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하늘의 道]

제1장 하늘이시여 4

오늘의 쉼터 2016. 5. 24. 23:51

제1장 하늘이시여 4




 소옥은 부엌방으로 들어가 웅크리고 앉았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상처 난 짐승처럼 측은한 마음이 들게 하는 김식이지만 그에게는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야성과 기백이 있었다.

기방을 드나들며 술의 힘을 빌려 치근덕거리는 여느 남정네와는 달랐다.

김식은 용광로 속의 벌건 쇳물처럼 가슴이 불덩어리 같은 39세의 헌헌장부였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서면 화상을 입을 것 같았다.


  소옥은 두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과천의 기방에 들어온 이후 사내를 보고 지금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기는 처음이었다.

이중이 과천 기방을 거쳐 스승인 김식의 집으로 가는 날 그를 만났을 때도 이처럼 가슴이

콩닥거리는 않았었다.

소옥은 헌거롭게 생긴 김식을 본 순간부터 그의 매력에 휘둘려버렸다.


  그러나 소옥은 어느 날 갑자기 김식과 헤어져야 할 임시 소첩일 뿐이었다.

이중의 명을 받아 김식이 이중의 별채에서 숨어 있는 동안 손발처럼 시중들고 병간하는,

서울에 본처가 있는 그와 평생을 함께 할 수 없는 임시소실일 뿐이었다.
 
  소옥은 서울 밖으로 내팽개쳐진 자신의 운명을 떠올렸다.

아버지가 연산군 때 좌의정 신수근의 사가에서 사인(舍人)으로 있을 때만 해도 자신이

과천의 기방에 나갈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소옥의 운명은 박원종(도총관, 정2품)이 거사를 주도한 날 밤부터 바뀌어져버렸다.

박원종이 스스로 반정의 우두머리가 되어 부총관 성희안(부총관, 정2품), 유순정(이조판서, 정2품),

박영문(군기시 첨정, 종4품), 신윤무(군자감 부정, 정3품), 홍경주(사복시 첨정, 종4품) 등과

모의하여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진성대군(중종)을 옹립하는 이른바 중종반정(中宗反正)을 일으켰던

것이다.


  연산군의 처남이자 진성대군의 장인이기도 한 신수근은 결코 박원종의 살생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연산군의 비호 아래 승승장구했던 신수근이 거사가 성공한 후에도 중종의 장인 행세를 하며

또 다시 권세를 누린다면 언젠가는 박원종을 맹주삼아 뭉친 훈구파의 적이 될 터였다.
 
  연산군이 폐위되기 몇 시간 전, 소옥의 아버지 김만교는 좌의정 신수근의 사가로 야근을 하러

가는 길이었다.

사인으로서 원래 집사 노릇을 하는 것이 소임이었지만 김만교는 신수근의 신임이 워낙 두터워

밤에도 부르면 달려가 책사 노릇을 했다.


  그런데 김만교는 신수근의 사가에 이르러 놀라운 일을 목도하고 말았다.

신수근이 솟을대문에서 나와 말구종을 앞세우고 행차를 서두르고 있었다.

초저녁의 시각에 관복을 입고 급히 행차한다는 것은 조정에 변괴가 발생했거나

명패를 들고 온 별감(別監)의 전언이 아니라면 보기 드문 일이었다.


  김만교는 본능적으로 길가 둑 밑으로 내려가 동태를 살폈다.

맞은편 숲 속에서는 재갈을 물린 말이 한 사내가 고삐를 잡아당길 때마다 머리를 흔들며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서너 명의 사내가 허리를 구부린 채 매복을 하고 있었다.

고삐를 잡아당기는 사람은 군자감의 두 번째 우두머리 신윤무였다.

김만교는 신윤무를 여러 번 보았으므로 단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며칠 전 밤에도 꾀가 많고 임기응변이 뛰어난 신윤무가 신수근의 사랑채로 박원종을 안내하여

두 대감이 장기를 두게 하였던 것이다.

단순한 장기가 아니라 박원종이 신수근의 마음을 떠보기 위한 수작이었다.

박원종의 목소리는 원래 커서 사랑채 밖에까지 또렷이 새어나왔는데,

장기를 두면서 박원종이 신수근에게 장기판에 놓인 두 궁을 바꾸자고 하자,

신수근이 박원종의 야심을 간파한 듯 '내 머리를 베라'는 진담 반 농담 반의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그때 박원종 대감이 두 궁을 바꾸자고 한 것은-.'
 
  김만교는 소름이 끼쳐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이윽고 신윤무가 수신호를 하자마자,

숲 속에서 튀어나온 한 역사(力士)가 신수근을 향해서 철퇴를 휘둘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신수근은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말구종이 대들자 그에게도 가차 없이 철퇴가 내리꽂혔다.

철퇴를 휘두른 역사는 신윤무에게 돌아와 '나으리,

두 놈 다 단번에 골수를 뽑아내 숨통을 끊어놨습니다요' 하고 아부를 했다.

그러자 신윤무는 '신수영을 쳐 죽이고, 임사홍을 쳐 죽이고, 신수근마저 쳐 죽였으니

네 공이 크다'고 역사의 어깨를 두드려준 뒤, 타고 있던 말의 재갈을 풀고 천천히 어디론가 사라졌다.


  철퇴를 든 역사의 얼굴이 달빛에 드러났을 때, 김만교는 큰소리를 지를 뻔했다.

신수근을 참살한 역사는 소싯적부터 한 마을에서 산 이조(李藻)였다.

성장한 후에는 서로 포교가 되어 밥벌이를 했으나 이조는 훈련원으로 가고, 김만교는

포교생활이 체질에 맞지 않아 신수근의 사인으로 일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조의 의복은 신윤무가 격려한 대로 연달아 세 사람을 철퇴로 참살하였는지 피가 묻어 번들거렸다.


  김만교는 겁이 나 혀가 굳어버린 듯 한 마디의 소리도 지를 수 없었다.

어지럼증으로 갑자기 온몸이 풀리고 눈앞의 정경이 심하게 흔들렸다.

그래도 밤이슬에 젖은 풀잎을 쥐어뜯듯 붙잡고서 겨우 정신을 놓지 않을 수 있었다.


  이조는 머리가 으깨져 죽은 신수근과 하인의 시신을 발로 툭툭 건드려보고 난 뒤

사내들을 데리고 그 자리를 떠났다.

김만교는 이조가 떠난 뒤 바로 혼절해 버렸다. 김만교가 삼경의 귀뚜라미 소리에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시신이 다 치워지고 신수근의 집은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다.

이제는 하인들도 서로 눈치만 볼 뿐 두려워하며 김만교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김만교는 다음날까지 텅 빈 신수근의 집을 지키다가 박원종의 사가로 끌려가서 곤장을 맞았다.

도망친 사람들의 행선지를 불라 하고 감춘 재물을 내놓으라고 족쳤던 것이다.

소옥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김만교는 곤장을 맞아 황천객이 됐을지도 몰랐다.

소옥이 아버지 친구였던 이조를 찾아가 통사정을 하여 겨우 풀려났기 때문이었다.
    

  소옥이 이조의 집을 찾아 갔을 때까지도 이조는 자신의 공(功)을 나타내려고

피 묻은 얼굴을 씻지 않은 채 피로 얼룩진 의복을 입고 있었다.

곤장을 수십 대 맞고 집으로 돌아온 김만교는 장독이 올라 죽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이후 김만교는 장독의 염증이 뼛속까지 번져 몇 년 동안이나 사립문 밖을 나서지 못했고,

소옥은 아버지 약값을 벌기 위해 과천의 기방에 나가 잔심부름을 하며 그곳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박원종 일당에게는 권력을 탈취하기 위한 거사였지만 소옥의 가족에게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다. 소옥의 운명이 처자에서 기녀로 바뀌어져 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소옥이 기방에 나갔다고 해서

처음부터 기녀(妓女)가 된 것은 아니었다.

소옥은 기녀들의 허드렛일을 하면서 집에 간간히 들러 아버지를 병간하곤 했다.

아버지가 드러눕자 어머니마저 시름시름 앓다 죽었으므로 집안에 병간할 사람이라고는

그녀밖에 없었던 것이다.
 
  소옥의 가슴은 새벽녘에야 가까스로 진정이 되었다.

콩닥거리던 가슴이 아궁이 속의 식은 재처럼 차갑게 변했다.

소옥은 날이 더 새기를 기다렸다가 개울물로 세수를 한 뒤, 이중의 본채로 갔다.

생원마님이 부엌데기 하인에게 내린 특별한 지시가 있었으므로 언제든지

필요한 곡물과 반찬거리를 얻어올 수 있었다.


  소옥은 일찍이 아버지의 장독을 치료한 경험이 있어 장독에 영험한 음식물을 잘 알고 있었다.

소옥은 부엌데기에게 호두열매와 소금에 절여 둔 매실과 감자와 파를 구해 가져오라고

부탁한 다음 별채로 왔다.


  소옥은 마당 끝으로 나와서 뒷짐을 지고 글을 외우는 김식을 보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김식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맹자〉를 외우고 있었다.

김식은 숯쟁이 토담집에서 만났던, 나라에서 버림받은 산적들이 떠올라

맹자가 양혜왕(梁惠王)에게 한 말을 외우고 있는 중이었다.
 
  〈일정한 생업에 의한 일정한 소득(恒産)이 없어도 항상 불변하는 양심(恒心)을

지닐 수 있는 자는 오직 선비뿐입니다(無恒産 而有恒心者 惟士爲能).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일정한 생업에 의해 일정한 소득이 있어야 생활의 안정을 얻을 수 있고,

그래야 마음이 언제나 편안해서 양심을 잃지 않게 마련입니다.

백성들은 일정한 소득이 없으면 언제나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없으며, 생계에 얽매여 방황하다가

타락의 길로 들어서 방탕 편벽 사악 사치 등을 가리지 않고 죄를 저지르게 마련입니다.


  (…) 위로는 부모를 섬기기에 부족하고 아래로는 처자를 먹여 살릴 수가 없어 풍년이 들어도

고생을 면치 못하고 흉년이라도 들면 굶어 죽음을 면할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모면하기에도 힘이 모자라는 판국에 어느 겨를에 예의를 닦고 의리를 행할 수 있겠습니까.

왕께서 어진 정치를 펴고 싶으시다면 왜 그 근본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으십니까.〉
 
  소옥은 〈맹자〉를 배우지 못했지만 지금 들리는 것이 〈맹자〉의 구절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소학〉과 〈맹자〉를 좋아하여 마음에 드는 구절을 가끔씩 소옥에게도 들려주던 것이다.
 
  〈왕의 푸줏간에는 푸짐한 고기들이 많이 걸려 있으며 마구간에는 살찐 말들이 매여 있는데,

한편으로 백성들의 얼굴에는 굶주린 기색이 역력하며 들에는 굶어 죽어간 시체들이 널려 있습니다.


  짐승은 마구간에서 살쪄 있는데 사람은 굶주리고 또 죽어가고 있다는 것은 마치 짐승을 몰아다

사람을 먹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짐승이 짐승을 잡아먹는 것조차 사람은 그것을 미워하거늘,

백성의 부모가 되어 정치를 행하는 것이 겨우 짐승을 몰아 사람을 먹게 하는 것과 다름없다면

백성의 부모 된 보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부엌데기가 바구니를 이고 올라와서야 소옥은 별채 마당으로 들어섰다.

소옥을 본 김식이 말했다.


  "아침 일찍 어디를 다녀오는 길인가."


  "생원 어른 댁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저 아이가 이고 있는 것은 무언가."


  "소첩이 약에 쓰려고 급히 구한 것들이옵니다."


  "약에 쓴다고? 내 약에 쓴다는 말인가."


  "그렇사옵니다."


  "허허허. 올곧은 선비에게만 항심(恒心; 양심)이 있는 줄 알았더니 네 마음도 비단결 같이 곱구나."


  "아니옵니다. 특별한 약재가 아니옵고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옵니다."
 
  부엌데기가 놓고 간 바구니 안에는 감자 대여섯 개와 파 한 단, 그리고 호두 한 되와 호리병에 든

매실 초와 매실을 소금에 절인 오매 한 사발이 들어 있었다.


  김식은 별채 마루에 앉고 소옥은 선 채로 바구니에 담긴 것들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소첩은 일찍이 장독으로 고생한 아버지를 병간한 적이 있사옵니다.

이 호두알을 잘게 깨어서 약주에 타 드시면 차도가 빠를 것이옵니다.

매실도 장독에 효험이 있사옵니다. 매실 초를 마셔도 되고, 매실을 태운 가루를

환부에 발라도 좋사옵니다.

특히 소금에 절인 매실을 오매라고 하온데 오매를 태워 가루를 바르면 출혈을 멈출 수 있사옵니다.

장독으로 오른 부기는 감자를 짓찧어 바르면 그만이고, 파 머리를 빻아 환부에 바르면 멍든 살이

부드러워지고 염증이 빨리 가라앉사옵니다."


  "그렇다면 이것들로 나를 치료하겠다는 것이냐."


  "소첩의 아버지를 병간한 경험이 있사오니 나으리께서 저를 믿어주신다면 날마다

정성을 다해보겠사옵니다. 사흘만 지나면 차도를 느끼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왜 너를 믿지 않겠느냐. 다만."


  "다만 무엇이옵니까."


  "네 정성을 받는다는 것이 부끄러워지는구나."


  "아니옵니다. 생원 어른의 각별한 지시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나으리를 모시고 있다는 것이

생시인지 꿈인지 모르겠고 그저 영광스러울 뿐이옵니다."


  김식은 청매처럼 맑고 향기로운 소옥이 마음에 들었다.

동지들을 생각하면 할수록 참담해지곤 하던 자괴감이 소옥을 바라봄으로 해서 봄눈처럼

녹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겨울에 비치는 햇살처럼 따듯하고 밝은 소옥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리와 너도 앉거라."


  "훤한 아침인데 어찌 소첩이 나으리와 자리를 나란히 하겠사옵니까."


  "허허허. 예의가 밝으니 의리도 깊겠구나."
 
  김식은 문득 소옥의 아비가 궁금했다.

아전 같은 미관말직에 봉직하고 있지만 당상의 벼슬아치보다도

고상한 인격의 서민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네 아비는 누구인가."


  "좌의정 대감 사가에서 사인으로 일하다 도총감 나으리의 사가로 끌려가

곤장을 맞고 드러눕게 되었사옵니다.

지금은 연로하시어 밭일을 하며 소일하고 계시옵니다."


  "좌의정이라니, 어느 대감을 얘기하는 것인가."


  "신수근 대감이옵니다."


  김식은 신수근을 잘 알고 있었다.

누이가 연산군의 비이고, 딸이 진성대군의 첫 부인으로 연산군 때 세도를 부린 위인이었다.

그런데 김식 등 기묘 사림 중에는 신수근을 그리 나쁘게 보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연산군의 패도를 보고 직언하지 않은 것은 신하답지 못한 일이나, 실제로 박원종이

그를 포섭하려고 찾아가 '누이와 딸 중에 누가 더 중요한가?'고 물어오자,

 '세자가 총명하니 지금 임금이 난폭해도 걱정이 없다'고 대답했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이때 신수근이 박원종의 제의를 연산군에게 고발했다면 역사는 또 한번 피를 불렀을 텐데

신수근은 비록 연산군이 난폭하지만 총명한 세자를 믿고 기다리자는 식으로 박원종을 무마했던 것이다. 어쩌면 신수근 자신도 연산군이 언젠가 폐주가 되고 선한 진성대군이 새 임금이 될 것을 내심 예견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러나 그는 심성이 잡된 무인들의 거사에는 동조하지 않았던 대신이었다.


  "신 대감도 억울한 면이 있지. 아니, 더 억울한 사람은 그대의 아버지가 아닌가.

사인이 무슨 죄가 있었겠는가. 아니, 사인의 딸인 그대가 무슨 죄가 있었겠는가."


  "저희 가족의 억울함을 알아주시니 소첩은 이제야 한이 풀리는 것 같사옵니다."


  "정말 그리하느냐."


  "네."


  김식은 손을 뻗어 소옥을 마루에 앉힌 뒤, 자신의 팔로 소옥의 등을 감쌌다.

김식의 팔에 안긴 소옥은 이부자리를 둘러쓴 것처럼 포근했다.

대장부의 팔에 안겨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호사스런 가마를 타고 있는 듯했고,

신분을 초월하여 김식의 여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며칠 동안.


  소옥은 꿈결처럼 달콤한 시간을 보냈다. 이삼일 전에는 김식과 잠자리를 함께 하며

땀을 비 오듯 쏟으며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누기도 했다. 말 그대로 소옥은 김식의 여자가 되었다.

이제는 김식의 방을 청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대로 들락거리며 병간을 했다.

소옥이 가져온 부엌의 약재만으로도 김식은 완쾌되어가고 있었다.


  김식은 목을 죄는 듯한 망명의 긴장감에서 벗어나 멀리 산책을 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매화밭에서는 매화가 한창 꽃을 피우고 있었다. 홍매와 청매, 그리고 백매도 만개해 있었다.

매화가 사랑스러운 것은 한겨울을 이겨내고 꽃을 피우기 때문이었다.


  이중의 별채에 온 지 10여 일을 보낸 김식은 찬물로 세수하고 상투를 틀었다.

이중이 서울에서 내려와 별채로 오기로 한 날이었다. 김식은 주역의 팔괘를 풀어 주역 점을 보았다.

이제는 이중의 별채를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 할 것 같았으므로 앞날의 점괘를 보기 위해서였다.

첫판의 점괘에는 '가장 안전한 곳이 가장 위험하다'라는 것이 나왔다.

그러나 김식은 내일의 일을 하고 싶었으므로 다시 주역의 팔괘를 풀었다.
  

  이중은 아우인 이용(李庸)을 앞세워 올라오고 있었다.

이중은 마루에 앉은 김식을 보자마자 마당에 엎드려 큰절을 했다.

그러더니 크게 통곡을 했다. 너무 원통한 소리로 울부짖으므로 이용이 만류했다.

김식도 마당으로 내려와 거들었다.


  "이보게, 나는 지금 망명 중인 사람이네. 자네 마음을 어찌 내가 모르겠는가."


  "스승님, 원통하옵니다."


  "자네가 오면 내 여기를 떠나려고 했네. 그래, 서울 소식은 어찌 하던가."


  "남곤은 소인 중에서 영웅이 되어 날뛰고, 심정은 탐욕이 한이 없는 소인이 되어 있습니다.

조정은 이미 전하의 조정이 아니라 간흉하기 짝이 없는 그들의 조정이 되어 실로 위태롭기

그지없사옵니다."


  "아, 우리 임금님을 어이 할꼬."


  김식은 장탄식 끝에 서울 집의 소식을 들으려 했다.


  "서울 집 얘기도 들었는가."


  "일부러 그곳을 들르지 않았습니다. 체포령이 내려 있어 몹시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잘했네. 금부에서 나를 잡으려 혈안이 돼 있겠지.

여기도 안전한 곳은 아니지. 자네를 보았으니 내일이라도 떠나려고 하네."
 
  방 안으로 들어온 이중이 의외로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 김식에게 물었다.

이중은 김식이 주역의 팔괘로 점을 잘 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예전 서울에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도 가끔 주역 점을 쳐주곤 했던 것이다.


  "길흉을 점쳐 보니 어떠합니까."


  "팔괘를 방금 풀어 보았지. '산인(山人)이 일을 그르친다'고 나오네."


  "산인이라 하면 중을 말하지 않습니까."


  "중일 수도 있고, 중이 사는 절일 수도 있겠지."


  이중이 걱정스럽게 다시 말했다.


  "이신은 원래 중이니 산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품도 선하지 않은 것 같으며 게다가 사람이 많으면 어디 가서 용납되기 어려우니

먼저 내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기까지 함께 왔는데 어디로 보낸단 말인가."


  "일이 그르친다는 점괘를 다시 살피셔야 합니다."


  김식은 이중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점괘를 가지고 남의 마음을 의심하는 것은 불가하다."


  두 사람 사이에서 묵묵히 앉아 있던 이용도 강하게 반박했다.


  "큰일을 하는 자는 작은 인(仁)을 돌아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만일 그 자가 의심스럽다면 죽여서 말이 나오지 않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할 수 없이 김식은 이중 형제의 말에 따랐다.


  "양식을 후히 주고 은덕을 베풀어 좋게 이별하겠다. 이신을 불러오게나."
 
  이신은 이중의 행랑채에 머물며 말썽을 일으킨 모양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이중은 승려로 변장한 이신을 몹시 불신했다.

이신은 그 사이에 이중의 부인에게 꾸중을 듣기도 했는데,

종으로 팔려고 떠돌아다니는 동자를 유인하여 행랑채에 몰래 숨겨두었다가 들켰다는 것이었다.

김식은 이신이 불려와 앞에 앉자 부드럽게 말했다.


  "체포가 날로 급박해 오니 셋이서 동행하기가 어려운 형편이다.

그러니 여기서 나와 헤어진 후 다시 무주 오희안의 집에서 만나자구나. 알겠느냐."


  "그리 하겠습니다."


  이신은 이중 형제의 쏘는 듯한 눈길을 피하며 대답했다.

이신은 잘됐다는 생각도 했다.

이중의 집에 있기가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했는데 떠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후련했다.

특히 이중의 부인에게 우음산 앞에서 당한 수모를 생각하면 치가 떨렸다.


  '이 연놈들을 가만 두지 않겠다.'


  이신은 이를 갈며 길을 떠났다.

김식은 이신에게 노자를 후하게 주었지만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런 무거운 마음으로는 술맛도 나지 않을 것 같아 이중 형제를 일찍 내려 보내고 자리에 누웠다.
 
  소옥이 마련한 술상이 놓여 있었지만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소옥이 술상 옆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지만 김식은 누운 채 낮에 본 점괘를 떠올렸다.


  '산인이 일을 그르친다. 산인이라면 이신이 분명할 것이다.

이신이 그르칠 일이란 무엇인가. 사람을 의심하거든 쓰지 말고,

사람을 썼거든 의심하지 말라고 했지. 내 생각과 점괘가 다르니 알 수 없는 일이로다.'


  김식은 우두커니 앉아 있는 소옥에게 물었다.


  "산인이 일을 그르친다는 말을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대답하기 전에 소첩이 먼저 물어봐도 되겠사옵니까."


  "그래, 그것이 무엇인가."


  "점괘를 믿사옵니까."


  "주역을 수십 독(讀)한 내가 믿지 않으면 누가 믿겠는가."


  "그러 하오면 나으리, 산인이 일을 그르친다는 점괘를 믿으셔야 하옵니다.

소첩이 보기에는 이신의 얼굴이 몹시 어둡고 불길하게 보였사옵니다."


  "너도 이중 형제와 생각이 같구나. 그렇다면 하나를 더 묻겠다. 그르친다는 일은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지금 나으리께서 피신하는 일이 아니겠사옵니까."


  "허허허. 이신이 나를 배반한다는 말이구나."


  "그렇사옵니다."


  김식은 소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점괘 문제로 더 이상 머리를 무겁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김식은 소옥을 불러 옆에 눕게 하고는 그녀를 껴안았다.

소옥은 기꺼이 김식의 팔에 안겼다.

김식은 입김으로 관솔불을 끄고는 소옥의 치마저고리를 벗겼다.

그래도 소옥은 동면에 든 작은 너구리처럼 꼼짝을 안했다.

그러나 잠시 후 소옥은 김식의 거친 동작에 눌리어 작은 몸을 이리저리 파닥거렸고

간헐적으로 신음소리를 뱉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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