작 공정을 살펴볼 수 있게 해주는 실증적 자료이다.




한원진 초상

한원진 초상

한원진 초상

한원진 초상

한원진 초상

한원진 초상

한원진 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