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간발의 차이-4
“비리지 않게 끓이는 법 말이죠?”
아니나 다를까?
“어휴! 어떻게 딱 알아맞히시네요.
제 마음을 다 읽고 계신가 봐요.
예, 맞아요.
쉬운 거 같아도 콩나물국, 정말 어렵거든요.”
“콩나물 끓일 때 중간에 뚜껑을 열어 김이 빠지게 되면 비린내가 많이 나거든요.
처음부터 마늘하고 소금을 넣고 뚜껑을 꼭 닫고 끓이면 맛과 향이 더 좋아요.”
“아, 그렇군요. 지완씨는 정말 사랑받으시겠어요.
게다가 오 선생님 말씀으로는 무척 아름다우시다고 하던데.
하긴 오 선생님 친구분이니 오죽 하시겠어요.
같이 한번 뵙도록 해요.
정말요. 그리고 가끔 전화해도 되죠?”
“네? 예….”
“걱정 마세요. 문자하고 할게요.”
뭐라고 대꾸할 말을 찾는 새에 전화는 이미 끊어져 있다.
왠지 아쉬웠다.
아아, 내게도 여인의 은밀한 재산인 시크릿이 생기려나 보다.
그러나 박용준은 말했다. 같이 한번 뵙도록 해요.
그건 유미와 함께 보자는 말이다. 시크릿을 유미와 공유하긴 싫다.
그건 유미를 경쟁 상대로 생각한다거나, 또는 주눅 든다는 얘기는 아니다.
누구나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이 있고 전문 분야가 있는 것이다.
지완에게도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다.
말하자면 유미가 연애의 전문가라면 나는 결혼의 전문가라고 주장할 수 있겠지.
유미는 결혼에 한 번 실패한 전력이 있잖아.
요즘처럼 이혼이 성행하는 판에 우아한 결혼생활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그것도 재능이라고 지완은 생각한다.
아파트 모델하우스 광고처럼 다 갖추어진 삶,
모델하우스에 세팅해 놓은 최고급 빌트인 세탁기나 식기세척기처럼 구성되어 있는
멋진 4인 가족. 그야말로 명품가족이다.
그 은근한 자부심으로 지완은 유미에게 가진 자로서의 너그러움을 슬쩍슬쩍 과시하곤 했다.
그러나 이 상황이 명백한 연애의 시작이라면, 지완은 왠지 속이 좀 쓰리다.
지완에게 있어서 연애는 결혼을 하기 위한 단계로 오래전에 한 번 거쳤을 뿐이다.
지금 이 기분은 뭐랄까.
오래 처박혀 있던 장롱면허증을 다시 꺼낸 기분이다.
그런데 문자가 들어왔다.
‘콩나물국, 죽이네요! 혼자 먹기 아까워요.
참! 목소리가 너무 좋아요. 커피향처럼 오래 남아요.
동네에 예쁜 에스프레소 카페 새로 생긴 거 아세요?
제가 커피 살게요. 가까운 곳에 계시니 공기가 다르게 느껴져요.
숨 쉬는 것도 행복해요. *^^*’
지완은 숨이 살짝 가빠졌다.
이런 달콤한 말을 언제 들어 보았던가.
비록 박용준이 이 순간, 그저 영화 대사를 읊조렸다 할지라도 행복하다.
지완은 화답하기 위해 답장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문장이 도통 없었다.
황량한 사막처럼 막막했다.
어쩌면 이다지도 감성이 무뎌졌을까.
어떤 말을 써도 유치할 거 같았다.
유미의 블로그에 들어가서 몇 마디 훔쳐 올까.
지완의 사막 같은 가슴에 끈적한 열패감이 몰려왔다.
차라리 문자를 그냥 씹자.
유치한 문자를 날리는 것보다는 묵답으로 살짝 애를 태우는 게 더 나을 거 같다.
침묵은 금이다.
그러나 지금 금은방 남자와 거래를 하는 건 아니잖은가.
때로는 인간의 마음을 끄는 것이 금덩이보다 은은한 한잔의 커피향일 때도 있는 것이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지완은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폴더를 연다.
커피향처럼 자신의 목소리가 그에게 스며들길 바라며 그의 전화번호를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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