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밤의 대통령

6. 보따리 사업가

오늘의 쉼터 2014. 12. 1. 13:28

◐  보따리 사업가 

 

 

입국장의 자동문이 열리더니 수레 위에 가득 가방들을 올려놓은 한세라가 나오고 있었다.
"저 빌어먹을 보따리 사업가."
김칠성은 자신도 모르게 투덜거렸다.

한세라는 자신을 찾는 모양인지 통로의 한가운데다 수레를 레우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쩔 수 없이 깅칠성은 기둥 뒤에서 나왔다.
한세라가 그를 바라보고 활짝 웃었다.

마주 웃어주면 비디오에서처럼 달려와서 안길 조짐이 보였으므로

잔뜩 이맛살을 찌푸린 채 다가갔다.

김칠성은 수레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러자 한세라가 그의 팔을 끼었다.

양쪽에서 수백 명의 관람객이 관람하고 있었으므로 김칠성은 얼굴 전체에

개미가 기어가는 것 같았다.
"오늘도 형님이 날 보내 주셨어요."
한세라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탑승 비행편을 홍콩에서 연락해 주어서 미리 선배에게 부탁해 놓은 것이다.
"술 한잔 사야 한대요."
김칠성은 그녀를 흘겨보았다.

술값은 그가 내야 할 것이다.
"언니."
옆쪽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을 혜치고 한세라의 동생인 한세영이 달려왔다.
"안녕하세요, 형부?"
그녀가 자은 목청으로 인사를 했다.
"응. "
김칠성은 그녀의 뒤쪽을 바라보았으나 또 하나의 여동생은 보이지 않았다.

딸만 셋이 있는 집이었다.
"엄마가요,공항에 나오셨으면 형부 모시고 오랬어요. 같이 저녁 먹자구요."
김칠성은 수레를 미느라 정신이 없었다.

짐이 너무 많아서 자꾸만 가방이 미끄러졌다.

그의 뒤를 따라오는 한세라와 세영은 이야기를 하느라고 정신들이 없었다.

은근히 짜증이 났다. 김칠성은 수레를 공항 현관에 세웠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내가 차 가지고 올 테니까."
한세라가 머리를 끄덕였다. 얼굴에 웃음을 띠고 그를 바라보았다.
몸을 돌리고 주차장으로 걷던 김칠성의 가슴도 어느덧 따스해졌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한세라의 아파트를 나왔을 때는 밤 10시가 넘어 있었다.

아버지가 일쩍 돌아가셔서 여자만 넷이 사는 집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김칠성은 그 집에 앉아 있으면 으스스했다.

집안의 장식이 하나같이 오밀조밀했고 색깔들도 그랬다.

여자 귀신들이 남자의 진을 빼고 난 다음에 뼈만 남은 사내를 버린다는

옛날 이야기가 생각날 정도였다.

그녀의 온가족이 무뚝뚝하나 믿음직한 김칠성을 좋아해서

김칠성은 자칫하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을 때가 많았다.

한세라와는 처음 집을 찾아간 날 결흔승낙을 받아 놓았으니

이젠 결혼식만 남아 있는 것이다;

아파트 현관까지 한세라가 따라 나왔다.
"들어가 봐."
현관에 서서 김칠성이 말했다.

한세라는 현관의 전둥 밑에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저기요."
몸을 돌진 김칠성을 그녀가 불러 세됐다.
"나 따라가면 안 돼요?"
한세라는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그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김칠성이 혀를 차자 한세라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의 눈은 크게 떠졌고 불의의 충격을 대비하려는 듯 그를 노려보았다.
"빨리 나와."
김칠성이 말했다. 한세라는눈을깜박이며 서 있었다.
"뭘 해?"
한세라는 깡충 뛰어 그의 팔을 잡았다.

현관의 둥불 밑을 벗어나자 주변은 어두웠고 그것은 서로에게 다행이었다.
김칠성은 샤워를 하고 난 다음에 화장실에 있는 가운을 걸쳐 입었다.

 밖으로 나오자 한세라쓰 소파 위에 그대로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김칠성은 피식 웃었다. 한세라가 얼굴을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샤워하지 않을 거이?"
"왜요?"
갈라진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그러고는 침을 삼켰다.
"알았어."
깅칠성은 무엇을 알았다는지 애매하게 대답하고는 그녀에게 다가섰다.

한세라가 긴장하여 엉덩이를 움직여 물러앉았다.

김칠성은 그녀의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 넣고 번쩍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가슴에 가득 안았다.

그녀의 얼굴이 금방 붉게 달아올랐다.

김칠성은 부드럽게 그녀의 귓불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한세라는 김칠성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가슴이 쿵쿵 뛰었고 그의 가슴에 부딪혀 그에게까지 울리는 것 같았다.
김칠성은 그녀의 턱을 치켜 올렸다.

한세라는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똑바로 마주볼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이 다가오자 그녀는 눈을 감았다.

김칠성의 입술이 부딪혀 왔다.

그것은 살짝 건드리는 것 같은느낌이었으나

그녀의 전신에 전기가 흘러 지나는 듯 짜릿한 충격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한세라는 늘어져 있던 두 손을 올려 그의 소매를 쥐었다.

다시 입술에 부드러운 느낌이 왔다.

조금 전보다는 약간 힘이 가해진 느낌이 들었다.

한세라는 참을 수 없어 입을 벌렸다. 이제까지 억눌러 왔던 숨소리가 크게 터지고 그녀는 허덕였다.
김칠성의 입술이 잠시 떨어지더니 이제 그녀의 감긴 눈에 살짝부딪혔다.

그의 호홉소리가 들렸고 따스한 입김이 그녀의 얼굴에 부딪혀 흩어졌다.

그의 입술은 그녀의 코 위에 잠시 머물다가 기다리는 듯

입술을 벌리고 있는 한세라의 젖은 입술 위에 멈췄다.

이제는 격렬하게
그녀의 입술을 빨자 한세라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등을 부둥켜안았다.
어느덧 그녀의 혀는 김칠성에게 홉수되어 있었다.

이윽고 그의 입술이 떨어지자 김칠성은 그녀를 번쩍 안꾸들었다.

한세라는 눈을 감은 채 그의 목에 두 괄을 감았다.

온몸이 둥실 떠 있는 느낌이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fTl라."
김칠성이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그녀가눈을 떴다.

김칠성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침대 위에 눕혔다.
"부끄러울 것 없어."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사람이 달라진 듯 그는 조심스러웠다
그는 정성들여 한세라의 껄질을 벗겨 나갔다.

한세라는 눈을 뜨고는 견뎌 낼 수가 없었다.
"불을, 불을 꺼 줘요."
침대 위에서 온몸을 굳히면서 한세라가 말했다.

천장 위의 자은 형광둥 불빛에 눈이 부셔 견딜 수 없다는 듯이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이제 그녀는 종이 한장 덮이지 않은 알몸이 되었다.

김칠성은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눈을 뜬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고 놀란 듯 한세라는 다시 눈을 감았다.

김칠성의 몸이 그녀에게 다가오자 한세라는 두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감쌌다.

그는 조금씩 그녀의 몸을 덥혀 가기 시작했다.

입술과 혀로, 끄리고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온몸을 더듬어 갔고 이윽고 그녀는

긴장과 경계를 풀고 그를 맞아들일 준비가 되어갔다.
가쁜 호흡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고 이제 한세라는 그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두 다리를 꼬았다가 김칠성의 다리를 휘감고 입에서 쇳소리를 냈다.

김칠성은 그녀의 몸 위에 그의 체중을 실었다.

한세라는 입안에 갈증을 느끼고 침을 끌어모아 삼켰다.

그의 목을 껴안고 가쁘게 숨을 쉬자 그녀의 깊은 곳이 잠자기 가득 차 왔다.

그녀는 환회의 소리를 질렀다.

천장의 밝은 불빛을 노려보았다.

 이제 불빛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찬란하고 터져 나갈 것 같은 기쁨이었다.
최정호 사장은 시?11를 들여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무실을 나서자 공장에서 들려오는 미싱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세 줄로 놓여 있는 미싱 앞에는 완구제품을 만드는 생산직 사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공장의 바닥과 벽 쪽에는 곰,토끼 모양의 완성품 인형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가 미싱 사이의 좁은 통로를 걷자 재단대 옆에 서 있던 공장장이 서둘러 다가왔다.
"나가시 게요?"

그의 머리칼에 털뭉치가 끼여 있었으나 최정호는 모른 척했다.
"응. 왜?"
"부속을 사와야겠어요. 안감이 20야드쯤 모자랍니다. "
"알았어. 경리과 미스 조한테 돈 달래서 사오도록 해."
이맛살을 찌푸리며 최정호는 공장을 나왔다. 언제나 부속이 모자란다고 하니 짜증이 났다.

부자재 업체와 짜고 적게 들여오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몇 백 야드나 되는 안감들을 풀어서 길이를 재볼 수도 없는 노룻이었다.
최정호는 공장 앞에 세워진 그랜저의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기다리고 있던 기사가 미끄러지듯 차를 움직였다.
"시간이 조금 늦었다. 빨리 가자."
시계를 들여다본 최정호가 말하자 기사는 속력을 냈다.
"서울 호텔입니까?"
"응. "
11시에 만나기로 했으니 40달이면 도착할 것이다.

10시 20분이니까 차가 막히지만 않으면 정시에 도착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호텔의 지하 커피숍에 들어선 최정호는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었다.
이윽고 그의 눈에 구석에 앉아 있는 여자가눈에 띄었다.

멀리서 보아도 눈에 띄는 미인이었다.

그녀가 전화로 말해 준대로 횐색의 반소매 재킷을 입고 있었다.

그녀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최정호는 사람들을 혜치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한세라 씨 맞습니까?"
"네. 배 사장님이세요?"
그녀가 흰이를 드러내 보이며 반가운 듯 물었다.
"네, 반갑습니다. "
최정호는 그녀의 앞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한세라를 찬찬히 바라 보았다.

한세라는 시선을 돌렸다.

 횐 살결에 어딘지 모르게 기분나쁜 분위기를 풍기는 40대 사내였다.

옷차림이나 장신구가 모두 고급이었으나 그녀를 바라보는 끈끈한 시선이 싫었다.

한세라는 탁자 밑에서 커다란 백을 집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부피가 커서 가져오느라고 힘들었어요. 확인해 보세요."
끄덕이며 최정호는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가방 안에는 곰과 사자와 펭귄 인형이 들어 있었다.

커다란 인형이었으므로 펭귄의 머리가 사자의 다리 사이에 처박혀 구겨져 있었다.
"됐습니다. "
최정호는 만족한 듯 머리를 』1덕였다.

가방의 지퍼를 잠근 최정호는 양복 주머니에서 횐 봉투를 꺼내 한세라에게 내밀었다.
"확인하시지요."
한세라는 봉투 속을 들여다보았다. 수표가 한 장 들어 있었다.
"줬어요. 그럼."
한세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잠간만."
최정호가 손을 들고 그녀를 불렀다. 한세라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다음엔 언제 가실 예정입니까?"
"제가 요즘 제 개인일로 바빠요. 그래서 언제가 될지 아직 모르TE어
요. "
최정호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할수 없지요.급한 일이 있으면 연락이나드리겠습니다. "
한세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숍을 나왔다. 그녀의 됫모습을 바라
보던 최정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커피숍 입구에 앉아 있는 기사가
눈에 띄었다.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기사가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4월 중순이어서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산뜻한 봄기운이 배
어 있는 것 같았다. 제일유통 사무실에 앉아 김원국은 창밖을 바라보
았다. 창틀에 나뭇가지가 걸쳐져 있었고 파란잎이 보였다. 강만철과 김
칠성이 들어왔다. 그들은 잠자코 그의 앞으로 다가와 자리에 앉았다.
"홍콩이 어수선하다. "
그들에게 몸을돌리며 김원국이 말했다. 그는 30분쯤 전에 장갑수의
전화를 받았던 것이다.
"겉으로는 평온한 것 같지만 안으로는 마약 때문에 썩어가고 있다. "
"우린 관계가 없지 않습니까?"
강만철이 물었다. 김원국은 입맛을 다시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성철이가 리첸하고 같이 살고 있는 모양이야."
"리첸 말입니까?"
강만철이 입을 벌렸다. 그는 한국식당인 아리랑에서 상처를 입었을
때 이형구와 같이 병원으로 갔기 때문에 해리슨의 집에 가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녀에 대한 말은 들었던 것이다.
"굉장한 미인이라던데‥‥‥‥
"마약 중독이다. "
"f1?"
강만철은 김원국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으나 그는 시선을 피했다.
"장수 이야기로는 성철이도 그런 증상이 보인다는데 난 도무지 이해
가 안 가는구나."
"아니, 형님, 무슨 말씀을, 성철이가요?"
강만철이 얼굴을 굳혔다.
"그래, 갑수가 빈말을 할 리가 없다. 그놈도 나한테 직접 전화하는
것을 망설였던 모앙이야."
"정말 알 수가 없다. 성철이 그놈은 냉정한 놈인데."
"제가 가보지요. 지금 당장 떠나겠습니다. "
강말철이 상체를 세우며 말했다.
"너는 안 된다. "
"아니 왜요?"
"네가 가면 성철이는 말할 것도 없고 무슨 모략이 있다면 상대편에
서도 긴장하게 돼. 오히려 역효과가 날지도 모른다. "
"아니, 그럼."
김원국은 김칠성을 돌아보았다.
"칠성아, 네가 가거라."
"예."
김칠성이 머리를 끄덕였다.
"오리엔트로 들어가지 말아라."
"갑수한테만 연락하고 다른 곳에서 묵도록 해라.그리고 성철이 하
고 그 주변을 살펴라."
"알겠습니 다. "
"성철이가 마약중독에 걸릴 놈이 아니다. 갑수 말로는 성철이는 퇴
근만 하면 리첸의 집에 들어가서 나오지를 않는다는데,아무리 리첸이
중독되었더라도 성철이까지 그렇다는 건 이해할 수 없어."
강만철은 생과에 잠긴 듯 김원국을 바라본 채 입을 열지 않았다.
"당분간 이 일은 비밀로 하고, 너는 갑수에게 연락하고 바로 출발해
"예."
김칠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님, 정말 중독입니까?"
김칠성이 방을 나가자 강만철이 믿기지 않는 듯 다시 물었다. 김원
국은 머리를 」I덕였다.
"오후 5시가 넘으면 안절부절한다는구나. 손끝을 떨고 땀을 흘린다
고 해, 언젠가 갑수가 성철이 방에 들어갔더니 오후 6시쯤 되었을 뻔
데,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더라는구나. 이를 악물고 말이다. "
"갑수는 모른 척하고 나왔다는데, 그래서 참다못해 나에게 전화를
한 거다. "
"제가 갑수를 잘 압니다. 전에 홍콩에서 데리고 있었어요. 확실한 놈
입니다. 이건 정말 비극이군요. 우리는 마약에 손을 안 댄다고 자부하
고 있었는데, 성철이가‥‥‥‥
그러다가 강만철은 머리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
"칠성이가 가서 알아보겠지."
김원국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함마는 하나씩둘씩 교실을 빠져나오는 아이들을 유심히 바라보았
다. 수업이 끝났으므로 이제 곧 아이들이 쏟아져 나을 것이다. 모두가
고만고만한 애들이니만치 자칫 하다가는 지난번처럼 놓쳐 버리는 수
가 있었다. 조미란은 2학년이었으나 몇 반인지는 몰랐다. 오늘 만나면
꼭 물어볼 작정이었다. 갑자기 떠들색한 소리가 들리더니 아이들이 한
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오함마는 혀를 찼다. 수백 명이 이렇게 쏟아져 나오는데야 찾아낼
재주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도 조미란이가 1학년 때인 작년 가을에 한
번 보았을 따름이었다.
오함마가 서 있는 정문으로 아이들이 몌지어 지났다. 그는 머리를
숙여 두루두루 살폈으나 이제는 모두 그 얼굴이 그 얼굴 같아서 어렴
풋이 남아 있던 조미란의 얼굴도 기억에서 지워지려고 했다.
"조미란! 조미란이 어디 있니?"
오함마가 다가오는 아이들에게 소리쳤다. 그러고는 갑자기 얼굴을
붉혔다. 아이들이 겁이 난 듯 그의 곁을 멀젝이 비켜 지나고 있었다.
"빌어먹을."
수백 명의 아이들을 멀거니 바라보면서 오함마는 허탈해졌다. 아이
들을 데리러 온 몇 명의 어머니들이 자식을 용케도 찾아내어 몰고 가
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아침에도 보고 어젯밤에도 본 사이인
것이다.
한몌의 아이들을 선생님이 몰고 나왔다. 노란색 가방들을 메고 노랗
게 입을 벌리는 병아리례들 같았다
"아저씨.."
갑자기 밑에서 부르는 소리에 오함마가 깜짝 놀라 머리를 숙였다.
조미란이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저씨!"
"어, 너, 미란이 맞지? 조미란이."
"응. 아저씨는 하마 아저씨지?"
"어이구, 그래, 이 자식아."
오함마는 그애를 번쩍 안아 높이 쳐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조미란의
입이 활짝 벌어졌다가 닫혔다.
"아저씨 왜 왔어?"
오함마가 아이의 손을 잡고 정문을 나서자 조미란이 물었다 머리를
두 갈래로 묶고 빨강색 셔츠에 검정색 치마를 입은 아이는 무척 귀여
웠다.
"미란이 과자 사줄려고."
"또 엄마하고 싸우려고?"

오함마는 입을 벌리고 웃었다.
"내가 언제 싸워?"
"아저씨가 오면 엄마가 신경질 내잖아. 아저씨 만났다면 엄마한테
혼난단 말야. 할머니한테도 혼나."
"그때도 혼났어."
오함마의 얼굴이 벌개졌다. 눈을 부릅떴으나 아이와 시선이 마주치
자 얼른 돌렸다. 조미란의 아파트는 길만 건너면 되었다.
"미란아, 슈퍼에서 맛있는 것 사줄게 가자."
오함마가 아파트 입구에 있는 슈퍼마켓을 손으로 가리켰다. 미란이
가 잠자코 있는 것이 윌 갖고 싶은 모양이었다. 오함마가 손을 잡아끌
자 껑충거리며 따라왔다.
"아저씨, 나 인형 사 줘."
"그래 "
"커다란 인형이야."
"그래, 사줄게."
미란이는 마음에 접어 두었던 금발머리 인형을 품에 안았다. 제과점
에서 과자를 사주면서 오함마는 시계를 보았다. 건너편 학교에서는 아
직도 학생들이 나오고 있으므로 집에 있는 할머니는 아직 걱정하지 않
을 것이다
조미란의 어머니인 민희정은 카페 '체스터'의 마담이었다. 그녀를
안 지는 10년이 되었으나 오함마는 아직 한번도 그녀의 손목조차 잡은
적이 없었다.
한 달에 한 번이나두 달에 한 번쯤 그녀가 있는 곳을 찾아가 술 한
잔을 마신 다음 돌아오는 것이 전부였다. 그 사이에 민희정은 조민술이
라는 건달을 만나 살림을 차리는가 했더니 조미란이 태어난 지 몇 개
138
월 후에 조민술은 종적을 감췄다.
1년쯤 지나 미란이가 젖을 뗄 때쯤 되었을 때 민희정은 다른 사내를
만나 살림을 차렸다. 그러나 그것도 1년이 못 가서 헤어져 버렸다. 그
동안에도 오함마는 민회정의 곁을 맴돈 셈이었다. 한 달에 한 번쯤 들
러서 같이 사는 남자 자랑하는 것을 들어 주었고, 헤어지고 나서 절망
에 빠져 울부짖는 하소연도 끝까지 들었다.
미란이가 윤치원 다닐 때 부모가 참석해야 한다는 야유회에 민희정
대신 나가 준 적도 있었다. 아기 때부터 봐온 탓인지 그도 미란이가 귀
여웠고 애착이 갔다. 그러나 차츰 민희정이 오함마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가끔 체스터로 아이에게 줄 선물을 사가지고 가면 짜증을
냈다. 오함마는 짐작하는 바가 있었으므로 언제부터인가 선물을 사가
지고 가지 않았다. 그리고 3개월쯤 발을 끊었던 것이다.
"미란아, 집에 엄마 혼자 있니?"
오함마가 미란이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주스를 마시던 아이가 눈
을 깜짝이며 오함마를 바라보았다. 의자 위에서 두 발을 대롱거리며
흔들고 있었다.
"아니, 집에 할머니 있어. 엄마는 회사 나갔어. "
"응, 그래. 아저씨는 얼니?"
"응. 아처씨는 없어."
"저, 뭐냐, 자고 가는 아저씨도 없어?"
"웅."
"빵 더 먹을래?"
"배불러."
"엄마하고 할머니한테 아저씨 만났다고 말하지 마. 알았지?"
오함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란이를 의ai에서 안아 일으켜서 땅
바닥에 내려놓았다.
"참, 너 2학년 몇 반이이?"
"3반. "
"그럼 나중에 아저씨가 또 와서 네가 좋아하는 것 사줄게, "
"자전거 사줘."
"알았다. "
아이는 인형을 가슴에 안고 아파트로 들어갔다.
다음날 밤에 오함마는 체스터에 들어섰다. 흘에는 손님들이 서너 팀
보였다. 낮익은 웨이터가 그를 방으로 안내했다. 웨이터가 나간 지 한
참이 지났어도 민희정은 얼굴을 내보이지도 않았다. 오함마가 들어을
적에 흘 안에서 손님과 앉아 있던 그녀는 오함마를 보았을 것이다. 웨
이터가 들어와서 양주와 안주를 탁자 위에 벌려 놓고 나갔다. 오함마
는 잔에 양주를 따라 흘짝이며 마셨다.
가슴이 푸근해졌다. 양주 한 병을 다 먹도록 민희정은 나타나지 않
았다. 심사가 틀어지거나 필요가 없을 때에는 아는 척도 하지 않는 민
회정의 성격을 알고 있는지라 오함마는 상관하지 않았다. 오함마는 일
어서서 방을 나왔다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자지배인이 다가와 머리를
숙였다.
"형님, 죄송합니다. "
"윌?"
오함마는 웃어 보이며 그의 어깨를 툭 치고는 계단을 올랐다. 주차
장 쪽으로 걷고 있는 오함마의 뒤에서 경적이 울렸다. 길가로 비켜선
오함마의 눈에 차안에 앉아 있는 남녀가 보였다 조수석에 앉은 것은
민희정이었다.
"아까 그 자식, 체스터에서 나온 놈 같던데. 민 마담 손님 아녀?"
핸들을 잡고 길을 혜쳐가면서 박태운이 물었다.
"그런가 봐요."
박태운은 민회정의 시큰둥한 대답에 싱긋 웃었다.
"그놈도 자네한테 침흘리고 있는 것 아녀?"
민희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민 마담이 따라 나오겠다니 내가 어젯밤 개꿈을 안 됐구
먼."
박태운은 신바람이 난 듯 큰길로 들어서자 차의 속력을 높였다.
"자아, 어디로 모실까?"
민회정은 잠자코 앞을 바라보았다. 어젯밤 미란이에게서 오함마가
학교에 찾아와 인형 사주고 과자 사준 이야기를 모조리 들었다. 그리
고 자고 가는 아저씨가 있느냐고 묻던 것까지 들었던 것이다. 민희정
은 박태운을 돌아보았다. 잘생긴 남자였다. 디자인 학원을 경영하고 있
는 그는 모델과 배우들의 프로모터기도 했다. 그는 주변에 수많은 여
자들이 있으면서도 몇 달전부터 민희정에게 치근거렸다. 노골적민 교
섭이었다. 차라리 속이 뻔한 걸 가지고 분위기를 어설프게 잡는 것보
다 그런 식의 제의가 마음이 편하긴 했다. 그러나 아까 오함마가 들어
서기 전까지 민회정은 박태운에게 몸을 줄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이
다.
차는 박태운의 단골인 듯싶은 변두리의 조그만 호텔 앞에서 멈췄다.
달려나온 보이에게 키를 던져 준 박태운이 앞장을 섰다. 열쇠를 받아
든 박태운은 거침없이 그녀를 이끌었다.
"이봐, 맥주 한잔 마셔. 쭉 들이켜."
샤워를 하고 나온 민회정에게 박태운이 맥주잔을 내밀었다.
"시원할 거야."
가운의 옷깃을 썩민 민희정은 잔을 받아 들었다. 젖은 머리가 어깨
밑으로 흘러 내렸고 두 볼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짙은 속눈썹 밑
의 검은 눈이 물기를 머금어 불빛에 반짝였다.
박태운은 감탄하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도저히 서른이 넘은 나이에
8살짜리 딸이 있는 여자로보이지 않았다. 스물을조금넘긴 막피어나
는 여자였다. 그리고 그녀의 몸은 익을 대로 익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
하자 박태운은 침을 삼켰다. 민희정은 갈증이 났던지 단숨에 맥주잔을
비웠다. 잔을 내려놓으며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
"맥주맛이 이상해요."
"그래?"
박태운은 싱긋 웃으며 그녀의 빈잔에 남아 있는 맥주를 따랐다. 그
러고는 꿀꺽이며 들이켰다.
"이제 좋아질 거야."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면서 그가 말했다. 민희정은 눈을 깜박이며 그
를 바라보았다. 가슴이 답답해 왔다. 그러고는 온몸에 찌릿찌릿한 충격
이 왔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두 다리가 꼬이고는 숨이 가빠졌다.
"아아, 왜?"
박태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옷걸이로 가더니 바지에서 혁대
를 주욱 쁩아 들었다.
"벗어."
박태운이 말했다. 그는 두 다리를 버티고 선 채 한손으로 혁대를 말
아 쥐고 있었다.
오함마는 다시 한번 아파트의 벨을 눌렀다.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
다. 5분이 넘도록 오함마는 벨을 누르고 있는 것이다. 시계를 보자 아
침 10시 30분이었다. 미란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려면 아직 시간이 있었
다. 그동안 집을 비운 모양이었다. 돌아서려다가 다시 벨을 누르자 안
에서 인기척이 났다.
"누구세요?"
민희정의 목소리였다. 오함마는 저도 모르게 화가 벌컥 났다.
"나야. "
안에서는 다시 대답이 없었다.
"이봐, 문 열어봐."
"돌아가요."
쌀쌀한 대답이 돌아왔다.
"문 열어봐."
"돌아가요! 정말 귀찮게 왜 이러는 거야?"
민희정이 문에다 대고 앙칼지게 소리쳤다. 오함마는 주춤 얼굴을 굳
혔다.
어젯밤 체스터에 들렀다가 그녀가 몸이 아파 사흘째 못 나오고 있다
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온 것이었다. 그날 밤 어느 사내와 같이 나간 후
로 몸이 아팠던 모양이었다.
"』찮아?"
오함마가 문에 대고 말했다. 갑자기 누군가가 오함마의 목덜미를 잡
아당겼다.
"네 이놈, 잘 만났다. "
민회정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아우성을 치면서 오함마의 멱살을 잡
고 매달렸다.
"이놈, 너죽고 나죽자. 네가 이놈아, 우리 희정이한테 무슨 원한이
있다고 이놈아! 이놈아!"
그러자 문이 열렸다. 문 안에서 손이 뻗어 나와 밖의 어머니를 잡았
으나 그녀는 아우성을 치면서 오함마에게 매달려 있는 통에 례어 낼
수 없었다. 옆쪽의 아파트문들이 한꺼번에 열렸다.
"들어와요!"
민희정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어머니의 새된 아우성 속에서 똑똑하
게 들렸다. 오함마는 그녀를 목에 달고 아파트로 들어섰다. 민희정의
얼굴을 본 오함마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 한쪽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고볼과 입술에 걸쳐 두어 개의 채찍 자국이 나 있었다. 입술은 터
져서 부어 있었다.
어머니는 사정을 알고 나자 소파에 앉아 찔끔거리고 있었으나 사람
잘못봐서 미안하다는 사과는 하지 않았다. 남자놈들은 모두 그렇고 그
런 놈으로 보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어머니는 너무 하쇼. 내가 이랬다고 믿었단 말요?"
오함마가 눈을 부라리며 투덜거렸다.
"에이고, 저년이 말을 안 하는데 어떻게 해. 에이고,그러고 자네가
며칠 전에 미란이 만나고 갔다는 소리도 듣고‥‥‥‥그러고 저년이 자
네가 했냐니간 대답도 안 하길래 ‥‥‥‥
오한마는 민희정을 바라보았다.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그녀는 잠
자코 앉아 있었다.
"너, 나 좀 따라와."
오함마는 벌떡 일어서서 민희정의 팔을 쥐었다. 방문을 열고들어가
안에서 문을 걸어 잠갔다.
"어떻게 된 일이야?"
오함마는 코웃음을 쳤다.
"보자보자 하니까 점점 더럽게 빠져 들어가는군그래."
"변태한테 걸렸는지, 네가 바랐는지는 모르지만 그날 밤 그놈 같은
01."
민희정은 수건으로 얼굴을 감싼 채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입을 열
지 않았다.
"미란이를 생각해, 이년아."
민회정이 수건 속에서 얼굴을 흠칫 한 것 같았다. 이제까지 10년 가
까운 세월 동안 오함마가 그녀에게 욕을 한 것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이제까지 오함마는 한번도 그녀에게 언성을 높인 적이 없었다. 세 마
디 이상 말을 한 적도 없었다. 다른 여자나 다른 사람들 앞에 서면 제
법 말발을 세웠으나 민회정 앞에 오면 그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지냈던 것이다.
"너는 내 첫사랑이야."
오함마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니가 살림 채릴 때마다 내 가슴이 찢어진 것을 네년은 모를 거다 "
"그리고 니가 니 남자 자랑할 때도 그랬어,"
"니 살림이 깨졌다고 날보고 울 적에도 마찬f'#지야."
"그래서 너 대신 미란이한테 정을 쏟고 싶었던 거야. 너를 닮은 미란
이를 보고‥‥‥‥
"네년은 10년 동안 날 이용해 먹었지만 나는 네년을 잊지 못해서 니
몸뚱이의 상처 정도가 아니라 만신창이야, 이년아."
"차라리 이런 짓까지 할 바에는 죽어라. 내가 미란이를 키울 테니까.
네년은 살 가치가 없는 년이야."
오함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말소리도 이젠 듣기 싫었으므
로 방문을 열고 나왔다. 어머니가 놀라 일어섰다.
"어머니, 안녕히 계세요.나 이제 다시는 이 집에 안 옵니다. 그런데
오함마가 주춤거렸다.
"저, 내가 전에 미란이한테 자전거를 사준다고 약속했어요. 나가서
자전거를 보낼 테니까 받아두세요."
"아니, 이 사람아."
어머니가 손을 저으며 일어섰다. 민회정은 방안에서 꼼짝 않고 있는
모양이었다. 오함마는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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