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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살아남은 자의 노래 1

오늘의 쉼터 2016. 5. 25. 11:05

제2장 살아남은 자의 노래 1




얼굴이 유난히 하얗고 키가 조그마한 30대 초반의 여인이 매정(梅亭) 마을 통시암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마을 뒷산 산자락이 매화 형상이라 해서 매정마을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여인은 다리도 아프고 목도 마르고 하여 샘가에 놓인 표주박으로 통시암 샘물을 떠 마셨다.

매정마을 앞으로 난 길은 두 갈래로 갈라지고 있었다.


  여인은 능주에서 하룻밤을 묵고는 쌍봉사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마침 물동이를 이고 물을 뜨러 온 아낙에게 여인은 길을 물었다.


  "쌍봉사를 가려면 어느 길로 가야 합니까."


  "저기 쌍봉마을을 끼고 가다가 산모퉁이를 두 번만 돌면 절이 보일 것이그만이라우."


  아낙은 경기도 말씨를 쓰는 여인에게 경계하는 눈빛을 보이더니 곧 사라졌다.

낯선 여인이 깊은 산중의 절을 찾아간다고 하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아낙에게 길을 묻지 않았더라면 여인은 매정 삼거리에서 보성 쪽으로 들어섰을지도 몰랐다.


  쌍봉사 가는 길은 동북쪽 골짜기로 나 있고, 구례마을을 지나 예재를 넘어가는 보성 길은

동남쪽 골짜기로 나 있었다.

중조산(현 계당산)은 능주와 보성을 경계 짓는 큰 산으로 많은 산자락과 골짜기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허공의 빗방울이 증조산 정상에서 바람에 휩쓸려 보성 쪽으로 떨어지면 보성강물에 섞였다가

섬진강으로 흘러들고, 능주 쪽으로 떨어지면 지석천을 거쳐 영산강으로 합류했다.


  매정의 삼밭들에도 커다란 고인돌이 듬성듬성 놓여 있었다.

능주를 지나오면서 여인은 반반한 거석(巨石)을 보아 왔지만

그것들이 고인돌이라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논밭을 불문하고 고인돌이 널려 있는 것은 능주 땅의 특징이었다.


  쌍봉마을을 지나자 골짜기가 갑자기 개미허리처럼 잘록하게 좁아졌다.

들이 사라지고 다랑이논들이 개울가 양편으로 계단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산모퉁이의 산길에는 벌써 산 그림자가 떨어져 여인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산길이 몹시 으슥하여 거친 산짐승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정암 어른이 돌봐주실 것이야.'


  여인은 쌍봉사에 가면 조광조의 혼이라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여인은 능주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주막 술청어멈에게 조광조의 시신이

쌍봉사 동편 은밀한 곳에 묻혀 있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이다.


  술청어멈의 얘기는 능주 고을 사람들이 모두 쉬쉬하면서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작년 초가을에 서울에서 낙향한 양팽손이 조광조의 시신을 손수 염한 뒤 능주 땅에서

가장 오지인,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쌍봉사에서도 오리쯤 더 들어가는 증조산의

그윽한 산자락에 묻어주었던 것이다.

그곳은 약초꾼 대엿 명이 화전을 일구고 사는 산촌이므로 조광조의 시신이

훼손당할 염려가 없는 산자락이었다.


  패기에 찬 32세의 양팽손이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극형을 받은 죄인의 시신을 수습하여 예를 갖추어 염하고 장사 지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능주 현감과 아전들이 묵인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능주 출신의 선비 양팽손이 아니라면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젊은 양팽손은 능주 백성들의 기대와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능주 출신으로서 생원시 1등 합격에다 문과에 급제한 선비는 양팽손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양팽손은 소싯적부터 두각을 나타냈는데, 7세 때 현감이 주최하는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였고

그해 가을 전라도 감사(종2품, 관찰사의 별칭)가 고을을 순회하면서 소년 양팽손을 불러

천지일월(天地日月)이란 제목으로 시를 지으라고 하자,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천지는 나의 도량이 되고
  일월은 나의 밝음이 된다.
  天地爲吾量
  日月爲吾明
 
  이에 감사가 크게 칭찬하며 '해학(諧謔)의 모습이요,

추월(秋月)의 정기(精氣)라 훗날 용문(龍門)에서 아름다운 이름을 크게 떨치리라'라고

격려문을 써주었던 것인데, 그 뒤 소년 양팽손은 양신동(梁神童)으로 불렸다.


  지금은 비록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삭탈관작 당하고 낙향한 양팽손이지만 한때는

경연에 나아가 중종과 국사를 논하던 대간으로서 사간원 정언(정6품)과 사헌부 지평(정5품)을

지냈으니 외직의 현감(종6품)이나 미관말직의 아전들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여인은 허공을 향해 돛대처럼 솟은 쌍봉사 3층목탑이 보이는 지점에서 잠시 심호흡을 했다.

작은 산모퉁이를 돌자 홀연히 솟아 있는 목탑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조광조의 자태처럼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여인은 떨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목탑을 덮은 기왓장들은 쌍봉마을 쪽으로 지는 석양을 받아

은은하게 난반사하고 있었다.

석양은 연화 불국토인 듯 대숲 아래 편안하게 자리 잡은 쌍봉사 전각들을 향해 금빛을 던지고 있었다.
 
  댕 댕댕-.
     
  골짜기를 타고 울려오는 범종 소리였다.

여인은 범종소리를 귀로 듣고 가슴으로도 들었다.

범종소리는 조광조의 목소리처럼 은은하게 여인의 가슴을 적시며 계곡물이 소용돌이치며

흘러가듯 여인을 휘돌아 더 멀리 퍼져 나갔다.

범종소리는 단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밤하늘의 별자리 숫자만큼 스물여덟 번이나

연달아 울려왔다.

여인은 어느 새 조광조의 혼을 만난 듯 가슴이 울렁거렸다.

조광조를 만나지 못해 애태우던 지난 십수 년 간의 한(恨) 덩어리가

한 켜 한 켜 대팻밥처럼 깎여나갔다.


  여인은 범종소리의 여운마저 사라지고 나자 비로소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참았던 눈물이 눈으로 코로 흘러나왔다.

여인은 개울로 내려가 수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하염없이 울었다.

비록 20대 초반에 조광조와 한 식경을 보낸 인연밖에 없지만 그때 그에게 마음을 다 주어버렸으니

몸은 껍데기에 불과하여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고 여겨 왔던 것이다.


  여인은 자신이 꽂고 있는 금비녀를 빼내어 맑은 개울물에 씻었다.

조광조의 손길이 스친 금비녀였다.

여인은 조광조가 그립고 외로울 때마다 금비녀를 꺼내 보고서는 스스로 위로했다.

금비녀에는 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한 조광조의 부끄러움이 아직도 배어 있었다.

용인의 한 주막에서 자신의 머리에 꽂고 있던 금비녀를 조광조의 집종에게 건네주었는데,

조광조는 부끄러워하며 그녀에게 다시 돌려주었던 것이다.


  여인은 쌍봉사 앞 무지개 돌다리 위에서 합장을 했다.

돌다리는 절 앞으로 흐르는 개울을 가로질러 있었고, 돌다리 너머 연못에는 돌거북이를 중심으로

둥그런 연잎들이 둥둥 떠 있었다.

이끼 낀 돌담 위로는 불두화 꽃잎들이 잔설처럼 하얗게 떨어져 다람쥐들이 나타나 꽃잎을 물고는

어디론가 쪼르르 달려가곤 했다.


  해탈문을 들어서자 장삼 위에 붉은 가사를 걸친 노승이 여인에게 다가왔다.

노승은 조금 전에 범종을 치고 경내를 한 바퀴 돌고 있었다.

법당과 목탑, 그리고 범종각은 울타리 같은 대숲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늦은 시각입니다. 공양은 했소이까."


  "죄송합니다. 쌍봉사를 찾아 용인에서 내려오는 길입니다."


  "용인이라고요? 이레도 더 걸렸겠습니다. 얼마나 고단하시오.

공양간에 아직 공양이 남아 있을 터이니 가서 저녁을 해결하시오."


  여인은 초행길이었으므로 열사흘 동안이나 걷고 또 걸었다.

여인을 맞이한 스님은 쌍봉사 주지 혜공(惠空)이었다.

삭발한 지 오래 된 듯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것으로 보아 적어도 50대의 나이로 보였다.

웅얼거리는 것처럼 가라앉은 목소리는 60대의 노승으로 느껴지게도 했다.


  "자, 보살이 머물 방을 정해 주겠소.

저 동암에는 학포 선생이 와 계시고,

저 백운암이나 백련암에는 머잖아 귀한 손님들이 올 것이라 하여 비워 두고 있소.

그러니 보살은 소승이 기거하는 주지실 옆 골방밖에 잘 자리가 없구려."


  "대사님, 고맙습니다."


  혜공의 말대로라면 귀한 손님들이 쌍봉사에 모여들 모양이었다.

도량이 말끔하게 청소된 것을 보면 쌍봉사에서 무슨 행사가 예정되어 있는 것 같았다.


  "절이란 부처님이 계신 다장(茶莊) 같은 곳이오.

그러니 누구나 차를 마시고 머물 수 있는 장소가 아니겠소."


  "절에는 스님이 몇 분이나 계신지요."


  "소승이 혼자 절을 지킨 지 오래 됐소이다."


  "이렇게 큰절에 혼자 계신다니 믿어지지 않습니다."


  노승은 돌아서며 말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그럴 만한 사연이 있지요.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래도 이곳 쌍봉사는 세조의 원찰이거니와

임금님의 지시가 내려와 방백(方伯)의 보호를 받고 있소이다."
 
  혜공은 능주까지 불어 닥친, 향교 교생들의 불상을 파괴하는 훼불과 승려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법란(法亂)에 고개를 저었다.

지방향교가 위세를 부리면서 불교를 핍박하는 배불이 공공연하게 자행돼 왔던 것이다.

절을 태우고 승려를 몰아내면 저절로 공맹(孔孟)의 세상이 열릴 것이라고 향교의 교생들이

촌민들을 선동하곤 했다.

공자를 맹신하는 항교 교생들의 만행이었다.


  실제로 세종 때 능주에서 향교 교생들이 재암(齋庵) 11곳을 불태워버린 사건이 있었다.

그것도 현령의 허가를 받아 재암을 불태워버린 사건으로 숭유(崇儒)를 표방하면서도

궐 안에 내불당(內佛堂)을 허가한 세종에게 노골적으로 반기를 든 사건이었다.

놀란 세종은 군정의 급한 일이 아닌데도 사건의 초기 진화를 시도했다.

자신이 궐 안에 내불당을 허락하자 능주의 백성들이 지방민으로서 가장 먼저 반발하고

동요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세종은 삼경의 늦은 시각인데도 의금부의 부진무(副鎭撫) 강맹경(姜孟卿)을 화급하게 불러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전라도 능성현의 교생 양회 등이 재암 11곳을 불태워 버렸다고 하니 이 무슨 변괴인가.

그대는 가서 국문하고 낱낱이 과인에게 보고하라."


  강맹경은 바로 말을 타고 능주로 달려가 조사한 뒤 세종에게 자세하게 아뢰었다.


  "신 감사가 사헌부의 관문(關文)에 의거하여, 역승(驛丞) 서구성(徐九成)으로 하여금

도내를 다니면서 재암을 새로 짓는 것을 금하게 하였는데, 구성이 능성에 이르러

향교 생도 양회(梁淮) 등의 공초를 가지고 말하기를 '만일 새로 지은 것이 있는데도

고하지 아니하면 죄를 받아도 벗어나지 못하리라.' 하니,

회 등이 평소 고을에 재암이 많은 것을 분하게 여겼으므로,

이에 현령 최추(崔湫)에게 고하여 불살라 없애기를 청하매 이를 허락해 주니

회가 무리를 이끌고 재암 11곳을 불살라 버렸는데 모두 새로 지은 것이 아닙니다.

추와 회 등의 저지른 죄가 가볍지 아니하므로 이미 주현(州縣)에 나누어 가두게 하였사옵니다."


  강맹경은 새로 지은 불법 재암은 태워버려도 죄가 되지 않은데,

이미 지어진 재암을 태워버렸으므로 죄가 가볍지 않다고 보고했던 것이다.

능주의 현령과 항교 교생 양회 등이 하옥은 됐으나 그들은 양심범 같은 대접을 받았고

그런 분위기는 중종의 기묘년까지 이어져 오고 있었다.


  혜공의 은사 도반이 탁발을 나갔다가 마을 주민들에게 몰매를 맞아 개죽음을 당한 사건도 있었고,

화적으로 위장한 향교 교생들이 쌍봉사에 들이닥쳐 협박을 일삼으니 승려들이 송광사나 화엄사 등

안전한 절로 떠나거나 환속해버린 일도 있었다.

그러니 자연 쌍봉사도 폐사의 지경에 이르렀으나 세조의 원찰이라는 명분과 혜공이 스스로 닦은

법력으로 절을 지키고 있는 셈이었다.
     
  여인은 저녁 공양을 하고 나와 주지실로 불려갔다.

주지실에는 조촐한 찻자리(茶席)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혜공과 마주앉은 사람은 30대 초반의 젊은 선비였다.

혜공이 말했다.


  "인사드리시오. 사간원 정언을 지내신 학포 선생이오."


  동암에 머물고 있다는 바로 그 선비였다.

여인은 양팽손을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일찍이 조광조에게 양팽손의 이름을 들었던 것이다.

양팽손이 12세 때 쌍봉사에서 사서삼경을 독학하였다는 얘기도 기억이 났다.

여인은 공손하게 양팽손에게 큰절을 올렸다.

그런 뒤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용인에 살고 있사옵니다.

일찍이 대감님을 흠모한 일이 있어 쌍봉사를 물어물어 찾아왔사옵니다.

어른을 뵙게 되어 광영이옵니다."


  "아니, 그대가 조 대감을 안단 말이오."


  "아주 오래 전에 맺은 인연이옵니다."


  양팽손은 몹시 놀랐다.

정실부인도 아닌 아녀자의 신분으로 조광조를 들먹인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능주에서 천리나 떨어진 용인에서 왔다니 숨겨진 사연이 없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쌍봉사에 무엇을 하러 온 것이오."


  "대감님을 위해 기도를 하겠사옵니다."


  "허허. 조 대감을 용인 선영으로 귀장한지 모르고 온 것 같소."


  "무슨 말씀인지요."


  "겨울을 나고 용인 선영으로 귀장해 갔다는 말이오. 지금 이곳에는 정암이 없으니 잘못 온 것이오."


  여인은 잠시 난감해 하더니 혜공에게 물었다.


  "대사님, 이왕 절에 왔으니 재를 지내고 가게 해주십시오."


  "재주가 되겠다는 말이구려."


  "억울하게 돌아가셨으니 천도재를 지내고 싶습니다."


  "천도재라…. 망자를 위해 살아남은 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지요.

마침 학포 선생이 조 대감의 영정을 그리고 있고, 소승이 초가 사당을 짓는 데 울력했으니

잘 되었소이다.

보살이 기도하는 것도 조 대감을 추복(追福)하는 데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는 일이 되겠구려."


  혜공은 그제야 여인의 정체를 이해했다.

여인은 조광조를 사모하여 수절하고 있는 아낙이 틀림없었다.

올린 머리에 비녀를 꽂고 있다는 것은 이미 한 남자에게 마음을 바쳤다는 것을 의미했다.

여인에게 한 남자란 두말할 것도 없이 조광조일 터였다.


  여인은 금비녀를 쌍봉사에 시주하고 재를 지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양팽손은 여인을 바라보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양팽손이 동암에 한 달째 머무르고 있는 까닭은 조광조의 영정을 그리기 위해서였다.

혜공이 목수를 데리고 지은 초가사당에 안치할 조광조의 영정이었다.

며칠 후면 조광조와 인연 있는 호남의 선비들이 초가사당에 모여들 것으로 예정돼 있었다.

양팽손은 자신이 그리고 있는 조광조의 초상화를 떠올리며 여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대에게 내 한 가지를 묻겠소."


  여인은 양팽손을 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대가 생각하는 조 대감은 무엇이오."


  여인은 차를 마시다 말고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해와 같은 정암 어른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사옵니까."


  "정녕 그리 사모했다는 말인가."


  혜공이 여인의 편에서 얘기를 했다.


  "해와 같으니 눈이 부셔 말을 못하겠지요. 그렇다면 방편이 하나 있소이다."


  "대사께서 말씀해 보시오."


  "일체유심조라, 마음이 짓는 대로 보이는 법이지요.

보살님, 조 대감을 허공에 뜬 달이라 생각해 보시오.

앞으로는 눈이 부실 일이 없을 것이니 재와 같은 차디찬 마음으로 바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불가에서는 이것을 정견(正見)이라 하지요. 하하하."
 
  어색해질 뻔하던 방안의 분위기가 혜공의 재치 있는 한 마디로 활기를 찾았다.

혜공은 화제를 돌려 자신이 만든 차 얘기를 했다.


  "우리 절 창건주인 철감선사 사리탑 부근에 야생하는 찻잎으로 만든 작설차입니다.

맛과 향이 그만입니다."


  여인은 차를 처음 마셔보지만 양팽손은 이미 사간원 정언으로 근무할 때부터

차를 음다했던 적이 있다.

감찰 업무를 보기 전에 반드시 차를 마시며 다례(茶禮)를 했는데, 차 마시는

그 시간을 대간들은 다시(茶時)라고 불렀다.

차는 각성의 효과가 있어 흐린 정신을 맑게 해주고 피로를 덜어주는 효과가 있으므로

무엇이건 시비를 가려야 하는 사헌부나 사간원의 대간들은 다시를 지켜야 했던 것이다.


  "세상도 추웠지만 지난겨울 날씨도 혹독했습니다.

찻잎이 동해를 입어 죽었다 살아나오니 이제야 차를 만들 만한 싹이 나오지 뭡니까.

수확한 양은 금싸라기처럼 소량이지만 맛과 향은 여느 때와 비교할 바 아닙니다.

여기에도 자연의 섭리가 깃들어 있습니다."


  양팽손도 혜공의 말에 동감을 표시했다.


  "다신(茶神)이 내린 듯한 차입니다.

차향을 맡아보니 천도(天道)를 알겠습니다.

겨울이 혹독했던 것은 봄이 가까워진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었겠습니까.

하늘은 차를 통해서, 계절을 통해서 도(道)를 말하고 있소이다."


  "학포 선생께서는 서화잠심(書畵潛心)의 경지에서 노니신 줄만 알았더니

다인(茶人)의 경지를 즐기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서화잠심이란 현실에서 물러나 글과 그림으로 마음을 수양하는 것을 말했다.

양팽손은 낙향하여 서화로 잠심하며 세상을 잊곤 하였는데,

조광조의 영정을 그리는 작업도 그러한 일과의 연장인 것이었다.

그러나 양팽손은 조광조를 생각할 때마다 콧잔등이 찡해지고 눈물이 먼저 났다.
   
  날이 금세 어두워지고 있었다.

혜공이 먼저 찻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 예불시간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소승은 부처님을 뵙고 오겠습니다. 그러니 두 분께서는 다담(茶談)을 더 나누시지요."


  혜공이 나가고 없자 양팽손이 천정을 응시하며 말했다.


  "정암은 참으로 인복이 많은 사람이오. 정암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한두 사람이 아니니 말이오.

혜공대사만 해도 정암을 추복하는 일에 열성이 대단해요.

초가 사당을 혜공이 울력하여 마련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오."


  "정암 어른께서는 쌍봉사에 무슨 천덕(天德)을 베푸셨는지요."


  "쌍봉사는 정암과 인연이 깊은 절이오.

처음에 정암은 세조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고 해서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나중에는 쌍봉사가 참 편안한 곳이라고 감탄을 했소.

또 하나, 당시 혜공대사께서 억울한 누명을 쓴 적이 있었는데 정암이

전라도 감사에게 서찰을 띄워 바로 누명을 벗겨주었소."


  실제로 조광조가 혜공을 살린 일이 있었다.

혜공이 향교 교생들의 모함을 받아 전라도 감옥에 하옥됐을 때 조광조가 감사에게

서찰을 띄워 방면하게 했던 것이다.

교생들은 혜공이 쌍봉사의 불상 한 구를 팔았다고 파렴치한 도둑으로 몰았으나

조광조는 혜공을 만나 그의 자비로운 인품에 놀랐던 적이 있고,

무엇보다 쌍봉사의 천불이 삼 일째 꿈속에서 나타나 혜공은 죄가 없다고 알려주었던 것이다.


  "어른께서는 그래서 쌍봉사 옆에다 장례를 치러주었사옵니까."


  양팽손은 차를 다시 우려 여인에게 건네며 말했다.


  "능주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이곳이야말로 해가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소.

이미 극형을 받았는데 능지처참이란 더한 극형도 있지 않소.

내 판단이 옳았던 것 같소. 용인으로 귀장하기 전까지는 아무런 해가 없었소."


  양팽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동암으로 올라가야 했다.

여인이 급하게 말했다.


  "좀 전에 내리신 물음에 이제야 답하는 것을 용서해주십시오."


  "무엇을 용서해달라는 말이오."


  양팽손은 벌써 잊어먹은 채 되물었다.


  "저에게 정암 어른이 무엇이냐고 물었사옵니다."


  "생각해 보니 그리 물었던 것 같소."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렇다면 말해보시오."


  "정암 어른을 십수 년 전에 뵈었으나 알 수 없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모습 그대로이옵니다. 의관을 정제하고 앉아 있는 모습은 산처럼 위엄이 있사옵니다.

아무리 힘센 장사가 떠밀어도 꿈쩍을 안할 듯하옵니다.

허리는 참나무처럼 꼿꼿하고 어깨는 반석처럼 힘이 넘치옵니다.

이목구비는 뚜렷하여 귀는 후덕하게 부드럽고, 눈은 작지도 크지도 않으며,

입은 늘 반듯하게 다물어 있고, 콧날은 깎은 듯 우뚝하옵니다."
  양팽손은 무엇에 홀린 듯도 했고, 난데없이 귀인을 만난 듯도 했다.

조광조의 영정을 완성해 놓고서도 붓을 놓지 못하고 있는 자신에게 여인은 확신을 심어주고 있었다.

지금 여인이 사모하여 떠올리는 조광조야말로 자신이 그리고자 했던 조광조와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양팽손은 동암으로 올라가면서 여인에게 한 마디 했다.


  "정암을 만나고 싶거든 내일 동암으로 오시오."


  양팽손은 여인이 오매불망 그리워하는 조광조를,

자신이 한 달 만에 완성한 조광조의 초상화를 보여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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