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9. 숙청 (10)
(1882)숙청-19
그 순간 조철봉은 피식 웃었다. 실소(失笑)였다.
가차 없이 반발한 김옥희가 어이없다기보다 그런 미끼를 내놓은 윤달수에 대한 웃음일 것이다.
웃고 나자 조철봉의 가슴이 조금 편안해졌다.
김옥희에 대한 동정심도 일어났다.
싫은 상대를 억지로 만나야 하니 얼마나 심사가 뒤틀리겠는가?
아직 단련이 덜 된 김옥희의 순수성까지 느껴졌다.
조철봉이 지그시 김옥희를 보았다.
김옥희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마주본다.
제가 한 말의 정도를 알고 있는 터라 이를 앙다물었고 입술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스물다섯, 아니면 스물일곱 정도나 되었을까?
“그럼 홀랑 벗어 봐.”
그 순간 조철봉은 제가 뱉은 말에 놀라 눈을 치켜떴다.
인간은 꼭 머릿속에서 다음 말을 연구해놓고 나서 입으로 내놓는 것이 아니다.
저절로 말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버릇이나 관성 때문에,
그러나 머릿속에서 갈등이 일어나는 경우에는 억제를 뚫고 튀어나오는 말들이 많다.
바로 지금같은 경우일 것이다.
김옥희의 지지 않겠다는 시선을 본 순간에 조철봉의 자제력이 풀렸다.
그때였다.
김옥희가 시선을 그대로 둔 채 먼저 치마부터 벗는다.
매듭을 풀자 연분홍 치마가 스르르 발밑으로 흘러내렸으며 곧 흰색 속치마가 남았다.
조철봉은 어금니를 물었다.
그때 김옥희가 저고리 고름을 풀더니 쉽게 팔을 빼내었다.
그러자 맨 어깨와 팔이 드러났다.
가슴 윗부분까지 보인다.
흰 피부, 살집이 좋아서 어깨가 둥글다.
김옥희가 치마와 저고리를 집더니 옆쪽 소파 귀퉁이에 개어 놓았다.
손놀림이 차분했고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이윽고 허리를 편 김옥희가 짧게 파마한 머리를 귀밑으로 쓸어 넘기며 조철봉을 보았다.
묻는 시선이었다.
그것을 말로 표현한다면 “더 벗을까, 이 새끼야” 정도 될 것이다.
다시 그 시선에 대항해서 더 벗으라고 할 뻔했던 조철봉이 이번에는 자제했다.
어금니를 물었다가 푼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했다고 하자고.”
김옥희의 눈이 조금 커졌고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누가 물으면 그거 했다고 하잔 말야.”
그러고는 조철봉이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카메라를 장치해놨는지 모르겠지만 어쨌건 김옥희씨가 최선을 다 했다는 건 찍혔겠지.”
그러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오해 하는 게 있어.
내가 여자라면 무조건 덤벼드는 놈이라고 믿는 거야.”
그때 김옥희가 시선을 들고 조철봉을 똑바로 보았다.
이 표정을 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여전히 김옥희의 얼굴에는 적의가 실려 있는 것이다.
김옥희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난 날 싫어하는 여자하고 자본 적이 없어.
난 억지로 그걸 해본 적이 없단 말이야.”
“…….”
“내가 무슨 짐승도 아니고 기를 쓰고 집어넣을 이유가 없지.”
그러고는 조철봉이 외면한 채 말했다.
“어서 옷 입어. 옷 입고 좀 기다렸다가 나가자고.
금방 나가면 좀 미안해서 말야.”
그때 김옥희가 속치마만 입은 채로 소파로 다가가더니 한쪽 귀퉁이에 앉았다.
어깨를 웅크리고 있었는데 이제는 옆모습만 보였다.
김옥희가 낮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런 일 처음이라서요.”
(1883)숙청-20
지금까지 조철봉이 반평생을 살아오면서 순전히 호의로 여자를 소개받은 적은 단 한번도 없다.
더구나 그 여자가 미인이었던 적은 전생에도 없었을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다 음모는 아니더라도 복선 내지는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여자를 소개시켜 주었다.
세상에 어떤 덜 떨어진 놈이 조건없이 다른 놈에게 예쁜 여자를 소개시켜 주겠는가?
제 애인이 있다고 해도 그렇다.
제 마누라에다가 애인까지 있다고 해도 그렇다.
거기에다 플러스 제 연장이 고장나서 당분간 사용불능이 되었다고 해도
소개시켜 주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조철봉 기준이다.
다른 놈 속은 들여다보지 않았지만 인간은 대부분 제 기준으로 타인을 평가하지 않는가?
윤달수가 김옥희를 이런식으로 소개시켜 준 것도 다 계획이 있기 때문이다.
윤달수는 그것을 조철봉이 짐작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추진시켰다고 봐야 한다.
그럼 그 저의는 무엇이겠는가?
조철봉이 머리를 들고 김옥희를 보았다.
아직도 저고리를 벗은 채인 김옥희는 둥근 어깨의 옆모습을 보인 채 앉아있다.
왼쪽 팔이 통째로 드러났다. 희고 긴 팔이다.
비곗살이 아니라 테니스 선수 같은 탄력이 느껴지는 팔이었다.
“윤달수씨한테서 어떤 지시를 받았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오늘 일은 내가 잘 해결할 테니까.”
조철봉이 김옥희의 옆 얼굴에 대고 말했다.
“오늘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으면 같이 잤다고 하라니까?
그럼 아무 소리 못할 거야.”
“고맙습니다.”
다시 김옥희가 인사했지만 여전히 시선은 앞쪽으로 향해져 있다.
이제는 조철봉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이다.
“근데, 처음이야?”
슬슬 답답해진 조철봉이 불쑥 물었다.
“윤달수씨가 말하던데, 거기 처녀라고. 그거 정말이야?”
김옥희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시선이 25도쯤 아래로 내려졌다.
의자에 등을 붙인 조철봉이 느긋해진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요즘 세상에 드문 일이어서 그래. 더구나 김옥희씨 같은 미인이 말이야.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구먼.”
말을 하다보니 더 궁금해졌으므로 조철봉이 정색했다.
“사실이야? 사실 아니라도 상관없어.
다음부터는 윤달수씨한테 그런 소개는 우습기만 하니까 빼라고 충고해야겠어.”
“정말입니다.”
김옥희가 그때서야 옆에 놓인 저고리를 집어 입으면서 말했다.
“전 난잡하게 자라지 않았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제 동무들도 다 그렇습니다. 모두 처녀랍니다.”
“음, 그런가?”
“제 동무들은 모두 군에 가서 복무하다가 제대를 할 때까지 처녀로 남아 있었습니다.”
“설마 그럴라고? 군인들끼리 연애도 할 텐데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남조선처럼 그렇게 난잡하지 않습니다.”
“남조선이 누가 난잡하다고 하는 거야?”
“저도 여기 나오기 전에 남조선 신문, 잡지 다 봤습니다.”
“그런 일은 극히 일부분이라고.”
입안이 쓴 조철봉이 입맛을 다셨다.
처녀성은 나름대로 소중하다.
또한 처녀성을 내주는 것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철봉 입장에서는 전혀 아니었다.
조철봉 자신이 동정을 사창가에서 떼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동정이나 처녀성이 조철봉에게는 성인이 되기 위한 딱지,
그냥 허물 같은 느낌이었다.
몸만 함부로 굴리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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