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신행마동

제34장 천마존(天魔尊) 대 냉한웅(冷恨雄) 종결

오늘의 쉼터 2016. 6. 13. 01:26

제34장 천마존(天魔尊) 대 냉한웅(冷恨雄)

 

가로막은 여인, 그녀는 일화 설하공주였다.

"일화, 무슨 이유로 막는 거요?"

"……."

무엇이 그리도 두려운지 설하공주의 입술은 부들부들 떨릴 뿐,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냉한웅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으니, 어서 얘기해 보구려."

신비지소(神秘之笑)!

설하공주의 가슴은 폭풍을 만난 듯 심하게 울렁거렸다.

"그… 게 저… 천신 부부에게 사내아이가 있었어요.

천선께서 불혹(不惑)의 나이를 넘겨 얻은 늦동이… 제 말이 맞지요?"

천신과 천선은 냉한웅과 얘기하던 그녀가 갑자기 말꼬리를 자신들에게로 돌리자, 당황했다.

아니, 사실은 그래서만이 아니었다.

천선의 안색이 창백해지며 더듬더듬 입술을 달싹였다.

"그… 걸 어… 떻게…?"

천신이 재빨리 아내의 몸을 부축하며 물었다.

"그 애가 오늘의 일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요?"

설하공주는 못 들은 척 자신의 이야기만 계속했다.

"난산(難産) 끝에 태어난 사내아이는 오음절맥(五陰絶脈)과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괴이한 절증에 걸려 있었지요.

천신 부부도 남다른 의술을 지니고 있었으나, 병명조차 알아 낼 수 없었어요. 
그래서 아이를 안고 중원으로 가 성수마의(聖手魔醫)를 찾았는데…."

천선이 비 오듯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었다.

"내 아이, 그 애의 행방을 아시나요?"

순간, 냉한웅은 전신의 살이 부르르 떨림을 느꼈다.

알 수 없는 전율!

그의 의혹 어린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천선의 얼굴에 가 박혔다.

설하공주도 흥분된 듯 음성이 차츰 빨라지기 시작했다.

"곳곳을 수소문해 가며 헤매었지만, 찾기는커녕 뜻밖의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지요.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삼십여 년 전,

자기 대막(大漠)에서 광동성(廣東省) 천잔부시하(天殘腐屍河)로 근거지를 옮긴

지옥갱(地獄坑)의 고수들과 부딪친 거예요."

"……."

그녀는 숨죽인 채 경청하고 있는 중인들을 표정을 힐끔 살핀 후, 말을 이었다.

"천신 부부는 예전에 지옥갱과 마찰이 있었는데,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고…

또다시 중원에서 마주치게 된 거죠.

천신 부부의 무공은 지옥갱보다 우위에 있어 물리쳤으나, 아이가 간 곳이 없었어요.

결전에 앞서 근처 농가에 맡겨 두었는데, 갑갑함을 못 이겨 슬그머니 빠져 나갔던 모양이에요."

일순 부드러우면서도 나긋한 음률이 냉한웅의 마정소에서 흘러 나왔다.

삘릴릴리… 릴리……!

유선곡(遊仙曲)이었다.

불귀해저(不歸海低) 천존비동(天尊秘洞)에서 들었던… 몽롱한 의식 속으로 흘러들던 그 음률.

찰나, 천신과 천선이 격동에 찬 외침을 토해 냈다.

"얘야……."

"네가……?"

하나, 냉한웅의 표정은 변함없이 담담했다.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천신, 천선이 아닌 설하공주에게였다.

한데, 의외의 상황이 또 전개되었다.

"다가오지 말아욧!"

설하공주가 고통스런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선 것이다.

그녀는 이 순간, 몹시 흥분된 모습이었다.

중인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냉한웅의 눈동자에도 의혹의 빛이 일렁였다

"일화… 무슨 일이오?"

그가 다시 한 걸음 더 내딛자, 설화공주가 애원을 하듯 두 손을 모았다.

"제발… 날 내버려둬요."

일순, 냉한웅의 뇌리에 스쳐 가는 것이 있었다.

중인들 중의 누군가를 향한 분노와 그녀에게 느끼는 애처로운 감정이 가슴에 격랑(激浪)을 일으켰다.

"일화, 두려워 마오. 그 어떤 악랄한 술수도 우릴 갈라 놓진 못할 거요."

하지만 설화공주는 구슬픈 울음을 쏟아 낼 뿐이었다.

"당신의 비밀을 밝혔으니… 하늘의 신선이라도 날 구해 주지 못해요.

이제 남은 소원은 시신만이라도 온전히 보전하는 것이지만, 그도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녀는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아 낸 후, 냉한웅에게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기뻐요. 당신이 그토록 소원하던 부모를 만나게 되었으니…."

냉한웅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일화!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당신을 지켜 주리다."

그가 다시 접근하려 하자, 일화는 마구 악성을 질러 댔다.

"절대로 안 돼요!  내게 걸린 금제(禁制)는 제맥혈폭(制脈血暴)이예욧!"

사마천존경(邪魔天尊經)의 끝 부분에 수록되어 있던 극악무도한 괴공(怪功).

인체의 맥과 혈도에 금제를 가하여 시술한 자의 뜻에 따라 화약처럼 폭발시킬 수가 있다.

폭발의 위력 또한 주위 일 장 내의 사람들은 목숨을 잃을 만큼 강하니….

설하공주는 뒤로 몇 걸음 더 물러서서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떨어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으니, 그 자리에 계세요."

소걸군의 눈동자에도 물기가 어렸다.

"당신의 진정한 마음은 그게 아닐 거요. 나 또한 그렇소."

한 걸음, 또 한 걸음…

설하공주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그의 귀에 애타는 음성들이 와 닿았다.

"궁주님!"

자상한 어머니의 음성도 섞여 있었다.

"얘야……!"

냉한웅은 오히려 더욱 빠르게 움직여 설화공주를 와락 껴안았다.

"나도 살고 싶어요! 당신과 함께 영원히…."

공포와 황홀함을 동시에 맛본 설화공주의 교구가 바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아, 이럴 수도 있는 걸까?

쾅-!

그녀의 육신이 폭음과 함께 비산(飛散)되는 것이 아닌가?

피! 피!

피가 모래알처럼 잘게 부수어진 살점들과 함께 주위 십여 장 내를 뒤덮었다.

기겁을 한 중인들은 신형을 날려 혈우(血雨)를 피하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두 개의 인영은 반대로 냉한웅을 향해 쏘아졌다.

"얘야!"

그들은 혈인으로 변해 있는 아들의 상세를 급히 살폈다.

냉한웅.

전신이 선혈과 짓뭉개진 인육 덩어리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그

양 팔로 무언가를 끌어안은 듯 그렇게 서 있었다.

넋이 완전히 나가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눈빛은 지옥의 흑암(黑暗)처럼 어둡고 공허했지만, 입가에는 전에 없이 짙은 살기가 배어 있었다.

일신에는 아주 짧은 경련이 스쳐 갔다.

억겁 같은 시간이 그렇게 흘러 갔다.

불쑥 그가 손가락을 내밀어 중인들 중 한 명을 가리켰다.

"일선! 꼬리를 감추어도 소용 없다!"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행동이었다.

심지어 일부 중인들은 그가 심적 충격을 너무도 크게 받은 나머지,

정신이 이상해진 것이 아닌가 의심을 했다.

중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한 것을 본

일선(一仙) 오행불성선(五行佛聖鮮)이 앙천대소(仰天大笑)를 터뜨렸다.

"푸하하하… 그러지 않아도 정체를 밝힐 셈이었다."

장내의 중인들 모두가 고수이건만, 하나같이 그의 웃음에 진기가 격탕됨을 느꼈다.

일선이 품안에서 무언가를 불쑥 꺼냈다.

냉한웅이 태사의에 놓고 떠난 천존선이었다.

"사대밀령주는 마존령을 받들라!"

그러나 단 한 명도 꼼짝을 않는 게 아닌가?

일선의 얼굴이 수치와 분노로 일그러졌다.

"네놈들이 감히 천존선의 명을 거역하다니…!"

철살령주인 패천군 뇌웅이 한 발 나서긴 했지만, 뻣뻣히 서서 대꾸했다.

"천존이 이 자리에 계신 이상, 천존선은 한 자루 부채일 뿐이다."

일선은 위엄 넘치는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뇌웅, 네놈의 목숨을 구해 주고 무공을 회복시켜 준 사람이 누구냐?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는가?"

순간, 뇌웅은 기겁을 해 세 걸음이나 물러났다.

그의 안면은 온통 경악과 공포로 물들여져 있었다.

"천마존…!"

그럼 일선이 바로 천마존이었단 말인가?

일순, 냉한웅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했다.

일선, 아니 천마존은 냉한웅을 향해 조롱 섞인 미소를 흘렸다.

"본존을 대신하여 십대겁란을 막아 준 것을 치하한다."

냉한웅도 가볍게 응수했다.

"맞는 말이야. 내가 여기에 오기 전에 당신의 지옥갱도 싹 쓸어 버렸으니까."

순간, 천마존의 안면이 우악스럽게 일그러졌다.

"네놈이 월녀개의 시신과 함께 단명곡을 떠났기에 잠시 마음을 놓았더니,

만천과해(瞞天過海 : 하늘을 속여 바다를 건넘) 술책이었구나!"

냉한웅은 무심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자는 대충 받은 셈이니, 이젠 본전을 회수해 볼까?"

"크흐흐… 네놈은 정사마천궁주보다 장사꾼인 만보공자가 더 어울리는구나.

하나, 본전도 건지기 불가능할 게다."

"과연 그럴까?"

천마존도 득의의 광소를 터뜨렸다.

"물론이다. 네놈의 무공은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고 있으니까. 크하하하…!"

순간, 냉한웅의 전신이 삼분(三分)되기 시작했다.

맨 우측은 피를 뒤집어쓴 듯 시뻘겋게, 맨 좌측은 먹물을 뿌린 듯 시커멓게,

그리고 중앙은 백옥 같은 피부가 더욱 눈부시게 새하얀 광채를 발산하였다.

천하에 냉한웅만이 지닌 분심공(分心功).

굳이 명칭을 붙이자면 정사마천공이라고나 할까?

'저 놈이…  오늘 해치우지 못한다면 이후엔 다신 기회가 없겠구나.'

천마존이 버럭 고함을 지르며 천존선을 떨쳤다.

"천존무상겁(天尊無上劫)-!"

천존칠선(天尊七扇)이 아니라 사실은 천존팔선(天尊八扇)이었다.

자신의 비록에 수록하지 않았던 취후의 절초.

냉한웅도 바람개비 돌리듯 쌍수를 번갈아 휘저었다.

"운몽조화멸겁인(雲夢造化滅劫印)-!"

천기자(天機子),
귀곡자(鬼谷子),
마운자(魔雲子),
무성자(武聖子),
영령자(靈靈子).

십대겁란을 예언했던 동해무성의 다섯 사부,

운몽오우(雲夢五友)가 오금향로(烏金香爐)에 새겨 놓았던 절세의 비학.

드디어 냉한웅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하늘도 놀라고, 땅도 흔들리는 절세의 무학.

콰르르르릉- 쾅- 쾅-!

연속으로 폭발하는 음향이 천지를 뒤덮었다.

중인들은 고막이 터져 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사방으로 도주하였다.

그 때였다. 

짤막한 신음이 새어 나왔으나 중인들은 그 주인공을 단번에 알아맞출 수 있었다.

"윽!"

선혈을 분수처럼 뿜어 내며 하늘 가득 떠오른 냉한웅.

그는 이미 의식을 잃은 듯 날아가고 있었다.

"얘야…!"

천신과 천선의 신형이 다급하게 공간을 갈랐다.

부모의 마음은 한결같은 것.

그들 부부는 냉한웅을 움켜쥐고는 재빨리 지면으로 착지하였다.

"우욱!"

주먹만한 핏덩어리를 다시 천선의 앞섬에 뱉어 내는 냉한웅.

천선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중상은 입은 사람이 마치 자신들인 것처럼 얼굴이 사색으로 변해 있었다.

"얘야… 어서 맥 좀 짚어 보자."

천신이 재빨리 손목을 잡은 사이, 천선은 비통한 울음부터 터뜨렸다.

"모든 게 다 부모를 잘못 만난 탓이에요. 으흑흑…!"

냉한웅은 흐린 눈을 들어 앞을 살폈다.

천마존으로 짐작되는 짓뭉개진 시체 앞에 뇌웅이 뜨거운 눈물을 뿌리고 있었다.

이 때, 만통자가 한 청년을 부축해 왔다.

그 청년은 바로 백일기였다.

"이 사람이 천존께 꼭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해서 데려 왔습니다."

백일기가 희미한 미소를 띄운 채 입술을 달싹였다.

"팽낭자는 몸 건강히 살아 있소.

보리밀사에서 오 리쯤 떨어진 파우산 중턱의 암자에 기거하고 있으니, 찾아가 보시오."

이어 그는 만통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혹시 애제자(愛弟子) 방명이 하유정(河柳庭)이 아니오이까?"

일순, 만통자의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유정을 아신단 말이오? 

장강어옹에게 분광월아도의 복수를 하겠다며 떠난 뒤, 소식이 끊겼는데…."

백일기는 힐끔 냉한웅을 노려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저 친구가 보리밀사를 또 한 번 뒤집어 엎을 듯싶군요."

다음 순간, 냉한웅의 얼굴에 남자가 보아도 황홀하리만큼 신비로운 미소가 떠올랐다.

'무풍신룡(武風神龍)이 바로… 낙양일색 팽지연 이상으로 내게 정을 베풀었으니,

그녀를 외면한다면 결코 사내 대장부의 도리가 아니다.'

실로 동네 강아지가 다 웃을 일이었다.

소걸군, 
만보공자, 
정사마천궁주.

이 모든 냉한웅의 화신들이 언제 단 한 번이라도 그 무슨 도리를 따져 가며 행동했었단 말인가?

이 때, 저 멀리 고아들과 함께 달려오는 절세미녀의 모습이 보였다.

'저기에도 있구나. 내가 사랑해 줘야 할 여인이…!'

소연군주(素蓮君主) 주예영(朱豫英).

그녀는 냉한웅에게 약속했던 대로 정성을 다해 고아들을 돌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 곁에는 강북월녀(江北月女) 하미미(河美美)가 있었는데,

한웅과 시선이 마주치자 방긋 의미 어린 추파(秋波)를 띄워 보냈다.

문득 죄책감(罪責感)이 든 냉한웅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허공을 향하였다.

월녀개, 그리고 설하공주….

그녀들의 질투와 한(恨) 서린 옥음(玉音)이 귀에 들리는 듯하였다.

소걸군은 마정소를 입술에 갖다 대었다.

먼저 떠나간 여인들에 대한 사모의 곡조가 개방의 사내에게서 흘러 나오고 있었다.

북망산 위엔 무덤도 많아,
천추에 서린 한이 낙양에 간다.
해 지자 성중엔 노래 소리 일어도,
산엔 소나무 스쳐 가는 바람 소리.  

 

- 大尾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