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하늘의 道]

제1장 하늘이시여 2

오늘의 쉼터 2016. 5. 24. 17:31

제1장 하늘이시여 2




 이신은 우음산을 데리고 감천(甘川)의 발원지를 찾아 거슬러 올라갔다.

 


  물 흐르는 대로 감천을 따라 남동쪽으로 내려가면 낙동강을 만나 큰 마을이나 저잣거리가

나오기 때문에 몸을 숨기기가 위험했다.

다행히 목덜미를 파고드는 사나운 눈보라의 기세는 꺾이고 하늘에서는 함박눈송이가

날벌레처럼 나붓나붓 희끗거렸다.

송곳 같은 바람 끝자락도 잠시 무디어졌다.

그들은 얼음이 두껍게 언 천을 건너 반대편의 둑길을 탔다.

그곳의 구부러진 천은 선산 땅과 경계를 짓고 있었다.



  그들은 선산 땅을 넘어서고 나서야 안도의 심호흡을 했다.

웃자란 갈대숲 속에 퍼질러 앉아 들짐승처럼 잠깐 동안 숨을 골랐다.

그러나 천변의 갈대숲도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그들은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더 멀리 벗어나 안심하고 머물 수 있는 피신처를 찾아야 했다.



  이신은 술병에 남은 술을 한 모금 먼저 마시고 우음산에게 건넸다.

언 몸을 녹이는 데 술처럼 좋은 것이 없었다.

덕로가 가져온 술은 독주가 분명했다.

한 모금만 해도 목구멍이 화끈거리고 창자에 불이 붙었다.

김식이 통음하고 정신을 잃어버릴 만큼 독한 술이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요?"



  "일단 선산 땅에서 더 멀리 벗어나야지. 아마도 지금쯤 포졸들이 우릴 뒤쫓고 있을지 모른다.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이 상책이지만 혹시 사람을 만나거든 당황해서는 안 된다."



  "왜 하필 이런 날 도망치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요.

처사님께서 어찌나 서두르라고 하신 탓에 짜다 만 짚신도 놔두고 왔습니다요."



  "죄 없는 나으리께서 중한 죄를 받느니 잠시 피했다가 좋은 세상에 나가려고 하는 것이야.

그리고 이제부터는 나를 이 화상이라고 불러라."



  "화상이 뭡니까요?"



  "산중에 들어가 수도하는 사람을 화상이라고 한다.

봐라, 삿갓 쓰고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걸망을 맸으니 영락없는 승려가 아니냐."



  이신은 재빨리 변장한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만족해했다.

앞으로는 선산에서처럼 김식의 제자라고 나설 생각은 없었다.

예전처럼 승려 행색을 해야만 안전했다.

사실 이신은 김식을 만나기 전에도 승려로 가장했을 뿐 진승(眞僧)은 아니었다.

낙안의 관노였다가 도망쳐 승려로 행세하며 선산까지 나와 탁발을 다니던 중에

김식을 만나 제자가 된 사람이었다.

그는 상황이 달라질 때마다 모습을 달리하는 변신의 달인이었고, 신분이 밝혀지면

노비로 살았던 낙안으로 압송되는 것은 물론이고 중형을 받아야 하는 천민이었다.
 
  김식은 아직도 대취한 채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우음산은 힘이 장사였으므로 김식을 업고 십여 리를 걸었는데도 지치거나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허연 입김을 황소처럼 내뿜으면서 이신의 잰걸음을 뒤쫓아 가고 있었다.



  그들은 둑길이 끝난 지점에서 소로를 따라 계곡으로 꺾어들었다.

계곡 쪽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보니 마을이 있는 모양이었다.

우음산은 그 자리에 머물렀고, 먼저 연기가 나는 쪽의 동태를 살피고 온 이신이 고개를 흔들었다.



  "마을에서 나는 연기가 아니다. 험상궂게 생긴 놈들이 불을 피우고 있다.

보아 하니 산적 떼가 분명하다."



  이미 외길을 들어선 그들은 돌아설 수도 없었다.

이신이 망설이자 우음산이 말했다.



  "이 화상님. 산적이 몇 명이나 되는지 알고 싶구먼요."



  "한 명이면 어떻고 두 명이면 어쩔 것이냐.

저놈들은 도적 중에서도 악독하기로 유명한 산적들이다.

이런 산중에서는 맹수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산적이 아니더냐."



  이신은 산적이 눈앞에서 협박이라도 하는 듯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래도 우음산은 우직하게 말했다.



  "나으리만 잘 보살피고 계시어요. 제가 해결해 보겠습니다요."



  "이놈아. 네 혼자 어찌 저놈들을 물리치겠다는 것이냐.

저놈들은 칼을 휘두르는 흉악무도한 산적들 아니냐."

  우음산은 힘이 장사인데다 김식의 둘째 아들 덕순(德純)에게 무술을 배운 적이 있었다.

김식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 덕수(德秀)는 골격과 수족이 섬세하여 여장을 하고

부인들 틈에 끼어 있으면 아무도 남자인지 눈치 못할 정도였고, 둘째 아들 덕순은

용모가 웅장하고 기와 힘이 뛰어났으며, 셋째 아들 덕무(德懋)는 아버지를 많이 닮아

고집이 세고 반골기질이 강했다.



  작년 가을에 김식이 체포되어 간 날 밤에도 모두가 혼비백산하여 허둥댈 때 덕순이

용의주도하게 군사작전을 펼치듯 뿔뿔이 흩어지게 했다.

아녀자만 남겨 두고 형과 동생은 물론 집종들까지 모두 도망치도록 피신을 주도했다.

우음산은 덕순의 지시를 받아 그날 밤부터 지금까지 김식을 그림자처럼 가까이서 시종해오고 있었다.



  덕순의 무술은 사화를 일으켜 천하의 권력을 손에 쥔 남곤과 심정마저 공포에 떨게 했다.

현상금을 걸고 수배의 방을 관아마다 붙여 놓았지만 덕순의 행방은 묘연하기만 했다.

덕순을 따르는 자객들이 남정과 심곤을 처단한다는 소문만 사람들 입에 무성할 뿐이었다.



  실제로 남정과 심곤은 신출귀몰하는 덕순의 무술이 두려워 퇴청한 후에도 바로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평복차림으로 변복하여 남의 집을 전전하기 일쑤였다.

덕순의 무술은 힘을 바탕으로 세기를 닦는 검술이었으므로 장사 우음산은 습득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우음산은 가는 지팡이 하나로도 순식간에 네댓 명을 쓰러뜨리는 무술실력이 있었다.

그래서 이신에게 산적의 숫자를 물었던 것인데 이신은 이빨을 소리 내어 부딪칠 만큼 떨기만 했다.
 
  "네, 네놈이 가서 사정하느니 차라리 내가 가서 법문을 하는 것이 낫겠다.

무식 무도한 놈들이 법문인지 통사정인지 어찌 알겠느냐."



  "산적한테 무슨 법문을 합니까요. 쇠귀에 경 읽깁죠. 이 우음산이가 겁을 주고 오겠습니다요.

나으리만 잘 모시고 계시면 아무 탈 없을 것입니다요."



  "허허. 살다보니 별 꼴 다 보고 기막혀 나자빠지겠네. 네놈이 저 포악한 산적들에게 겁을 준다고?"



  "사실은 나으리 둘째 아드님한테 무술을 배웠습니다요."



  우음산은 김식을 바위에 내려놓더니 재빨리 이신의 지팡이와 삿갓을 빼앗았다.

우음산의 힘에 밀려난 이신은 주춤 물러서며 아직도 깨어나지 않는 김식을 감쌌다.

그러더니 혀를 끌끌 찼다. 우음산은 연기가 나는 산속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쯧쯧. 저놈이 죽으려고 겁대가리 없이 나불대네 그려. 아이고, 이제부터는

내가 나으리를 업고 산길을 넘어가야 하다니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저 황소 같은 놈이 날 죽이려고 하네 그려."
 
  우음산은 삿갓을 들어 올려 산적의 동태를 살폈다.

네댓 명의 산적이 토담집 마당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멧돼지를 잡아 구워먹고 있는 중이었다.

마당 한쪽에 참나무 장작들이 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숯을 굽는 사람들이 임시로 사는

토담집이 분명했다.

숯가마에서는 연기가 폴폴 나는 데 숯쟁이는 보이지 않았다.



  우음산은 덕순이 무술을 가르쳐 줄 때마다 했던 말이 떠올랐다.



  '무술은 마음에서 시작하여 단전의 힘으로 움직이다가 마음으로 돌아와 끝나는 것이다.

승부는 첫 마음이 어떤가에 따라 이미 결정이 나버린다.

이길 상대는 오소리처럼 작고 굼벵이처럼 느리게 보인다.

상대가 바위덩어리처럼 단단하고 비호처럼 빠르게 보인다면 이미 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상대와 겨룬다는 것은 목숨만 버리는 것이다.

진정한 무술인은 후일을 기다리며 목숨을 아낄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비겁함이 아니라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다.'



  다섯 명의 산적들을 둘러 본 우음산은 미소를 지었다.

두목은 술에 잔뜩 취해 몸을 비틀거리고, 나머지 네 명은 서로 멧돼지 고기를 뜯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우두머리가 술로 무너져 있으니 나머지는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다.



  우음산이 다가서자 정신없이 구운 고기를 뜯던 졸개 중 한 명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던

고기살점이 튀어나올 정도로 소리 쳤다.
 
  "누구슈?"



  "두목을 만나고 싶구만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하지 마슈."



  졸개가 다가오더니 우음산의 삿갓을 벗겨 던져버렸다.

그러자 퍼질러 앉아 정신없이 뼈다귀고기를 뜯고 있던 졸개가 먹던 뼈다귀를 내밀며 나섰다.



  "어이, 싸가지 형씨. 이 뼈다귀 줄 테니까 아가리 얌전하게 닥치더라고."



  졸개가 내민 뼈다귀는 우음산이 지팡이를 휘두르자 산적 두목 앞에 떨어졌다.

졸개들은 화들짝 놀랐으나 두목은 입가에 술을 흘린 채 히죽히죽 웃으며 우음산에게 다가왔다.



  "이보게. 나를 찾는 이유가 뭔가."



  "선량한 숯쟁이를 괴롭히다니 두목답지 않구먼요."



  우음산은 토담집 부엌 안에서 손발이 묶인 채로 신음하고 있는 숯쟁이 부부를 보고 있었다.

부엌은 거적때기를 걸쳐 놓은 우릿간과 흡사했다.

컴컴한 부엌 안에서 숯쟁이 부부가 웅크린 채 끙끙대고 있었다.



  "숯쟁이 연놈을 묶어 놓지 않으면 우리가 죽거든. 저놈들이 우릴 고발할 테니까.

네놈도 여길 무사히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야.

너도 현상금이 욕심나 우릴 관아에 고발할 놈이거든."



  두목은 비틀거리면서도 칼을 재빨리 빼어들어 우음산을 겨냥했다.

순식간에 두목의 칼끝은 우음산의 턱 밑을 파고들었다.

우음산은 두목이 다가오는 만큼 뒷걸음쳤다.

졸개들은 우음산이 도망치기라도 할 듯 에워싸고 돌았다.

그러나 우음산은 두목이 칼을 휘두르는 동안 졸개 하나를 넘어뜨린 뒤 칼을 쥔

두목의 팔을 비틀고 한 손으로는 목을 죄었다.

잠시 후 우음산이 두목의 칼을 빼앗자 싸움은 싱겁게 끝나버렸다.



  두목이 눈짓을 하자 졸개들이 하나 둘 무릎을 꿇었다.

우음산은 숯쟁이 부부에게 두목과 졸개들을 묶도록 하고는 큰소리로 이신을 불렀다.



  "이 화상님!"
 
  어느 새 이신이 김식을 업고 나타났다.

우음산은 김식을 토담집 안에 눕혀 놓고 밖으로 나와 이신더러 산적의 처리를 물었다.



  "이 화상님, 이 도적들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요."



  "흠흠. 불법을 자비라 하지 않더냐. 본래 악한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참회를 하고 진심으로 빈다면 자비를 베풀 수 있지."



  이신은 진짜 승려처럼 말하고 행동했다.

마당에 나뒹구는 삿갓을 쓰더니 오른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말했다.



  "나무아미타불. 이 도사의 말을 들으렷다.

너희가 지은 죄는 관아로 나아가 법대로 받아야 마땅하겠지만 어찌 자비의 길을 걷는 수행자가

고발 따위를 하겠느냐.

다만 이 도사가 너희들에게 바라는 것이 하나 있느니라.

참회하고 초근목피로 연명하더라도 도둑질하지 말고 살지어다. 흠흠. 알겠느냐."



  두목이 이신 앞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도사님, 오죽하면 이 짓거리로 연명하겠습니까. 저도 원래는 농사짓고 사는 양인이었습니다.

 관아에 세금 공물을 바치다 못해 밭떼기 다 팔고 거지가 되어 처자식 놓아두고 도망친 놈입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졸개가 말했다.



  "몸이 아파 신역(身役; 몸으로 치르는 노역)을 나가지 못했더니 대신 무명을 공납하라 하고,

내지 못하자 굵은 베를 곱절로 내라 하지 뭡니까요. 그것도 해마다 불어나니 무슨 수로 버팁니까요."



  또 다른 졸개들도 억울함을 호소했다.



  "주인마님이 힘없는 저에게 살인 누명을 씌?습니다요.

거기서 죽으나 여기서 죽으나 마찬가지 아닙니까요. 그래서 산적이 됐습죠."



  "지는 산적으로 살더라도 배터지게 먹어보는 것이 소원입니대이."



  "흉년들어 농사 망치고 입에 풀칠하기 위해 장사 나섰다가 교활한 아전에게 불법이라 하여

 장사 물건 다 빼앗기고 산으로 들어왔당깨요."



  이신이 산적들이 호소하는 말과 자기 말에 도취되어 삿갓을 슬쩍 들어 올렸다가 내리며 말했다.



  "동감이야, 동감이구 말고. 너희들만 산적인가.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 지들 배만 살찌우는

벼슬아치들이 진짜 산적이지. 아무리 흉년이 들어도 더 부자가 되는 부자들이 산적이지.

양심이라고는 개미고추만도 없는 세상이야. 아, 배 두드리고 살 극락세상은 어느 때나 오려나.

나무아미타불."
     


  산적들의 읍소는 과장이 아니었다.

중종 12년 신축일에 대사성 김당과 정언 장옥이 아침 경연에 나아가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올해는 흉년이 지독하게 들어서 민간에서는 아버지와 자식들까지도 서로 돌보아 줄 수가 없어서

나무에다 붙잡아 매놓기도 하고 길가에 내버리기도 하여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형편이옵니다.

설사 모든 관리들이 녹봉이라 하더라도 임시로 줄여서 백성들의 생활을 넉넉하게 하여야 할 것이니

각 도 관찰사에게 지시를 내려 조치를 잘 취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사옵니다.'



  그러나 중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기득권을 결코 양보할 생각이 없는 벼슬아치들의 녹봉을 줄인다면 그들의 반발이 거세져

왕권이 흔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겨우 저녁경연에서 힘없는 제령군수와 봉산군수를 파면시키라고 지시를 내렸을 뿐이었다.



  '재령군수 박문조와 봉산군수 홍수 등은 각기 관할 안에 있는 굶주린 백성들을 애써 구제하지 않은

결과 온 집안이 고장을 뜨게 만들었으니 이런 집이 재령은 8호이고, 봉산은 11호나 된다.

심지어 그 집들을 불태우거나 헐어버려서 흔적이 없게 하였으니 매우 말 못할 인간들이다.

모두 벼슬에서 파면시키고 쫓아내도록 할 것이다.'



  중종이 모든 벼슬아치들의 감봉을 허락하지 않자 김당과 장옥은 더 밀어붙일 수 없었다.

그래서 나온 타협안이 재령군수와 봉산군수를 의금부로 불러들여 엄히 심문함으로써

다른 고을원들에게 경각심을 주는 것이었다.

중종으로서도 그들을 희생양 삼아 처벌하면 들끓는 백성들의 원성을 어느 정도

무마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때 중종이 내리는 조치는 우유부단하고 미온적이었다.



  '올해 각 도가 한창 흉년 구제로 바쁜데 농사를 심하게 망친 각 고을에서 올리는

잡다한 공물들을 이전대로 바치게 하면 백성들이 더 곤궁해질 것이다.

경기도에서 바치는 생선만 보더라도 치수에 구애되어 조금만 맞지 않아도 모두 퇴자를 놓거나

혹은 곱절로 받아내기 때문에 쉽게 마련하여 바칠 수도 없거니와 백성들이 매우 고생을 하고 있다.

농사를 아주 심하게 망친 각 고을들에 대해서는 기한을 정해주고 진상품을 임시로 줄일 것과 생선의

치수도 적당히 줄일 것에 대해서 해당 관청과 사옹원의 제주가 함께 토의하여 제의하도록 하라.'



  중종은 임시방편에만 급급할 뿐 근본적인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공물의 양을 줄이고 진상품인 생선의 크기를 줄인다고 해서 백성들의 고통과 피해가 줄어들 리 없었다.
 
  술에서 깨어난 김식은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놀랐다.

유배살이 처소를 벗어나 산중에 있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으며 더욱이 생각지도 못했던 광경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었다.

두 손이 묶인 산적들이 이신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우음산이 김식 앞에 나타나 두 손을 모으고 말했다.



  "나으리, 이제 깨어나셨습니까요."



  "여기가 어디냐?"



  "선산 땅에서 수십 리 떨어진 산중입니다요."



  김식은 유배살이 처소에서 덕로와 주고받은 얘기를 어렴풋이 떠올렸다.

덕로는 김식에게 멀리 피신하라고 간청했던 것이다.



  "음산이 네가 나를 업고 예까지 왔구나."



  이신도 김식 앞으로 와 머리를 조아렸다.



  "대사성 나으리, 산중에 들어서 만난 산적들입니다. 저들을 어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산적들은 하나같이 김식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두목이 숙였던 고개를 들고 말했다.



  "나으리, 죽을죄를 졌습니다요. 목숨만 살려주시면 평생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요."



  "나는 너희들이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모른다.

그러나 너희들이 나에게 목숨을 살려주라고 한 것을 보면 너희들에게도 아직 양심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여기를 떠나거든 양심에 부끄러운 짓을 하지 말고 살거라. 알겠느냐?"



  "예."



  김식은 우음산에게 산적들을 풀어주라고 지시하고서는 방으로 들어와 숯쟁이의 절을 받았다.

숯쟁이는 김식에게 자신들이 산중에 들어온 사연을 얘기했다.



  "나으리. 소인은 원래 남의 토지를 빌어 농사를 짓는 농부였사옵니다.

하오나 조세와 공물, 관아의 부역에 시달리다 못해 집을 버리고 나와 이렇게 숯을 구워 팔아

끼니를 때우는 숯쟁이가 됐습지요.

친족 중에는 나라에서 금하는 장사를 떠나거나 더러는 부잣집 노비로 들어가 연명하는 사람도

있사옵니다.

소인이 일구던 논밭은 지금쯤 쑥대만 무성할 것이옵니다."



  "왜 그런가."



  "부자들은 일하는 것을 싫어하고 백성들은 힘든 농사일을 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옵니다. 

나라에서 금하는 장사를 하면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사옵니다.

그러니 미련하고 눈치 없는 사람만 농촌에 남아 농사를 짓게 되니 한 사람이 일하여 열 사람이

먹고 사는 형국이옵니다."



  "양인들이 다시 농촌에 들어와 살 수 있게 할 방도는 무엇인가."



  "소인이 어찌 나라살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씀드릴 수 있겠사옵니까."



  "그대의 얘기를 들으니 수긍하는 바가 많아서 그렇다네.

손발 없이 어찌 머리가 살 수 있으며 머리 없이 어찌 손발이 살 수 있겠는가.

두 바퀴가 탈 없이 굴러야 수레가 움직이는 법. 임금을 받드는 대신과 백성들은

각각 하나의 수레바퀴가 아니겠는가.

아, 우리나라는 두 바퀴가 고장 난 수레와 다름없으니 이 일을 어이할꼬. 어서 말해 보게."



  숯쟁이는 눈치를 보다가 김식이 대답을 재촉하자 용기를 내어 말했다.



  "관아에 앉아 있기만 할 뿐 관내의 밭고랑을 밟지 않는 고을 원을 엄격하게 단속하며 농사철에는

부역을 일체 없애고, 권세 있는 집의 남은 토지를 양인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고,

일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한량을 줄여 양인들 모두가 농사를 짓게 하면 성과가 클 것이옵니다.

농사만 짓고서도 재물과 먹을 식량이 많아지면 저절로 장사꾼도 없어질 것이고, 가족 간에 효도와

우애도 생길 것이니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이 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없을 것이옵니다."



  김식은 숯쟁이의 투박한 손을 덥석 잡았다.



  "그대야말로 나의 스승이네. 평생 성리학을 공부한 나지만 그대의 한 마디처럼 절절하고

생생한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네."



  "나으리. 소인더러 스승이라니요.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옵니다."



  "그대가 정든 논밭을 떠나 숯장사를 하게 된 것은 우리의 잘못도 크다네.

우리는 정치라는 한쪽 수레바퀴만 개혁하면 삼대의 왕조 같은 군자의 나라가 될 줄 알았네.

허나 굶주리는 백성들을 보니 우리가 생각했던 개혁이 반쪽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안락하게 하는 개혁을 등한시했어. 또 한쪽의 수레바퀴를 보지 못했네.

백성들이 굶주리는 데 설령 임금님이 성군이 된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임금님을 잘 모시지 못한 우리의 과오일세."



  "나으리."
 
  관솔불은 의외로 밝아 토담집 너머의 숲까지 환히 밝히고 있었다.

대나무로 얼기설기 엮은 방문을 열자 눈발이 희끗희끗 보였다.

밤이 되어 다시 눈이 오고 있었다. 멍석을 깔아놓은 방바닥은 설설 끓고 있었다.

숯쟁이 아내가 부엌으로 들어가 아궁이에 장작을 한 아름씩 넣곤 했다.



  모두가 좁은 토담집에서 피신해 있기는 무리였다.

하룻밤을 넘기는 것도 숯쟁이 부부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었다.

김식은 숯쟁이에게 물었다.



  "여기서 영산(靈山)까지는 얼마나 먼가."



  "한 나절이면 갈 수 있습니다.

소인의 집이 누추하고 협소해서 붙잡지는 못하겠습니다만 밤길이 춥고 위험하니

오늘 밤은 이곳에서 나십시오. 저희는 숯가마 움막에서 자겠습니다."



  "영산을 잘 아는가."



  "나으리. 그곳보다 먼 곳도 숯을 지고 나다니며 장사하고 있습니다.

영산으로 가신다면 제가 지름길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고맙네. 영산에 이중(李中)이라는 내 제자가 있다네."



  "이 생원님이라면 그 댁에도 우리 숯을 판 적이 있습니다."



  "잘 됐네."



  김식은 숯쟁이 부부가 자던 방에서 이신과 함께 다리를 뻗고 드러누웠다.

밤이 깊어갈 수록 숲을 할퀴는 바람소리도 날카롭고 거세졌다.

칼바람은 빠른 화살처럼 차가운 소리를 내며 불어오곤 했다.



  이중은 김식의 서울 집을 드나들며 공부를 하던 제자였다.

나이 차이는 몇 살밖에 안되었지만 이중은 김식을 하늘같이 떠받드는 제자였다.

김식이 영산에 내려오면 수청을 들게끔 기생 하나를 첩으로 둘 만큼 김식을 기다려 왔던 제자였다.

김식은 몸을 뒤채며 잠을 쉽게 이루지 못했다.

이신의 코고는 소리 탓도 있었지만 세상에 다시 나아갈 수 있을는지,

중종이 다시 부른다면 개혁을 어떻게 할지 별의별 생각이 머릿속에서 오락가락 떠올랐다.

아직도 김식은 중종이 자신을 버리지 않고 언젠가 반드시 부를 것이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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