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유혹

(140)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바람-7

오늘의 쉼터 2015. 3. 28. 01:24

(140)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바람-7

 

 

 

 

 

정효는 말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그 태도가 초연한 건지 오연한 건지 슬쩍 기분이 나빠졌다.

 

유미가 눙치듯 말했다.

“아냐. 쓸데없는 말을 했네.

 

다시 태어난다면 난 고양이로 태어날 거 같아. 아님 뱀으로….”

정효는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지 기도를 하는지 정신을 집중하느라 양미간이 주름졌다.

“차라리 오욕칠정, 감정이 없는 식물로 태어나면 좀 좋을까….”

유미가 반듯하게 누워 한숨을 쉬었다.

 

정효가 바람 같은 남자라면 유미는 바람결에 쓸리는 아무 감정도 욕심도 없는 풀이고 싶다.

 

눈에 띄는 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무심하게 짓밟고 지나가는 잡초이고 싶다.

 

길거리나 담장에 피어 뭇사람으로부터 꺾고 싶다는 유혹을 느끼게 하는 ‘노류장화’로

 

태어나고 싶지는 않다.

어느새 잠이 들었던 걸까?

 

유미는 어지러운 꿈을 꾸었다.

 

누군가에게 쫓겨 어느 도시의 골목을 뛰었다.

 

하이힐이 거추장스러워 양쪽에 구두 한 짝씩을 들고 뛰었다.

 

그 골목이 어느 곳인지 유미는 잘 알지 못했다.

 

한참을 뛰다보면 막다른 골목에는 해골이 서있기도 했고,

 

베네치아 가면을 쓴 남자가 있기도 했으며, 뱀파이어가 피를 흘리며 웃고 있기도 했다.

 

가까스로 도망친 길에서 유미는 인규를 만났다.

 

인규의 손에는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인규가 유미를 보자 머리를 감싸쥐고 무릎을 꿇었다.

 

인규의 옆에는 한 남자가 죽은 듯 누워 있었는데 갑자기 그가

 

영화의 와이어 촬영을 하는 것처럼 유미의 눈앞으로 휙 날아왔다.

 

피를 흘리는 그의 얼굴은 야차처럼 웃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기관차처럼 달려들 때 유미는 뭉크의 ‘절규’라는

 

그림에 나오는 인물처럼 고막이 터져라 비명을 질렀다.

꿈에서 깨어 벌떡 일어나니 정말로 목과 귀가 아팠다.

 

아무것도 덮지 않은 알몸이었다.

 

지난밤에 장삼자락으로 유미를 감싸주던 정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희미한 향냄새가 나는 것 같다.

 

마치 알라딘의 요술램프 속으로 사라진 것 같았다.

 

혼곤한 상태에서 깨어난 유미는 설핏 선잠에서 깨어난 어린애처럼 막막하고 슬펐다.

 

야속한 사람….

 

몸에 한기가 느껴졌다. 감기가 오는 것 같았다.

 

유미는 얼른 커다란 목욕타월을 꺼내 욕실로 가서 샤워기를 틀어 뜨거운 물세례를

 

온몸에 받았다.

 

그리고 진드기처럼 붙어 있는 것 같은 악몽을 떨쳐내기라도 하듯 머리채를 마구 흔들었다.

 

탐스러운 긴 머리칼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러자 악몽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떨어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젯밤 정효가 다녀간 것도, 아니 예전의 잊고 싶었던

 

그 일도 먼 우주의 블랙홀로 사라지는 것 같았다.

 

유미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에는 메두사처럼 산발을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유미는 그 여자를 연민에 가득 찬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거울 속에는 한없이 깊고 고독한 눈빛의 여자가 슬픈 듯 서있었다.

“넌 누구니?”

“난 유미(由美)야.”

“나쁜 년!”

“난 죄 없어. 모든 건 유미(由美), 아름다움에서 말미암은 거야.”

“아름다움이라구?”

“응.”

“넌 세상에서 가장 위태로운 무기를 가졌을 뿐이야.”

“그건 타고난 재능이지, 내가 선택한 건 아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