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1. 열정(8)
(1573) 열정-15
“자, 그러면.”
정색한 조철봉이 말했으므로 이재영은 긴장했다.
나머지 셋도 모두 몸을 굳히고 조철봉을 본다.
그 순간 재영의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이 분위기에 감동을 받은 것이다.
직장 생활을 해온 터라 재영은 이런 상태를 안다.
가끔 회의때 이와 비슷한 분위기를 느꼈으니까.
몰두한 상태, 목표를 향해 팀원이 집중할 때 에너지가 치솟는 느낌이 들면서 감동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동료의식, 애사심, 사명감과 책임감, 거기에다 스스로의 자부심까지 섞인 감정이다.
지금 조철봉이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그때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정리해서 진행합시다.
강상호씨는 보먼한테 e메일을 보내 오그라들도록 만들어 주시고.”
조철봉이 흰 얼굴의 사내에서 김동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김 사장님은 보먼과 더글러스의 사생활에 대한 증거를 가능한 한 빨리 파악해 주시도록.
서둘러야 될 것 같으니까.”
“이틀 정도면 끝낼 수 있습니다.”
김동수가 자신있게 말했을 때 조철봉이 경택에게 말했다.
“명일전자 전무가 실권자일 것 같은데 그자 분위기를 알아보도록.
회사에 불만이 많다면 이용할 수도 있을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경택의 대답을 들은 조철봉이 이번에는 재영을 보았다.
“이 부장은 내일 오전에 나하고 험프리 고등학교에 같이 가십시다.”
“네? 어디요?”
재영이 놀라 되물었다.
갑자기 고등학교가 튀어나오는 바람에 어리둥절한 것이다.
그러자 김동수가 가볍게 헛기침을 하더니 대신 설명했다.
“저기, 다운타운의 탬플가 끝 쪽에 있는 고등학교지요.
내일 저희 직원이 안내해 드릴 겁니다.”
그랬지만 재영의 의문은 아직 안풀렸다.
재영의 표정을 본 김동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 회장님 대신 제가 말씀 드리지요.
내일 험프리 고등학교에서 캘리포니아주지사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설립한
장학재단 모금 행사가 있습니다.
오전 11시반에 시작됩니다.”
그때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골드마켓의 에드워드 골드먼 사장이 후원회원으로 되어 있어요.
그곳에서 골드먼 사장을 만날지도 몰라.”
재영의 시선과 마주치자 조철봉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정색하고 있었으므로 뭔가 살피는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난 골드먼보다 아널드 슈워제네거를 만나서 사인이라도 하나 받았으면 좋겠어.
그 덩치는 어릴 적 내 우상이었거든.”
그러더니 조철봉이 재영에게 물었다.
“람보 영화 봤습니까?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주연으로 나왔는데.”
“사장님.”
하고 경택이 불렀다가 헛기침을 하고 머리를 돌렸다.
김동수는 창 쪽을 향해 외면했고 강상호는 탁자를 내려다본 채 얼굴이 빨개졌다.
람보 주인공은 같은 근육질이지만 실베스터 스탤론이다.
재영은 람보를 보지 않았어도 그쯤은 안다.
“그것이 4편까지 나왔지? 아마.”
여전히 눈을 가늘게 뜨고 조철봉이 그렇게 말했을 때 재영의 심장이 다시 세게 뛰었다.
조철봉도 분위기를 바꾸려고 이러는 것이다.
딱딱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려고 사인 받는다는 이야기부터 엉뚱한 람보까지 내놓았다.
그때 조철봉이 손목시계를 보면서 말했다.
“자, 오늘 작전회의는 이것으로 마칩시다.”
재영은 회의가 참 산뜻하게 끝난다고 생각했다.
(1574) 열정-16
다음 날 오전 11시 반이 되었을 때 이재영은 조철봉과 함께 험프리 고등학교 강당에 앉아 있었다.
단상으로 막 소개를 받은 주지사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영화에서보다 더 멋진 모습으로 등장하자
내빈들이 박수로 맞았다.
옆에 앉은 조철봉은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상기된 얼굴에 두 눈이 번들거렸고 박수에도 힘이 실렸다.
‘로비는 이렇게 하는 모양이군.’
슈워제네거의 연설이 시작되었을 때 앞쪽에 시선을 준 채로 재영이 그렇게 생각했다.
조철봉은 한 마디도 못 알아들으면서도 열심히 슈워제네거를 보고 있다.
‘좀 무식한 줄 알았는데 일을 시작하니까 철저하구나. 마치 육감이 뛰어난 짐승 같다.’
재영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이런 작전으로 여자를 꼬시면 백발백중이겠다.’
슈워제네거의 축사는 짧았지만 듣기 편하고 감동적으로 끝났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고 조철봉도 열렬히 박수를 쳤다.
“대단해요.”
박수를 치고 난 조철봉이 상기된 얼굴로 재영에게 말했다.
“내가 말은 잘 못 알아들었지만 분위기는 느껴져. 아주 감동적이었어.”
재영은 숨을 들이켰다.
갑자기 웃음이 터지려고 했기 때문이다.
방금 조철봉은 ‘잘’이라는 부사를 썼다.
영어로는 ‘very’가 될 것이다.
그 ‘잘’은 어느 정도 영어를 하는 인간이 써야 어울리는 표현인 것이다.
그런데 조철봉은 아주 먹통이다.
호텔 커피숍에서 웨이터가 물 드실 거냐고 묻는 말도 못 알아들었다.
그러나 순간적인 웃음기를 참고 숨을 뱉고 난 후에 재영은 조철봉이 슈워제네거가 풍기는
분위기를 이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원회 행사는 효율적으로 진행되었다.
쓸데없고 긴 찬조연설이나 축사는 일절 생략한 채 슈워제네거가 기부금을 받았다.
먼저 후원회원이 슈워제네거에게 후원금을 냈는데 옆에 선 사회자가 후원회원
이름과 금액을 마이크로 불러주었다.
박수가 일어났고 후원금액이 많을 때는 함성이 터졌다.
“골드마켓의 에드워드 골드먼 사장, 5만달러.”
에드워드 골드먼은 큰 키에 마른 체격이었다.
색이 바랜 듯한 금발머리에 코가 컸다.
슈워제네거가 활짝 웃는 얼굴로 골드먼을 껴안더니 등을 넓은 손바닥으로 두 번 두드렸다.
골드먼은 따라 웃었지만 수줍은 표정이었다.
5만달러는 금액이 많은 편에 들었다.
후원회원 중 10만달러를 낸 회원이 두 명 있었고 5만달러는 골드먼까지 세 명이다.
나머지는 1만달러, 또는 5백달러도 있었다.
후원회원의 기부금 접수가 끝나고 일반인의 차례가 되었으므로 조철봉과 재영은 열에 끼어 섰다.
일반인은 1백달러에서 2백달러 정도였다.
“여기.”
조철봉이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어 재영에게 내밀었다.
봉투에는 한국의 대동전자라고 영문으로 적혀 있었다.
“10만달러요.”
불쑥 조철봉이 말했으므로 재영은 다시 숨을 삼켰다.
10만달러면 최고 금액이다.
지금까지 후원회원 중 두 명만이 10만달러를 냈다.
재영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멀뚱한 표정으로 마주보았다.
“한국 대동전자라고 분명히 말해요.”
“네, 회장님.”
머리를 끄덕인 재영이 심호흡을 했다.
10만달러면 오더를 나눠줄 골드마켓이 낸 후원금의 두 배나 된다.
에드워드 골드먼은 대동전자 이름을 알 것이다.
그렇다면 골드먼은 이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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