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내가 누구인지 알아맞혀 봐-4
유미는 조심스레 그것을 주워들었다.
그것은 봉투가 없는 오래된 편지였다.
편지의 군데군데 눈물이 떨어진 흔적이 역력했지만, 내용을 이해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만년필로 쓴 글씨는 번져 있었다.
그러나 그 필체의 주인공이 남자라는 건 한눈에도 알 수 있었다.
느낌상 꽤 고급 만년필로 쓴 글씨는 호방하면서도 세련된 멋을 풍기고 있었다.
유미는 천천히 그 글씨를 음미하며 읽었다.
‘나의 인숙에게
단 한 순간도 당신을 잊은 적이 없소만, 내 앞에 펼쳐진 인생은 가차없구료.
운명은 자비롭지 못하여 당신 곁에 단 한 순간도 머물지 못하게 하니 나를 용서해주오.
당신도 나의 상황과 사명을 이해해주리라 믿소. 아니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
나를 지켜주고 사랑하는 힘을 나는 여기서도 늘 느끼고 있으니 말이오.
아이의 사진은 잘 받았소.
당신이 아이를 의지하여 다만 조금이라도 행복을 맛보는 삶을 산다면 나로서는 정말 다행이오.
나도 멀리서나마 어떤 식으로든 아이를 지켜주겠소.
당신은 아름답고 현명한 여자요.
내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리라 생각하오.
나 또한 당신의 순수한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어요.
그러니 절망하지 말고 씩씩하게 잘 살길 바라오.’
편지는 거기서 끝나있었다.
일부러 그랬는지 날짜도 서명도 없었다.
짐작건대, 아마도 유미의 탄생 이후 오래되지 않은 시점의 편지가 아닐까 싶었다.
이 편지의 발신인이, 그러니까…내 아버지인 걸까?
어쨌건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로 보였다.
그러나 무언가 장벽으로 합칠 수 없는 관계.
유미는 그 육필 편지를 코에 대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는 어떤 사람일까?
엄마는 그의 어떤 상황과 사명 때문에 그를 만나지 못하고 평생을 그림자처럼 숨어 산 걸까?
사명이라니. 그는 외교관일까? 군인일까? 아니면 죄수인 걸까?
유미는 갑작스러운 상상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분명한 건 그는 가정이 있는 남자가 아니었을까?
찢겨진 사진 속의 얼굴이 바로 그가 아닐까?
그 찢겨진 구멍에 어떤 얼굴을 대입해 볼 수 없어서 유미는 막막했다.
편지의 군데군데 번져 있는 눈물 자국을 보자 유미는 또 마음이 아려왔다.
엄마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편지를 보건대 엄마는 자신을 지켜주지도 못하는 남자에게 순정을 바치고 있다.
그것이 엄마의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떤 가치가 있는지 유미는 함부로 말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그런 엄마의 영향으로 유미는 엄마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왔지만,
사랑이라는 가치에 대해 어느 누군들 함부로 재단할 수 있으랴.
엄마가 완전 백프로 불행했다고, 유미가 완전 백프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유미는 편지를 노트에 집어넣고 다시 한 번 노트를 쓸어보았다.
일기와 메모와 낙서와 알 수 없는 표시로 기재된 달력 등이 들어 있는 노트.
유미는 달력을 유심히 보았다.
유미가 태어나기 전 해의 달력이었다.
어느 달의 달력에 유난히 낙서가 많이 되어 있었다.
물음표나 별표 등 몇 가지 암호 같은 표시가 일주일 전후의 날짜를 두고 표시되어 있었다.
유미는 직감으로 그걸 눈채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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