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신행마동

제32장 풍연풍(血風戀風)

오늘의 쉼터 2016. 6. 13. 01:22

제32장 풍연풍(血風戀風)

 

하나, 냉한웅의 태도엔 추호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는 힐끔 천봉밀니를 바라보았다.

"모두가 본존에게 볼일이 있어 찾아온 게로군."

이는 몽땅 내가 처치할 터이니, 한 명이라도 가로챌 생각 말아라 하는 뜻이 아닌가?

참으로 광오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만신각주가 분통을 터뜨렸다.

"네놈을 갈기갈기 찢여 죽여 만신괴주와 신로들의 한을 풀어 주겠다."

불사일마도 두 눈에서 사악한 빛을 폭사했다.

"교주님과 본교 수하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네놈의 시체를 들개 밥으로 만들어 주겠다."

강시혈제가 귀신이 울부짖듯 소리쳤다.

"저 놈의 대갈통은 내게 넘겨 주시오. 껍질을 벗겨 고루로 만든 후, 내가 쓰고 다닐 거요."

소름이 오싹 끼치는 위협이었다.

묵묵히 듣고 난 냉한웅이 감탄의 기색을 보였다.

"본존의 몸뚱아리를 그토록 욕심내다니…

그대들이야말로 진정 물건 볼 줄 아는 안목을 지닌 듯싶소.

하지만 본존은 그대들의 구린내 나는 몸뚱아리가 조금도 탐이 나지 않으니,

어디 흥정이 될 말이오?"

바로 이 때, 범종이 울리는 듯 우렁한 음성이 날아왔다.

"십팔층 지옥에 떨어져도 그 혓바닥을 계속 놀려 댈 수 있는지 두고 보겠다."

이어 라마승들이 땅에서 갑자기 솟은 듯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중 금장가사(金裝袈裟)를 두른 두 명은 나이를 짐작키 어려울 만큼 늙었고,

나머지 한 명은 불혹(不惑)에 들어선 듯 보였다.

일순, 냉한웅의 표정이 굳어졌다.

'새외천무경(塞外天武經)은 서장일궁(西藏一宮), 즉 포달랍궁(布達拉宮)의 무학을 으뜸으로 쳤다.'

사대각존 중 철라각존(鐵羅覺尊)의 무공을 겁나게 경험해 본 터라, 더욱 실감이 났다.

하지만 혀마저 굳어진 것은 아니었다.

정사마천궁주임을 자인하긴 했지만, 지금 그의 모습은 여전히 소걸군이 아닌가?

"두 분 라마 중 한 놈은 은라각존(銀羅覺尊)이고, 다른 놈은 동라각존(銅羅覺尊) 아니시오이까?"

냉한웅의 기이한 말투에 노라마들의 안면이 일그러졌다.

"싸가지 없는 애송이 놈!"

노라마 뒤편에 공손히 시립해 있던 중년 라마승이 노성을 지르며 뭔가를 휙! 던졌다.

그 물건은 암기가 아니었다.

데르륵-!

냉한웅은 자신의 발밑에 떨어져 구르는 그것을 본 순간, 망연자실 신음을 토했다.

"진… 강…!"

놀랍게도 그는 좋은 바람의 집에서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보부상의 수급이었다.

냉한응은 그가 보복을 당할까 봐 무관하게 보이려고 가격하기까지 했는데….

단지 냉한웅에게 호의를 베풀었다는 이유만으로 이토록 처참한 죽음을 당한 것이다.

돌연 냉한웅의 신형이 허공 높이 치솟았다.

그리고 머리를 아래로 하여 떨어져 내리며 폭갈을 터뜨렸다.

"파천벽력강(破天霹靂 )-!"

파천혈랑교의 비전지학이었다.

번쩍-!

섬광이 일며 파천혈륜의 검기가 광풍(狂風)과도 같이 눈 아래 모든 것들을 휘몰아쳐 갔다.

츠츠츠츠-!

불사천마교, 파천혈랑교, 고루대교, 포달랍궁 등의 인물들이

정사마천궁주가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절학을 지녔음을 어찌 모르랴.

하지만 이건 정말 너무했다.

바로 자신들의 무공을 사용하여 공격을 하다니….

중원무학과 새외무학,

더구나 비전지학에 이르러선 무학의 근본 원리에서조차 유사점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대응 방법 역시 전혀 달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절세고수들의 대결에선 바늘만한 틈도 죽음에 이르는 길로 이루어지지 않던가?

전혀 예측 못했던 공세에 의표를 찔린 그들은 일순 어찌할 바를 몰랐다.

"피해랏!"

단지 이 말밖엔….

그러나 모두가 무공이라면 한 자락씩 폭넓게 깔고 있던 터.

우산살이 펼쳐지듯 그들의 신형이 신속히 흩어졌다.

비교적 무공이 크게 낮은 졸개들만 분노의 제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눈 깜박할 사이에 십여 명이 내장을 쏟아 내며 거꾸러지자,

그들도 피에 굶주린 이리 떼처럼 쇄도해 들었다.

"그래 봤자, 한 놈이다!"

"찢여 죽여라!"

새외의 용사들답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니 냉한웅의 무공에 겁을 집어먹을 리도 없었다.

죽여도 죽여도 그 누구도 물러서려 들지 않았다.

동료의 시체를 딛고 몸을 내던졌으며, 죽어 가면서도 악독한 저주의 말을 남겼다.

냉한웅도 분노의 극을 치닫고 있었다.

"진강의 피 한 방울로 너희 목숨 열과 맞바꾸겠다!"

파천혈륜이 미친 듯 기음(奇音)을 토해 내며 몸부림쳤고,

그 때마다 처절한 비명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 때 불경 읊는 소리가 장엄히 울려 퍼졌다.

"옴 삼막뇩… 팔부금강초도량… 청제재금강초도량… 벽독금강초도량… 황수구금강초도량…

백정수금강초도량… 적성화금강초도량… 정제재금강초도량… 자현신금강초도량…

대신력금강초도량… 사보살초도량… 금강권보살초도량… 금강색보살초도량…

금강애보살초도량… 금강어보살초도량……."

금강반야바라밀경 중 참회진언이었다.

하지만 냉한웅에겐 더욱 가증스럽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죄 짓고 염불만 읊어 대면 속죄가 되느냐?"

불음이 뚝 끊기고 은라각존(銀羅覺尊)의 노성이 들려 왔다.

"참으로 뉘우칠 줄 모르는 자로다. 살려 두면 얼마나 더 많은 생명이 목숨을 잃을꼬."

그 순간, 왼손으로 천존선까지 꺼내 들었다.

속전속결(速戰速決)… 상대에게 전열을  정비할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아니, 오히려 기세를 더해 가는 무리들을 상대하자니 별수가 없었다.

파천혈륜은 연속으로 혈살검법(血殺劍法)과 잔혼도법(殘魂刀法)을,

천존선으로는 칠 초(招)의 천존선법(天尊扇法)을 전개했다.

또한 신형은 천축(天竺) 밀교(密敎)의 대나이신법(大羅理身法)을 펼쳐 유령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그러니 여러 파가 연합한 무리들은 제대로 된 진세를 형성하지 못

우왕좌왕 피상적 공세를  취하다 목숨만을 빼앗길 밖에 도리가 없는 것이다.

혈인(血人).

냉한웅의 전신은 피로 뻘겋게 물들었고, 자신의 손에 죽은 적이 몇 명인지도 관심 밖이었다.

불사천마교, 
파천혈랑교, 
고루대교, 
포달랍궁….

그들의 숫자가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으나 끈질기게 공세를 가해 왔다.

'죽이지 못하면 죽는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면 고기 값이라도 하고 죽으리라!'

이것이 모두의 공통된 생각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혈폭마도(血瀑魔刀)-!"

"만겁구명뢰(萬劫九冥雷)-!"

"현마귀살강(玄魔鬼殺 )-!"

저마다 폭갈을 토해 내며 휘몰아쳐 왔다.

하나, 새외각문(塞外各門)의 절학을 손금 보듯 꿰뚫고 있는 냉한웅이 아닌가.

이는 굶주린 호랑이 입 안에 날고기 던져 주는 격이었다.

백골수라빙혼무(白骨修羅氷魂舞), 
탕마보리(蕩魔菩提), 
만겁혈황지(萬劫血荒指), 
참륙혈마장(斬戮血魔掌), 
수미단열(須彌斷熱), 
혈사잔음강(血邪殘陰 )….

극성(極性)의 무학만을 사용하여 살육(殺戮) 효과를 최대한 높였다.

냉한웅으로서도 의외의 소득이 있었다.

정사마(正邪魔), 각종 상반된 무공이 비빔국수처럼 마구 뒤엉켰으

상생상극(相生相剋)의 절묘한 어울림으로 인해 위력도 오히려 배(倍)가 된 것이다.

콰르릉- 쾅-!

보리밀사의 지붕들이 구멍이 뚫리거나 무너져 내리고, 기왓장들은 파편들로 변해 마구 날아다녔다.

아름드리 기둥들도 흔들거리거나 쓰러지고, 땅거죽이 뒤집어져 흙먼지가 시야를 혼탁케 했다.

광풍과도 같은 기류에 휘말린 사체(死體)들은

사지(四肢)와 머리통 등 오체분시(五體分弑)되어 마구 흩어졌다.

그야말로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아수라장이었다.

냉한웅도 무사할 리가 없다.

금강불괴지체를 지녔으며 호신강기와 천망의(天網衣)의 보호를 받았지만, 역시 인간의 육체였다.

과도한 공력 사용과 충격에 의한 내상이 겹쳐 증세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의 우측에서 일갈과 함께 웅온한 경력이 밀려 왔다.

"아수라멸굉(阿修羅滅宏)-!"

냉한웅은 빙글 회전하며 천마선을 떨쳤다.

"사마천존경혼(邪魔天存驚魂)-!"

사마천존경혼장, 즉 장력으로 사용되는 내력을 강기로 변화시켜 발출한 것이다.

천존선을 따라 흘러 나간 강기가 부챗살처럼 퍼져 광범위하게 격사되었다.

동라각존이 날린 장력은 냉한웅의 강기와 부딪친 순간,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두 가지 모두 오행장법(五行掌法)에 속한 것으로 아수라멸굉은 금(金)에 해당하고,

사마천존경혼은 토(土)에 해당하여 흙 속에 금이 묻혀 버리듯 사라지고 만 것이다.

뿐만 아니라 넓게 퍼져 나간 강기 중 일부만이 아수라멸굉과 함께 사라져 버렸을 뿐,

거의가 그대로 직진해 동라각존의 전신 요혈을 노렸다.

"헉!"

전력을 기울여 일격을 가한지라, 동라각존은 미처 호신강기를 모을 여유가 없었다.

그는 급히 신형을 날렸다.

하지만 강기의 범위가 주위 삼 장에 미쳤으니….

다음 순간, 전신을 산산조각 내는 듯한 엄청난 충격이 와 닿았다.

쾅-!

흉폭하기 그지없는 폭음과 동라각존의 비명이 거의 동시에 사방으로 흩어져 날았다.

짓이겨진 살덩이들이 마치 우박인 양 오륙 장 밖까지 떨어져 내렸다.

이 때 천지를 가르는 듯 호통 소리가 쩌렁쩌렁 장내를 울렸다.

"모두들 물러서라!"

만신각주였다.

그가 서서히 냉한웅이 서 있는 중앙으로 걸어가자,

약속이라도 한 듯 불사일마와 혈시마제도 뒤따랐다.

천봉밀니는 흑수정 같은 눈알을 요리조리 굴리며 이해득실을 계산했다.

'정사마천궁주, 저 자의 정체와 무공은 너무도 신비롭다.

지금 이 자리에서 처치 못한다면, 후환(後患)을 감당치 못할 것이다.'

은라각존은 처연한 표정으로 이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하나 천봉밀니마저 종종걸음으로 가세하자,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냉한웅은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졌음을 직감했다.

'죽음을 앞둔 마당에서까지 정체를 숨길 필요 있겠는가?'

서서히 그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미쩍 마른 체구에 적당히 살이 붙으며 장난기 가득했던 얼굴도 차츰 아름답게 변해 갔다.

사내에게 아름답다는 표현은  적합치 않다.

하지만 영준하단 말만으로는 너무도 부족하니, 어쩌랴?

천환역골공(千幻易骨功)이 완전히 풀린 그의 모습은 절대미남아일 뿐만이 아니었다.

그 훤앙한 기개와 세상 어느 누구도 감히 범접 못할 고고한 기품(氣品)….

너 나 할 것 없이 중인들의 눈이 경탄의 빛을 띠었으며, 나직한 탄성이 연이어 새어 나왔다.

그러나 냉한웅에게 이런 반응은 관심 밖이었다.

그의 두 눈동자에 어린 것은 오직 슬픔과 번민(煩悶)뿐이었다.

'지연… 그대의 숨결이 잠들어 있는 이 곳에서 내 숨결도 멎을지 모르오.

저승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대에게 백 배 용서를 빌고 부부의 연(緣)을 맺으리다.'

냉한웅,

만년빙동과 같은 그의 가슴 속에 이토록 뜨겁게 타오르는 정열의 불씨가 간직되어 있었다니….

이 때 만신각주의 고함이 다시 보리밀사를 뒤흔들었다.

"만신영휘(卍神靈輝)-!"

이어 천봉밀니의 짤랑짤랑한 옥음(玉音)이 뒤따랐다.

"보리밀타불(菩提蜜陀佛)-!"

불사일마와 혈시마제의 신형이 허공에 떠올랐다.

"불사천마폭(不死天魔暴)-!"

"백골빙혼공(白骨氷魂功)-!"

마지막으로 은라각존이 피처럼 붉게 변한 쌍장(雙掌)을 내뻗었다.

"대수인(大手印)-!"

일명 혈수인(血手印)이라고도 불리우는 밀종의 절대절학(絶代絶學).

카르릉- 츠츠츳츳-!

파라라라- 팡팡-!

심장을 모질게 들쑤시는 온갖 종류의 파공음이 냉한웅의 한몸에 퍼부어졌다.

천지가 억겁(億劫)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듯 광란하였다.

냉한웅도 목청껏 폭갈을 터뜨렸다.

"천극음양패겁(天極陰陽覇劫)- 천폭파황(天爆破荒)-!"

동해무성이 유일하게 만들어 낸 천극음양패겁공(天極陰陽覇劫功).

그가 기록하길… 정도(正道) 무학의 패도적인 수법만을 모아 창안하였으나,

그 어떤 사공(邪功)도 이보다 더 패도적이지는 못하리라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천마존의 천폭파황(天爆破荒).

이 무공을 만든 본인조차 사용하길 꺼려 한 번도 실전에 사용해 본 적이 없다니,

그 위력은 불문가지 아니겠는가?

냉한웅 역시 위의 두 가지 무공을 익히기는 했으나, 실전에는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펼쳐진 것이다.

더구나 자신만의 독특한 분심공(分心功)에 의하여 동시에….

일순, 구유명부(九幽冥府)로부터 불어 오는 둣한 광풍과 안개가 주위 모든 것을 덮어 버렸다.

칠흑의 어둠 속, 광란하는 기류와 지축을 가르는 폭발음들…

여섯 개의 입으로부터 터져 나온 비명 소리마저 깊숙이 묻혀 버리고….

적막(寂寞)만이 앙금과 같이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중인들의 시야가 트일 만큼 어둠이 사라지는데는

그 이후로도 향 한 자루 탈 만큼의 시각이 걸렸다.

다 죽었는가?

여섯 명 모두가 시체처럼 나뒹굴고 있었다.

하나, 중인들은 선뜻 나서 확인하려 들지 않았다.

눈으로 보고서도 믿어지지 않는 엄청난 광경에 얼이 빠져 있던 탓이리라.

이 때, 냉한웅의 몸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힘겹게 두 손바닥으로 땅바닥을 밀어 비스듬히 상체를 위로 들어올렸다.

일견하기에도 엄중한 내상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어린아이라도 간단히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각 문파의 살아남은 인물들은 육십여 명.

그들은 슬금슬금 오 장 가까이 다가갔으나, 어느 누구도 먼저 손을 쓰려 들지 않았다.

죽음보다 더한 공포랄까?

신처럼 받들던 우두머리들의 사체(死體)를 가까이 대하자, 자신도 모르게 몸이 움츠려 든 것이다.

하나, 공포보다 더한 증오!

한 명의 은고루가 장창을 냉한웅에게 겨누었다.

막 던지려는 순간, 불사천마교의 흑의복면인이 나서서 제지했다.

"잠깐만! 내가 처치하겠으니, 양보해 주시오."

그는 용감하게도 검을 뽑아 들고 접근하기 시작했다.

서서히 냉한웅의 곁까지 다가선 그가 검을 치켜들었다.

절대절명(絶代絶命)의 순간.

냉한웅이 홱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눈동자엔 정기(精氣)가 사라져 있었으며, 더 이상의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못했다.

냉한웅의 육신은 조금도 움직여 주지 않았으나, 머리 속은 오히려 더 맑아진 듯했다.

죽기 직전에 반짝 정신이 맑아지는 회광반조(回光返照) 현상일까?

흑의복면인의 검.

검신(檢身)을 타고 흐르는 빛살이 문득 눈에 띠었다.

'참으로 아름답구나! 저토록 고운 광채가 내 목숨을 앗아 가다니….'

목을 가를지, 아니면 등과 심장을 관통할지는 모르지만

이국(異國)의 하늘 아래 뼈를 묻게 되는 것만은 기정사실이었다.

그래도 후회스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연… 그대와 같은 곳에 잠들 수 있으니, 더 이상 무얼 바라겠소.'

의식이 가물가물해지자, 냉한웅은 스스르 눈을 감았다.

바로 이 때였다.

흑의복면인이 갑자기 손에 든 검을 내던지며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동시에 다른손에 꽉 움켜쥐고 있던 작고 둥근 물체를 중인들을 향해 그대로 내던졌다.

콰쾅-!

신산묘인인 장강어옹 차비운에게 주었던 두 개의 뇌화탄(雷火彈) 중 하나였다.

"크악!"

"아악!"

폭음과 비명 소리가 다시 피비린내를 일으켰다.

잠시 정적이 깔려 있던 보리밀사,

그 곳에 새로운 격랑(激浪)을 불러 온 흑의복면인이

냉한웅을 품에 안고 갑자기 전력질주하기 시작했다.

"저 배신자를 잡아라!"

질기게도 살아남은 각 파의 인물들이 추적하며 각양각색의 암기를 날렸다.

피핑핑- 슈슈웅슝-!

수노(手弩), 비황석(飛蝗石), 투골단혼사(透骨斷魂沙),

수리도(袖裏刀), 귀왕침(鬼王針) 등이 비 오듯 흑의복면인을 향했다.

흑의복면인의 신법은 꽤나 날렵했지만, 냉한웅을 안고 있어 상당한 지장을 받았다.

암기의 상당수가 그의 등과 엉덩이에 박혔다.

그러나 흑의복면인은 질주를 계속하며 남은 한 개의 뇌화탄을 뒤로 던졌다.

엄청난 폭음과 함께 또 십여 명이 부상을 입거나 피를 뿌리며 죽었다.

두 개의 뇌화탄이 삼십여 명의 고수를 살상한 것이다.

요행히 폭발의 범위에서 벗어난 이십여 명도 그 위력에 놀라 주춤주춤 추적의 속도를 늦추었다.

그 사이에 흑의복면인은 사력을 다한 폭주를 거듭하였다.

중독되어 검게 변한 피가 적잖게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그는 멈출 줄을 몰랐다.

품안의 냉한웅은 아무 것도 모른 채 미약한 숨만을 몰아쉬고 있었다.

"헉… 허억…!"

잡목 숲 우거진 야산(野山)까지 도망온 흑의복면인이 숨을 헐떡이며 냉한웅을 내려놓았다.

잠시 처연한 눈빛으로 냉한웅을 내려다보던 그가 훌쩍 복면을 벗었다.

드러난 얼굴….

아, 뜻밖에도 여인이 아닌가?

강북화(江北花) 차연화(車蓮花)!

무풍신룡이 남자인 줄만 알고 짝사랑해 온 비운(悲運)의 여인.

부친인 장강어옹 차비운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 대귀선을 조종하고 중원무림인들을 위험에 빠뜨린….

그러나 냉한웅은 천지묵혈동에서 사로잡힌 그녀를 용서해 주었었다.

모든 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후 차연화는 무풍신룡의 행적을 찾아 이 곳까지 오게 된 것이다.

미모의 여인, 그것도 시집 안 간 처녀로서 얼마나 고초가 심했겠는가?

하지만 이것마저도 처참한 죽음을 당한 부친과

사랑하는 이를 걱정하는 마음의 고통에 비한다면 오히려 새털같이 가벼운 편이었으리라.

가련한 차연화,

그녀는 독상과 출혈로 인해 극심한 고통마저도 제대로 느낄 수 없을 만큼 정신이 흐려져 있었다.

"무룡신룡… 당신은 지금 어디… 에 계시… 나요…?"

혼미한 중에 흘러 나온 이 말을 냉한웅이 들었더라면,

자신이 그녀가 찾는 사내가 아닐지라도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사랑!

입으로 말하기는 쉬우나, 그녀처럼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 것인가?

"으음……!"

차연화는 부들부들 떨며 완전히 검푸르게 변해 버린 얼굴을 냉한웅의 가슴에 떨구었다.

이어 그녀의 칠공(七孔)에서 실뱀 같은 검은 피가 흘러 나왔다.

"무풍… 신룡…!"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그리고는 다시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한데, 이 무슨 얄궂은 운명의 장난인가?

스륵…!

옷깃 스치는 소성이 일며 한 명의 비구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보리밀사의 승복을 입은 그녀는 삭발은 하였으되, 타고난 아름다움만은 감출 수가 없었다.

이 여인이 바로 차연화가 애타게 찾아 헤매던 무풍신룡(武風神龍)이 아닌가?

만통자의 애제자인 하유정(河柳庭).

그녀 또한 애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방황하는 표류자(漂流者)가 아니던가?

차연화가 남장한 그녀를 사내로 오인했듯,

냉한웅을 분광월아도(分光月牙刀)로 오인하고 지극히 사모했던 여인….

그녀는 분광월아도가 죽은 것으로 오인해 자신을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차연화의 부친, 

장강어옹(長江漁翁)에게 복수를 다짐하였다.

하지만 오히려 그에게 당하고, 마침 지나던 백일기의 구원을 받아 보리밀사로 오게 된 것이다.

냉한웅의 가슴 위에 엎어져 죽어 있는 여인을 본 하유정은

놀람과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아픔이 뒤섞인 복잡다단한 표정을 지었다.

"강북화 차낭자였다니… 그래서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 가며 구하려 했구나."

보리밀사에서 한창 격전이 치루어지고 있었을 때,

하유정은 탁발(托鉢)을 나갔다 돌아오던 중이었다.

그녀가 도중에 발견한 것은, 중상을 입은 흑의복면인이 사내를 안고 도주하는 광경이었다.

자비심이 일어 도와 줄 요량으로 암암리에 미행하였는데,

전혀 도움을 줄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녀는 혹시나 하여 차연화의 맥문을 짚어 본 후, 탄식을 내뱉었다.

"후유, 대체 어떤 사내이기에 이토록…."

눈길을 돌린 그녀는 갑자기 입이 얼어붙은 듯 중얼거림을 멈추었다.

이토록 완벽한 미남이 세상에 또 있을까?

얼굴 윤곽의 크기와 모양이 더  이상 조화로울 수 없을 만큼 나오고 들어가고,

살결은 어찌 이리도 희고 고운가?

어느 곳 하나, 바늘 끝만한 흠조차 잡을 데가 없었다.

하지만 하유정의 입가엔 씁쓸한 미소만이 감돌았다.

'마치 천상의 노군이 백옥으로 인간을 빚어 하계에 내려 보낸 듯하구나.

그러나 내 마음 속에 그려진 분광월아도의 모습엔 비교될 수 없어.'

비실비실 허약하고 비쩍 마른데다가 평범한 얼굴. 게다가 둔하기는 미련한 곰보다 더한 한심이.

그 가짜 분광월아도가 절세의 미남인 냉한웅보다 잘생겼다니,

사랑에 눈이 뒤집힌 여자들은 다 이런가?

그녀는 냉한웅을 모른다.

자신이 사랑하고 있는 사내를 눈앞에 두고도 못 알아보는 그녀의 불행도

차연화의 불행보다 별로 가볍지 않으리라.

그녀는 이번에 냉한웅의 맥문을 짚어 보았다.

미약하고 불규칙하지만, 조금씩 뛰는 것이 느껴졌다.

하유정은 힐끔 차연화의 시신을 바라봤다.

"당신의 정인이 이대로 죽어 가는 것을 원치는 않겠지요? 몸을 좀 만지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그녀는 지체하지 않고 냉한웅의 품안에 손을 넣었다.

엄지손가락만한 크기의 자옥병(紫玉甁), 

그 안에 절반 가량 채워진 녹색 액체를 보자 그녀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

"녹엽영령수(綠葉英靈水)! 하나, 이것만으론 부족해."

그녀는 자신의 품안에서 용안처럼 생긴 단약(丹藥) 한 알을 꺼내었다.

"천봉밀니께서 빈니의 무공을 속성시키려 주신 보리밀단(菩提蜜丹)인데,

이 편이 더 요긴한 쓰임새가 될 거예요."

그녀는 하연화가 살아서 듣고 있는 듯 계속 중얼거렸다.

보리밀단은 냉한웅의 입 안에 들어가기 무섭게 녹아서,

녹엽영령수와 함께 식도를 타고 흘러 내려갔다.

약 일각쯤 지났을까?

"음…!"

미약한 신음을 흘리며 냉한웅이 눈을 떴다. 

그러나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죽음을 문턱 너머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할 만큼 내상이 심했던 것이다.

더구나 천극음양패겁(天極陰陽覇劫)과 천폭파황(天爆破荒)은

본신 잠력까지 모조리 끌어내야만 하는 극단의 무공들인데,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사용했으니… 상대에게 당해 죽지 않아도 살아남기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녹엽영령수와 보밀밀단 중 하나라도 없었으면, 이런 효과조차 보지 못했으리라.

"여… 기가 어디… 요?"

그가 간신히 입술만을 달싹였으나, 그래도 하유정의 놀람과 기쁨은 상당하였다.

"이렇게 빨리 깨어나다니…  당신처럼 심후한 내공을 지닌 사람은 천하에 몇 안 될 거예요."

어찌 내공 뿐만이겠는가?

냉한웅의 상세는 그녀가 예측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고 나빴었다.

아무리 심한 상처를 입어도 숨만 붙어 있다면 빠르게 치유가 되어 살아난다는 사극무형강(邪極無形 ).

이 신비로운 진력이 자연발생하여 혈맥을 따라 돌지 않았더라면, 
천하에서 제일 심후한 내공을 지녔다 하더라도 이런 효과는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냉한웅은 흐릿한 눈빛으로 소리가 들려 온 곳을 바라보았다.

먼저 파르스름하게 깎인 여인의 머리통,

그리고 이마와 눈썹, 눈, 코, 입이 차례로 동공에 어렸다.

'참으로 어여쁜 여승이다.

천봉밀니가 장미 같다면, 이 여인은 들국화에 비할까? 저 청순미(淸純美)…!'

이런 상황에서도 여인의 미를 꽃에 비해 품평하다니,

아마도 그가 모르고 있는 부친은 아마도 희대(稀代)의 바람둥이가 아니었을까?

만약 하유정이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더라면

기가 막혀 졸도 일보 직전까지 갔을 것이다.

일순, 냉한웅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아, 그녀… 중독과 내상이 살아남기 어려울 듯싶었는데… 보리밀사의 의술은 정말 놀랍구나.'

미인의 얼굴이라면 결코 잊지 않는 천성(天性)과 끈기.

이로 인해 흘낏 단 한 번 보았을 뿐이지만,

그녀가 백일기에게 안겨 있던 여인임을 알아본 것이다.

감사의 정(情)이 그의 눈동자에 떠오른 것을 발견한 하유정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빈니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생각은 마세요.

진정 당신을 구한 여인은 따로 있답니다."

순간, 그녀의 신형이 한 줄기 바람처럼 사라졌다.

'빙허무풍신법(憑虛無風身法)!'

문득 냉한우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강호비사집에 수록된 신비인….

'무풍신룡이다. 함께 불귀해로 갔을 때, 남장여인인 줄도 모르고…!'

중원(中原).

한 가지 소문이 장강의 물결처럼 파란(波瀾)을 일으키며 번져 갔다.

정사마천궁주가 바로 신기묘산 소걸군과 동일인이라는 것.

뿐만 아니라 만보공자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병적일 정도로 호기심 많은 강호무림인들이 아닌가?

진상을 알고자 하는 이들이 중원을 누비고 다니니, 자연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소란해졌다

그러나 당사자라 할 수 있는 정사마천궁과 선풍회는 침묵만을 지키고 있었다.

이에 세인들은 더욱 날뛰었고, 소문은 밑도 끝도 없이 확대되어 일파만파(一波萬波)로 번져 갔다.

심지어 정사마천궁주가 바로 만보공자의 화신이란 말까지 떠돌았다.

황소 뒷걸음치다가 쥐 밟는다고…

이 소문은 말을 만들어 내기 좋아하는 이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으나,

어쨌든 간에 사실이 아닌가?

월녀개(月女愷).

그녀는 오늘도 성루(城樓)에 올라 광막한 벌판을 지켜보고 있었다.

냉한웅, 아니 소걸군이 새외로 떠난 후 매일매일 같은 일과(日課)였다.

강호제일화의 영예 따윈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소걸군의 관심을 끌기 위한 행동이었을 뿐.

하지만 그가 떠났으니, 이것마저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소월선부(少月仙府)가 우릴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어서 돌아와 줘.'

하염없이 지평선을 응시하는 그녀의 양 뺨에 눈물이 방울을 이루며 굴러 내렸다.

'소걸군이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생각하고 있다면 이러진 않을 거야.'

당장이라도 저 벌판을 가로질러 찾아나서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마다

그녀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정사마천궁주가 기다리라고 했어. 틀림없이 월녀개를 찾아올 거라며.

그런데 정사마천궁주… 바로 그 사람이 소걸군이잖아.'

그녀는 소걸군을 껴안 듯 그가 준 마영절개(魔影絶 )의 비급을 꼬옥 품었다.

'자기 입으로 말했으니까, 반드시 지킬 거야.'

이 때 돌연, 지평선에 나타난 한 점.

그녀는 얼른 눈물을 훔치며 안력을 돋구었다.

그러나 물기가 남아 가물가물하자, 다시 씻어 내리며 발꿈치를 들어올렸다.

대체 내려다보는데 높이가 무슨 상관인가?

너무 멀어 제대로 보이지 않자, 그녀는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했다.

하나 달려갔다가 다른 사내일 경우 그 실망감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왜 빨리 안 걷는 거야? 기어도 저것보다는 빠르겠다."

그녀는 성루의 기둥을 작은 두 주먹으로 콩콩 두드리며 몸부림을 쳤다.

이윽고 확실한 형태가 그녀의 두 눈동자에 어렸다.

누덕누덕 기운 웃차림의 비쩍 마른 거렁뱅이.

여유 있게 퉁소까지 불며 느릿느릿 황소걸음으로 오고 있는 그는 틀림없는 소걸개가 아닌가.

시선이 마주치자, 거렁뱅이가 입술에서 퉁소를 떼며 낭랑히 목청을 돋우었다.

돌아가련다.
고향의 밭과 산이 황폐해지려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요.
이제껏 자신의 존귀한 정신을 천한 육체의 노예로 삼았음을,
어찌 슬퍼 탄식하여 홀로 서러워하리.
지나간 인생은 후회해도 이미 쓸데없음을 깨달아,
장래 인생을 쫓아갈 수 있음을 알았네.
실상 내가 인생길을 헤매인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았나니,
지금이 바른 삶이요, 어제까지 그릇됨을 알았네.
고향 가는 배는 흔들흔들 움직여 가볍게 흔들리고,
바람은 솔솔 옷깃에 불어 온다.
길손에게 고향이 얼마나 머냐고 물어 보며,
새벽빛 아직 희미하여 길 떠나지 못함을 한스러워한다.
마침내 우리 집 대문과 지붕을 보고 기뻐서 뛰어갔네
하인들 기뻐 마중 나왔고,
아이들은 대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네.
집 마당의 세 줄기 오솔길은 황폐했으나,
소나무와 국화는 나를 반기어,
아이 손을 잡고 방에 들어가니,
향기로운 술이 가득 독에 담겨 있네.
항아리와 잔을 끌어당겨 혼자 마시며 웃고,
마당의 나무 보고 또 한 번 웃음 짓노라.
남쪽 창가에 기대어 내키는 대로 움직이고,
무릎 겨우 들어갈 좁은 방이라도 편안히 있음을 알았네.
동산은 날마다 취향 있는 경치로 바뀌고,
대문은 달았으나 언제나 닫힌 채로다.
지팡이 짚어 늙은 몸 부축하여 걷다가는 쉬고,
때때로 머리 들어 주위를 살핀다.
구름은 산굴 속에서 나와서는 흘러가고,
새는 날기가 싫어져 둥지로 들어가네.
저녁 햇빛 그늘져 서산에 지려 하고,
나는 마당의 외솔을 쓰다듬으며 거니네.
돌아가련다.
세상 사람과 교유를 끊고, 
세상과 나는 서로 잊고 말지니.
다시 관리가 된들 거기 무슨 구할 것이 있겠느뇨.
친척과 정겨운 이야기를 나누며 기뻐하고,
거문고와 책을 즐기며 시름을 지우련다.
농부가 찾아와 내게 봄소식 알려 주누나.
이제는 서쪽 밭에 갈이를 시작하자.
어떤 때에는 장식한 수레를 명하고, 
어떤 때는 한 척의 배를 노 저으리니.
작은 배 저어 깊은 시내 골짜기를 찾아가고,
장식한 수레 타고 험한 언덕 나아가리라.
길가의 나무는 생기 있게 자라고,
샘물은 졸졸 흘러가네.
모든 만물 봄을 기뻐 맞이하고,
내 생은 곧 사라짐을 느끼네.
아, 그저 그런 것인가?
육체가 이 세상에 깃드는 것이 얼마 동안이리요.
어찌 마음이 명하는 대로 생사를 운명에 맡겨 두지 않으며,
어찌 이제 와 덤벙거리며 어디로 가려 하는가?
돈도 지위도 내 바라는 바 아니요,
신선의 세계도 기약할 수 없네.
따뜻한 봄볕을 그리워하여 홀로 산과 들 거닐고,
지팡이 세워 두고 밭의 풀을 뽑는다.
또는 동편 언덕 올라가 느긋이 시를 읊고,
맑은 강물 흐르는 곳에서 시를 짓는다.
하늘에 맡겨 죽으면 죽으리니,
천명을 즐기며 살면 그뿐, 
근심할 일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뭐가 어쩌구 어째? 천명을 즐기며 살면 그뿐, 근심할 일 아무 것도 없다구?"

월녀개의 신형이 화살처럼 성루 아래로 쏘아졌다.

"이 세상에서 제일 나쁜 놈아!"

환희와 분노, 그리고 정열….

그것들의 공통점은 뜨겁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대로 부딪치면 사망(死亡),

아니면 불구를 면치 못할 엄청난 기세로 냉한운의 품속에 떨어져 내린 것이다.

그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동귀어진(同歸於盡) 수법이 아닐까?

삘릴릴리… 삘릴릴…!

마정소도 천상(天上)에서 연주하는 듯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음률을 발했다.

정사마천궁(正邪魔天宮).

천하사대금역(天下四大禁域) 중 한 곳인

무산삼협(巫山三峽)의 단명곡(斷命谷)에 자리잡은 후 날로 성세를 더해 갔다.

지금 그리 좁지 않은 입구가 제대로 운신하기 어려울 만큼이나

많은 무림고수들로 메워져 있었다.

이들 중 맨 앞쪽엔 정사마천궁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양대호법(兩大護法).

전(前) 혈살방(血殺幇) 방주 혈살신마(血殺神魔),

전(前) 잔인교(殘忍敎) 교주 잔인사황(殘忍邪皇).

사대밀령주(四大密令主).

천살령주(天殺令主) 패천군(覇天君) 뇌웅(雷雄),

천신령주(天神令主) 지옥야차부주(地獄夜叉府主)인 무면자(無面子),

천기령주(天機令主) 천수장주(千手莊主)인 천수제갈(千手諸葛) 유연(兪蓮),

천독령주(天毒令主) 백골방주(白骨幇主)인 백골마제(白骨魔帝).

백골마제는 전(前) 천독령주,

즉 낙락원주로 행세하다 냉한웅에게 죽임을 당한 독령제(毒靈帝)의 후임이었다.

"천존의 능력이 신과 같음은 알지만, 

새외 문파들을 상대하려면 의외의 어려움이 적지 않을 게요.

날짜와 시각까지 정해 약속한 것은 무리 아니겠소?"

백골마제의 물음에 천수제갈 유연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천존의 약속은 절대적이외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켜질 것이오."

그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지옥야차부주 무면자를 바라봤다.

"본 영주도 사실 몹시 궁금한 것이 있소이다.

소문에 의하면 천존께서 만보공자라던데, 천존의 원래 모습을 뵌 적이 있긴 하지만…?"

어느 정도 확신은 있었으나 물증이 없는지라, 그는 말꼬리를 연속으로 흐리며 압박을 가했다.

무면자는 가슴이 뜨끔했으나 별호가 얼굴 없는 사나이 아닌가?

"정녕 천기령주의 눈은 속일 수가 없구려. 하지만 본 영주도 심증뿐이니, 확답하기가 난처하오이다."

유연은 괘씸한 생각이 들어 그를 흘겨보았다.

천기령주의 눈은 속일 수가 없다는 말은 긍정의 뜻이니,

사실로 드러난다면 정직한 대답을 한 것이다.

그러나 뒤에 덧붙여 심증뿐이라 하여 아닐 수도 있다는 의혹을 불러일으키니,

들으나마나 한 대답이었다.

'천신령이 천기령보다 더 천존 가까이 있음을 내게 과시하는 건가?'

백골마제도 같은 생각인지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뇌웅이 재빨리 끼여들어 얼버무렸다.

"천존께서 나타나시면 자연히 알게 될 일이오. 조금 먼저 안들 무슨 소용 있겠소?"

뇌웅은 사대영주들 중 가장 연장자였다.

그가 나서자, 세 명의 영주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후 굳게 입을 다물었다.

이런 침중한 분위기를 깬 것은 맞은편 봉우리에서 들려 온 북소리였다.

둥둥둥둥- 둥둥둥-!

일곱 번의 북울림을 들은 무면자가 빠르게 외쳤다.

"천존께서 오셨으니, 맞이할 준비를 하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냉한웅의 모습이 입구 근처에 나타났다.

선풍옥골(仙風玉骨)의 절세미남.

비단에 금실로 수놓은 화복(華服)을 입고 각종 보석들로 장식된 요대(腰帶),

수중에 쥐고 있는 백옥섭선 등 현란하기 그지없는 차림새….

이런 그가 만보공자(萬寶公子)임을 의심할 이는 아무도 없으리라.

"와… 와아…!"

단명곡을 무너뜨릴 듯 터져 나오는 함성과 함께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태사의가 냉한웅을 향했다.

"천존의 무사(無事) 입궁(入宮)을 감축(感祝)하오이다."

사대영주가 직접 네 귀퉁이를 떠받치는 장대 한쪽씩을 어깨에 얹은 전대미문의 환영식이었다.

태사의가 냉한웅의 등 뒤에 놓여진 순간, 혈살신마와 잔인사황이 태사의 좌우에 섰다.

아마도 호법을 서기 위해서리라.

냉한웅은 그들에게 미소를 지어보이며 털썩 앉았다.

순간, 그의 안색이 변했다.

"윽!"

무엇인가 뾰족한 물건이 위로 치솟아 둔부를 찌르는 게 아닌가?

거와 동시에 혈살신마의 소맷자락이 번뜩었다.

안쪽에 숨겼던 비수가 냉한웅의 목줄기를 노린 것이다.

냉한웅이 반대편으로 몸을 비튼 순간, 잔인사황의 묵장(墨掌)이 그의 천령개를 내리쳤다.

청천벽력(靑天霹靂)도 유분수지….

냉한웅이 그 누구보다도 믿을 수 있다고 여겼던 그들이 아니던가?

냉한웅의 목은 비수에 삼분의 일쯤 베어져 나갔고,

머리는 깨어져 일부 뇌수(腦髓)가 드러나 보일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피부도 어느 새 푸르뎅뎅하게 변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극독에 중독된 것이 틀림없었다.

태사의 바닥에 장치된 독침에 의한 것이었다.

주도면밀한 음모(陰謀).

그는 비명 대신에 한 마디 말을 내뱉으며 숨을 거두었다.

"왜…?"

잔인사황이 죽은 그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으시시하게 웃었다.

"우리는 오랜 세월 천마존의 그늘에 가리워져 있었다.

또다시 너 같은 애송이에게 눌려 지내고 싶진 않아."

혈살신마도 가슴 깊이 감추어 두었던 분노를 토해 내었다.

"그 동안 살려 둔 것은 네놈이 우리를 천동비동에서 벗어나게 해 준 데 대한 보답이었다."

"천마존은 워낙 심기가 깊어 네놈에게만 천존비동의 출구를 가르쳐 주었지."

"아니면 우리는 우리는 벌써 튀어나와 중원무림을 장악했을 것이다."

이들은 죽은 냉한웅이 아직 살아 있는 듯 계속 떠들어 댔다.

정사마천궁주가 다른 이도 아닌 수하의 음계(陰計)에 걸려 죽다니….

너무도 의외였고, 순간적으로 저질러진 일이라 사대밀령주도 속수무책이었다.

넋 나간 듯한 표정으로 이 모든 일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이는 뇌웅이었다.

"너희 두 놈을 천 배, 만 배, 더 고통스럽게 죽여 버릴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