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설명
반야암(般若庵)의 대웅전에 봉안된 석조보살좌상으로, 현재 대웅전 수미단 위에 목조석가여래좌상(중앙), 목조보살좌상(향좌측)과 함께 봉안되어 있다. 다른 2구의 불상과 달리 불석으로 조성되었는데, 총높이 41㎝로 소형 불상에 속한다. 이 보살상은 조선 후기에 불상의 재료로 많이 사용된 불석(佛石, 또는 비석沸石)으로 만들어졌다. 불석은 조선 후기 불상의 재료로 새롭게 나타난 것으로, 다른 재료보다 내구성이 강하며 석재임에도 불구하고 조각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어 17세기 전반부터 특히 경상도지역에서 많이 제작되었다. 불석의 산출지에 대해 <일본표해록>(1821년)에는 “경주는 예부 터 옥돌로 유명하며 경주 돌이면 다 옥돌인가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인데, 천불상을 조성한 곳이 경주 불석산(佛石山)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근역서화징>에도 “대흥사 천불을 경주 석굴암에서 조성하였다” 등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경상도, 특히 경주 일대에서 불석이 생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상은 보관 부분을 금색으로 칠하고 머리카락을 검은색, 이목구비를 일부 적색과 녹색으로 칠한 것을 제외하고는 불석이라는 재료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고개를 약간 숙여 구부정한 자세로 정면을 바라보고 결가부좌(結跏趺坐)하였으며, 머리에는 보관을 착용하였는데 가운데 부분이 불룩하게 솟은 조선 후기의 보관형식을 잘 보여준다. 보관 역시 불석으로 함께 만들어서인지 보관 표면에 여러 가지 장식이 첨가된 조선 후기의 보관과 달리 아무런 장식이 없이 밋밋하다. 안쪽의 정수리 부분에는 작고 둥근 보계(寶髻)가 표현되었으며, 보관 아래로는 보계(寶髮)가 가지런하게 표현되었다. 이마 양쪽에서 흘러내린 두 가닥의 보발은 귀를 한번 감싸고 어깨로 흘러내렸는데, 양 어깨에 위로 둥글게 말린 보발이 두 가닥으로 길게 늘어져 있다. 얼굴은 넓적한 편으로 신체에 비해서 큰 편이며, 둥근 얼굴에 눈은 가늘고 길게 반계(半開)하였으며 코는 넓적하고 입에는 약간 미소를 머금었다. 착의법은 불상의 착의법을 따른 통견(通肩)식으로, 양 어깨에 걸친 옷자락은 목주위에서 옷깃이 한번 접힌 후 거의 수직으로 흘러내렸다. 오른쪽 옷자락은 오른쪽 어깨를 완전히 덮고 내려와 가슴 한가운데 평행으로 표현된 군의(裙衣) 아래로 끼워졌으며, 왼쪽 어깨에서 내려온 옷자락과 만나 U자형을 이루었는데, 간략화된 옷주름은 선이 굵고 강해 힘이 있다. 오른쪽 어깨에는 연꽃잎 모양의 자락이 표현되었다. 하체로 흘러내린 옷자락은 결가부좌한 두 다리 위를 덮고 넓게 아래로 펼쳐져 있으며, 가부좌한 무릎 위로 두 손을 손등을 위로 하여 가지런히 얹어 놓았다. 이러한 손 모습은 변형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조선 후기 소불상에서 가장 흔한자세이다. 목조불보살상이나 금동불 보살상과 달리 석조불 보살상이 대부분 이와 같은 수인을 취한 것은 돌이라는 재료에서 오는 한계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 상은 불석으로 만든 보살상으로, 전국적으로 불석 소불상들이 여러 점 남아있지만 이 상처럼 보살상으로 제작된 것은 많지 않다. 바닥면에는 복장구멍이 없어서 복장을 넣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불상조성기가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평판하면서도 단정한 삼각형의 신체, 신체에 비해 큰 머리, 넙적한 얼굴, 짧고 뭉툭한 코, 가지런히 내린 두 손 등의 특징은 조선 후기에 많이 조성된 소불상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와 같은 특징을 지닌 석불상들이 대부분 18~19세기에 집중적으로 조성되었던 것으로 보아 이 보살상 역시 18~19세기경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안정되고 균형 잡힌 신체표현과 이목구비의 표현 및 옷자락의 처리 등이 18세기 전반 경의 불상특징을 보이고 있어, 조성연대는 18세기경으로 추정된다.
반야암 석조보살좌상
반야암 석조보살좌상
반야암 석조보살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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