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하늘의 道]

제1장 하늘이시여 1

오늘의 쉼터 2016. 5. 24. 00:48

 <역사소설-정찬주 작>

제1장 하늘이시여 1


1520년 음력 12월.


  중종 15년, 동지를 넘긴 한겨울이었다.


  김 식이 기거하는 선산(善山)의 귀양살이 초가에도 눈보라가 사납게 몰아치고 있었다.

싸락눈으로 허옇게 변한 초가지붕 한 귀퉁이가 거센 삭풍에 뜯겨져 내팽개쳐졌다.

선산 관아에서 보내준 관노 아이와 유배지까지 함께 온 김 식의 집종 우음산(于音山)은 부엌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궁이 속의 재를 뒤적이며 얼굴을 처박고 불을 쬐고 있을 뿐이었다.
 
  김 식은 사립문이 열려진 마당 끝까지 나와 객을 기다렸다.

며칠 전에 관아의 소식을 전해주었던 객이 다시 오기로 했던 것이다.

객은 무술에 조예가 깊은 포교 출신이지만 무인답지 않게 사서삼경을 사숙하는 중인이었다.

그는 관아의 우보(郵報)를 손으로 베껴주고 삯돈을 받아 생계를 꾸려가는 초로의 홀아비였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를 덕로(德老)라고 불렀다.


  우보를 베끼는 일은 어느 정도 인품과 문식(文識)이 있어야만 가능했고, 관아의 수장은

그런 사람에게만 맡겼다.

우보에는 육조와 도의 명령이나 인사이동 등이 적혀 있어 객은 누구보다도 빠른 정보를 가질 수 있었다. 우보란 우관(郵官)을 통해서 중앙에서 지방으로 내려 보내지는 문서를 말했다.


  우박에 가까운 싸락눈이 김 식의 얼굴을 세차게 때렸다.

목덜미에 떨어진 싸락눈은 무명 홑저고리 속으로 파고들었다.

김 식은 넋이 반쯤 나간 듯 말뚝처럼 서서 꼼짝을 안 했다.

무명 바지 엉덩이 쪽에는 핏자국이 선명했다.

장형(杖刑)으로 찢어진 볼기짝이 짓물러져 피딱지가 벗겨질 때마다 피고름이 터지곤 했던 것이다.


  초가 담장 너머의 팽나무 가지에 앉아 있던 까마귀 한 마리가 갑자기 까악! 소리치며 날아갔다.

강 건너 멀리서 객이 오는 모양이었다.

사람을 보면 소리를 내지르며 허공을 한 바퀴 돌고 오는 까마귀였다.

해가 사라진 허공에는 싸락눈과 바람소리로 가득했다.


  김 식은 날카로운 까마귀 소리에 정신이 돌아온 듯 메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그의 목울대를 타고 넘어오는 것은 탄식이었다.
 
  '들불의 불길이 사방에서 닥쳐오니 장차 집도 나도 함께 모두 타버릴 수밖에 없구나.'


  김 식은 위기의식에 휩싸이곤 했다.

숨이 턱 막히고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사약을 마시게 하여 죽이는 사사(賜死)의 극형은 면했으나 자신에게도 죄를 가중시킨다는

소문을 객에게서 들었던 것이다.

시시각각으로 그의 목을 조여 오는 위험한 형국이니 들불의 불길이 사방에서 자신에게 닥쳐온다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종은 지난 가을 11월 19일에 조광조를 능주로, 김 정을 금산으로, 김 구를 개녕으로,

박 세희를 상주로, 박 훈을 성주로, 윤자임을 온양으로, 기준을 아산으로 귀양 보내

왕도정치(王道政治)를 꿈꾸던 젊은 사림을 풍비박산 내었는데, 그것도 분에 차지 않아

능주로 가 있던 조광조에게 사사의 극형을 내린 일이 있었다.

머잖아 누가 또 유배지에서 사약을 마시고 피를 토하며 죽어갈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필시 간인(奸人)들이 젊은 사림의 씨를 말리려 함이다.'


  김 식이 혼잣말로 외친 간인들이란 심정(沈貞)과 남곤(南袞), 홍경주(洪景舟) 등을 두고 한 말이었다. 훗날 세상 사람들 역시 중종을 이용하여 기묘년의 재앙을 불러일으킨 장본인들이라 하여 화매(禍媒)

라고 비웃었다.


  '지치(至治)란 정녕 꿈이었던 말인가.

왕도정치란 정녕 삼대(三代; 중국의 하, 은, 주의 세 왕조)에만 가능했단 말인가.

사림이 꿈꾸던 도덕정치가 한갓 이상이었단 말인가.

아, 나라의 정통을 새롭게 하려는 일이 이토록 요원하단 말인가.'


  나라의 정통을 새롭게 세우는 일이란 왕과 신하가 성리학의 군자가 되어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리는 것을 말했다.

어깨를 늘어뜨린 김 식의 퀭한 두 눈이 흐려졌다.

아무리 체념하려 해도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지난해 추관(推官; 취조하는 관리) 앞에서 꿇어 앉아 자복하기를

'권세를 쓰는 자리에 있지 않았으므로 인물을 발탁하거나 배제하는 일이 전혀 없었으며,

패거리(朋比)를 맺고 반대만 하는 습관으로 국론이 전도되고 조정을 날로 글러가게 하였다는 것은

신의 뜻이 아닙니다.'

하고 피를 토하듯 외쳤지만 중종은 오히려 추관들에게 엄하게 다스릴 것을 명했다.

〈대명률〉의 간당조(姦黨條)를 적용한다면 조광조, 김 정, 김 식, 김 구 등은 조정의 공론을 뒤집고

정사를 잘못되게 한 간당이라 하여 모두 목을 베고 처자를 종으로 삼으며 재산을 관에서 몰수하는

죄에 해당되었다.

또한 윤자임, 기준, 박 세희, 박 훈 등은 간당을 추종한 죄로 1등을 감하여 각각 장 1백대에다

유형 3천리에 처해져야 했다.


  중종이 기다렸다는 듯이 간인들의 손을 들어준 실로 어이없는 비극이었다.

대사헌 조광조, 대사성 김 식 등은 절규에 가까운 옥중상소를 올렸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모두 덜 되고 어리석은 것들이 좋은 때를 만나 경연에 참가하여 전하를 가까이 모셔왔사옵니다.

거룩한 임금만 믿고 어리석은 소견들을 털어놓다가 여러 사람들의 시기를 받게 되었지만 임금만

알았을 뿐 다른 것은 생각지도 않았나이다.

우리 임금을 요순 같은 임금 같이 되게 하자던 것인데 이것이 어찌 자기 일신을 위한 것이겠나이까.

하늘이 내려다보거니와 다른 마음은 아예 없사옵니다.

  신 등의 죄는 만 번 죽어도 마땅하지만 사화(士禍)가 한번 시작되면 장차 나라의 운명이

우려되지 않나이까.

대궐문이 가로막혀 품은 생각을 아뢸 길이 없사옵니다.

말도 못하고 영영 하직하자니 차마 못할 일이옵니다. 한번만 전하가 직접 신문하여 준다면

만 번 죽어도 한이 없겠사옵니다.

정은 넘치고 말은 중하여 할 말을 찾지 못하겠나이다.>
  
  돌변한 중종의 마음은 이미 그들을 떠나 있었다.

최측근의 시종이라 하더라도 언제든지 냉혹하게 내칠 수 있다는 것을 대신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중종은 늙은 대신들이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을 즐겼다.

겁 많고 나약한 왕이 아니라는 것을 천하에 알렸다.

왕이 된 지 실로 14년 만에 자신의 고집대로 왕명을 지시하는 쾌감이 등골을 서늘하게 적셨다.


  중종은 등골을 타고 흐르는 짜릿한 전율을 감추고 겉으로는 노기를 띠었다.

늙은 영의정 정광필과 좌의정 안당 등이 울면서 거듭거듭 중종에게 진언했지만

극형만은 면해 주었을 뿐 사림 모두에게 간당이란 누명을 씌우고는 임명장을 모두 빼앗고

장을 쳐서 유배를 보내라고 지시했다.


  '조광조 등의 죄를 율(律)에 적용하면 과연 사사해야 하겠으나 깊이 생각하고

또 대신의 말을 반복해서 생각하니 사사하면 놀랄 듯하다.

조광조 등 4인은 사형을 감해서 임명장을 다 빼앗고 장 1백대를 쳐서 먼 지방에 귀양 보내며,

윤자임 등 4인은 임명장을 다 빼앗고 장 1백대를 쳐서 속죄시키고 거주제한을 시킬 것이다.'


  중종은 거칠게 분노하는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요순의 임금 같은 천품을 타고 나지 못했다는 것을, 자신은 공자도 아니고 맹자도 아니라는

것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중종은 군자가 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러니 하늘의 도(道)를 닦아 지치를 펴서 요순의 임금이 되라고 날마다 밀어붙이는

조광조, 김 식 등과 갈라설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심성이 무르고 자리보전에 시달려 왔던 중종에게는 지치는 고사하고 재위 내내 부실했던 왕권을

지켜내는 일이 최우선이었다.

왕권을 갈망하던 중종에게는 성인군자가 되어 왕도정치를 펴라고 주장하는 조광조, 김 식 등은

떼어버리고 싶은 혹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힘없는 중종이 마음속으로 원했던 것은 왕도가 아닌 왕권이었다.
     
  까마귀가 다시 자지러지게 울고 있었다.

과연, 객 하나가 온몸에 싸락눈을 뒤집어 쓴 채 사립문 안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초립을 쓴 객이 크게 놀라며 말했다.


  "대사성 나으리, 날이 차갑사옵니다. 어찌 방에 계시지 않고 동토에 서 계시옵니까?"


  "덕로를 기다리고 있었소."


  "소인을 기다리시다니 황공하옵니다.

미관말직마저 떠나 외롭게 사는 소인의 얘기를 들어주시는 것만도 소인에게는 큰 영광이옵니다."


  "덕로가 있어 심중의 말을 주고받을 수 있으니

막막한 적거(謫居; 귀양살이) 중에도 얼마나 다행한지 모르겠구려."


  덕로란 늙은 객의 별호였다.

그는 자신의 별호를 불러주는 김 식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포교 출신인 자신을 알아주는 대사성 김 식 어른이었으므로 황공할 따름이었다.

방으로 들어와 김 식이 먼저 앉자 덕로가 엉거주춤하게 서서 보따리를 풀었다.

보따리 속에서는 술항아리와 왕소금이 뿌려진 자반고등어 안주가 나왔다.

덕로가 보자기 속에 술을 몰래 들여온 것은 귀양살이 초가에 술의 반입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화기(禍機)가 울타리를 건드리는 것 같소이다. 덕로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나으리, 이곳을 떠나 아무래도 피신하여야 할 것 같사옵니다.

유배지의 명현들에게 죄를 가중한다는 얘기가 또 들리옵니다."


  김 식은 말없이 덕로가 내민 술잔을 받아 마셨다.

피신은 임금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므로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덕로는 김 식을 믿고 스스럼없이 말하고 있었다. 김 식은 피고름이 묻어나는 엉덩이를

고쳐 앉으며 이번에는 자작으로 술을 들이켰다.

원래 술을 좋아하던 김 식은 아무 생각 없이 크게 취하고 싶을 뿐이었다.

덕로가 답답했던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대사성 나으리."


  "술이나 따르시오. 무얼 그리 걱정하시오. 간신들이 권력을 쥐고 있으니 해결될 일이 하나 없습니다."


  자포자기 상태에 휩싸인 김 식의 어깨는 힘이 빠져 있었다.

덕로는 그러한 김 식이 안타까웠다.

체념은 심신을 헤치기 마련이어서 김 식의 몰골은 이미 방에 드러누워 있어야 할 중환자나 다름없었다.


  "나으리, 간사한 놈들의 일이란 예측할 수가 없사옵니다.

그러니 그들 책략에 한갓 죽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사옵니까?"


  덕로는 인생 선배로서 김 식에게 충고하고 있었다.

그는 일찍이 폐주(廢主; 연산군) 때 이장곤이 유배 중에 몸을 피해 함경도로 도망갔다가

중중이 왕위에 오르자 복권되어 지금은 병조판서에 오른 것을 알고 있었다.

덕로가 심중에서 꺼내지 못한 속말은 '대사성 나으리, 병조판서 이장곤처럼 몸을 피하소서.'였다.

김 식은 세상을 원망하며 말했다.


  "세상이 어둡기 짝이 없는데 어디로 간단 말이오."
 
  덕로는 대답을 못했다. 창호에 그림자 하나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덕로는 무예를 익힌 포교답게 가슴에서 재빨리 단검을 빼어들고 문을 열어젖히며 소리쳐 말했다.


  "누구냐? 누가 방안의 말을 엿듣고 있느냐?"


  문 밖에는 얼굴이 홍시처럼 붉게 언 관노 아이가 발을 동동 굴리고 있었다.


  "쇤네이옵니다요."


  "네가 왜 거기 있느냐?"


  "눈이 내려 길이 막힐 것 같사옵니다요."


  김 식은 취해서 혀가 구부러진 소리를 했다.


  "음, 네 집이 저 산등이 너머에 있다고 했지. 그래, 길이 막히기 전에 가거라."


  "나으리, 우음산은 어데 있사옵니까?"


  덕로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코에 숯 검댕을 묻힌 우음산이 부엌에서 뛰어나와 두 손을 앞에 모으고

걸음을 멈추었다.

우음산의 키는 관노 아이의 두 배나 되었고 몸집은 우람했다.

김 식이 혀 꼬부라진 소리로 우음산에게 지시했다.


  "이 처사를 불러들이고 사립문을 단단히 닫거라. 오늘은 대취하고 싶느니라."


  "네, 나으리."


  "대사성 나으리, 이 처사는 또 누구이옵니까?"


  "갓끈 떨어진 나에게 글을 배우겠다고 찾아온 승려지요.

거절했더니 제자가 되겠다고 물러서지 않고 머리를 길러버린 사람이오.

오늘은 덕로께 이 처사를 소개시켜 드리겠소이다."


  김 식은 이 처사가 들어오기 전에 그를 간단하게 소개했다.

귀양살이 초가 옆에 흙집을 짓고 사는 그의 속명은 이신(李信)이었다.

그는 본래 낙안의 관노로서 심한 도역(徒役; 죄인에게 일을 시키는 형벌)을 피해 산중으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는데, 평소에 신분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맞이하는 김 식을 찾아와 제자 되기를

간청했던 천민이었다.


  "친자식처럼 성리학을 가르치고 있소.

조석으로 공부하는 것이 게으르지 않으니 머잖아 물리가 트일 사람이오."


  덕로는 이신이 낙안의 관노였다는 사실을 알고는 미심쩍어했다.


  "나으리, 한번 도망친 죄인은 또 도망친다는 것을 아셔야 하옵니다.

포교 시절에 여러 번 경험했사옵니다."


  "그렇지요. 배신을 한 사람은 또 배신을 하지요.

심정이 그랬고, 남곤이 그랬고, 홍경주가 끝없이 배신을 했습니다.

허나 이 화상은 그러지 못할 제자입니다."


  "왜 그러할 것이라고 믿사옵니까?"


  김 식은 술에 취해 크게 웃으며 말했다.


  "허허헛. 제자 되겠다고 찾아와 맹세했으니 스승인 내가 그를 믿지 않는다면 이 세상 누가 믿겠소."
     
   덕로는 비로소 경계를 풀었다.

주역(周易)에 달통한 김 식이 보증한다고 하니 마음이 조금 놓였다.

사실 사람을 보는 안목에 있어 김 식의 주역 점괘를 당할 위인은 없었다.

덕로의 의심은 오랜 포교 생활에서 발달된 육감 같은 것이었다.

그래도 덕로는 이신의 작은 눈이 마음에 걸려 자신의 신분을 끝내 감추었다.

이신은 쓸데없이 눈동자를 굴리며 쫓기는 사람처럼 두리번거렸다.

술은 주로 김 식이 마시고 덕로와 이신은 술잔을 입에 대는 시늉만 했다.


  "어디로 간단 말이오. 어디로… 허허헛."


  김 식은 덕로와 이신을 번갈아보며 헛웃음치고는 고개를 홰홰 저었다.


  "그럴 수는 없소이다. 그럴 수는 없어요. 전하의 명을 어찌 거역한단 말이오."


  김 식이 이신의 손을 끌어 잡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신아. 어디로 갈거나, 어디로 갈거나. 들불의 불길은 사방에서 달려오니 어디로 피할꼬.

오호라. 그렇지, 나를 용납해 줄 단 사람이 있으니 오직 영해부사(寧海府使)뿐이로구나."


  김 식을 숨겨 줄 오직 한 사람이란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까지 올랐던 이윤검(李允儉)을

두고 한 말이었다.

덕로는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피를 토하는 것처럼 탄식하는 김 식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흘러내렸다. 덕로는 심중의 말을 꺼내고 말았다.


  "나으리, 마땅히 틈을 타 피신하여 사세를 관망하옵소서.

죄를 더한다는 것이 임금님의 뜻에서 나왔다면 그때 죽어도 여한이나 없을 것이옵니다."


  덕로의 말에 김 식은 실성한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 갑자기 문무가 뛰어난 제자 홍순복(洪舜福)의

자를 불러 젖혔다.


  "자유(子緌)야, 자유야. 간신들을 너와 함께 제거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되는구나.

너는 지금 어디 있느냐. 너의 용맹이 그립고 그립구나."


  실제로 홍순복은 김 식의 제자 중에서 가장 용맹스러웠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그는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에 자신의 이름을 세 번째로 올렸고,

훗날 대신을 제거하려 한다는 모함을 받아 사형장에 서게 되었을 때 사형을 집행하는

감형관(監刑官)에게 노끈이 두 번이나 끊어지자

'그대가 왕명을 받들어 형을 감독하면서 어찌 썩은 노끈으로 사형수의 목을 맨단 말인가.'

하고 호통을 쳤던 제자였다.


  김 식이 선 채로 벽에 머리를 쿵쿵 들이받으며 울부짖었다.


  "흉악한 자들의 꾀가 불칙하니 나 김 식이라도 몸을 빼 달려가서 전하의 은혜를 갚는 것이

나의 소원이로다. 허허헛. 허허헛."


  "나으리."
 
  덕로와 이신이 합세하여 김 식을 부축했다.

김 식은 곧 큰 대자로 누워버렸다.

덕로는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며 취기를 다스렸다.

김 식이 강권하여 몇 잔밖에 마시지 않았는데도 정신이 몽롱했다.

덕로 자신도 대취한 김 식처럼 허허허 하고 맥없이 웃어젖혔다.

이신이 놀라며 물었다.


  "어르신도 취하십니까?"


  "이 처사, 어찌 말짱한 정신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인가.

미천한 몸인 나도 그러한데 그대 노천(老泉; 김 식의 자) 스승님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대 스승님을 잘 모셔야 할 것이네. 노천 스승님이 어떤 분이신가.

정암 부제학 나으리도 '김 식 같은 사람은 문사(文士) 중에서도 귀한 사람일 뿐 아니라

실상 얻기 어려운 사람이옵니다.'라고 임금님께 진계하지 않았던가."


  "어르신, 스승님의 옥체를 어찌 받들어 모셔야 합니까?"


  "가르쳐 주면 어찌 할 텐가."


  "이 천한 한 목숨을 바쳐 지키겠습니다."


  "맹세하겠는가?"


  이신은 무릎을 꿇고 이를 악물었다.

이신의 비장한 마음을 확인한 덕로는 가슴속에서 단도를 꺼냈다.

이신이 겁을 내어 물러서 있는 동안 자신의 약지를 자른 다음 그 피로 한 자 한 자 써내려갔다.


  -아무런 죄 없이 대사성 나으리께서 간신들의 손에 죽는 것을 어찌 차마 가만히 앉아서

볼 수 있겠는가.


  이신은 덕로의 기세에 눌려 가위 눌린 사람처럼 떨면서 말했다.


  "어르신, 스승님의 옥체를 어찌 받들어 모셔야 합니까?"


  "이곳을 지금 바로 떠나시게. 나으리께서 머리가 맑아지시면 이곳을 떠나지 못할 걸세."


  "어찌 그렇사옵니까?"


  "나으리께서는 왕명을 따르고자 이곳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할 것이네.

그러니 어찌해야 하겠는가. 마침 나으리께서 대취해 누웠으니 몰래 업고 도망가시게.

눈이 오고 있으니 관아의 포졸들이 감히 뒤쫓지 못할 걸세. 우음산은 힘이 세고 용감하니

능히 업고 멀리 갈 수 있을 것이네."


  덕로가 방문을 열고 밖의 동정을 살폈다.

인적이 끊긴 들판은 적막했다. 횡횡하는 것은 눈보라뿐이었다.

팽나무를 지키는 까마귀들도 죽은 듯 웅크리고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피신하기에 좋은 절호의 순간이었다.

귀양살이 초가를 감시하는 포졸의 순찰도 며칠 전부터 흐지부지되어 걱정할 것이 없었다.


  "어르신, 어디로 피신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지금부터는 나으리의 운명이네. 운명에 맡길 수밖에. 다만 아는 사람을 찾아가면

반드시 실패할 것이니 명심하게."


  이신은 엎드려 덕로에게 또 물었다.


  "스승님과 말벗이 돼주신 어르신의 존함을 알고 싶습니다."


  "그것은 알 것이 없네. 나 또한 거창 수도산으로 떠날 것이네.

거기에 무술에 달통한 도인이 사신다네. 나으리를 뵙고 미루어 왔던 일이지.

나에게는 더 연마할 무술이 있네. 인연이 되면 대사성 나으리를 또 만나는 정복(淨福)을 누리겠지."
     
  덕로가 떠나고 이신은 대취한 스승 김 식을 지켰다.

우음산은 부엌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었고, 굴뚝에서는 흰 연기가 산발한 노인의 머리카락처럼

산지사방으로 흩날리곤 했다.

이신은 방을 나와 우음산을 불러 말했다.


  "이곳을 떠나야 할 것이다."


  "이 추운 날 어디로 갑니까?"


  "가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떠날 채비를 하거라."


  이신은 머뭇거리는 우음산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우음산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 채지 못하고 엉뚱한 소리를 했다.


  "언제 돌아옵니까? 곧 돌아온다면 아궁이에 불을 더 들여야 방이 따뜻해질 것입니다."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이 처사님."


  "붙잡히면 너와 나 모두 죽는다. 그러니 멀리 도망치자는 것이야."


  우음산은 얼굴이 일그러지며 다시 물었다.


  "나으리는 어찌 하고 말입니까?"


  "어찌 너와 나만 살 수 있겠느냐. 나으리는 네가 업고 가야 할 것이다.

네 힘이라면 수십 리는 갈 수 있을 것이야."


  이신은 우음산의 옷가지까지 걸망이 볼록하도록 챙겼고, 우음산은 여러 켤레의 짚신을

새끼줄에 꿰어 허리에 찼다.

좀 전에 초가를 나섰던 덕로는 담 뒤에서 그들의 동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포교 때부터 인상을 보고 사람의 됨됨이를 판단하는 오래된 습성 때문이었다.

미덥지 못한 인상을 준 이신이 혹시 혼자서 도망치지 않을까 우려해서였다.


  '만약 네 놈 혼자서 도망치기라도 한다면 난 단숨에 네 목숨을 빼앗고 말 것이다.

그리하여 네 시체를 산속에 던져 주린 짐승들의 밥이 되게 할 것이다.'


  덕로는 돌담 아래로 몸을 낮췄다.

우음산이 대취한 김 식을 업은 채 서너 걸음 앞서 날렵하게 걷는 이신을 뒤따르고 있었다.

삿갓을 쓰고 걸망을 맨 이신은 영낙없이 승려의 행색이었다.

김 식을 업은 우음산이 눈보라치는 산모퉁이로 사라지고 나서야 덕로는 자리를 떴다.

김 식을 말없이 배웅하던 덕로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서너 방울의 굵은 눈물이 그의 깊인 팬 주름을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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