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7. 열정(4)
(1565) 열정-7
이재영은 30대 중반쯤으로 보였지만 여자 나이만큼 맞히기가 힘든 것이 없다.
직급이 부장쯤 되었으니 최소한 그 정도 나이는 먹었을 것이라고 짐작했을 뿐이다.
단정한 정장 차림의 이재영이 앞쪽에 앉더니 조철봉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대동전자 무역2부장이라고 박혀 있다.
“앞으로 제가 사장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앉은 채로 이재영이 머리를 숙여 다시 인사를 했다. “나야, 뭐.” 말끝을 흐린 조철봉이 소파에 등을 붙였다. 옆쪽에 앉은 최갑중이 이쪽 저쪽을 힐끗거리고 있는 것이 아까부터 꺼림칙했기 때문이다.
재영이 다시 말을 이었다.
“전시회 준비팀은 어제 출발했습니다. 저는 사장님 스케줄에 맞춰서 모시고 갈 계획입니다만.”
“전시회가 언제부터 열린다고 했지요?” 조철봉이 묻자 재영이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앞쪽에 놓았다. “이틀 후부터 열흘 간입니다. 그동안에 골드 마켓측과 협상이 진행됩니다.”
“골드 마켓의 실무자, 그러니까 오더를 결정할 수 있는 실권자는 파악했습니까?”
“네.” 재영이 조철봉의 앞에 놓인 서류를 눈으로 가리켰다. “작년과 같습니다. 영업담당 중역 보먼과 부장급인 더글러스입니다.”
“그럼 그 둘이 작년 오더도 결정했단 말이죠?” “예, 사장님.” “그놈들이 리베이트를 챙긴 겁니까?” “그건.” 머리를 든 재영이 정색하고 조철봉을 보았다. 눈동자가 흔들리다가 고정되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이 사장은 로비만 했으면 오더를 땄을 것이라고 하던데.” “그럴 기회가 많았으니까요.” “작년에도 이 부장이 전시회에 참석했습니까?” “네, 사장님.” “작년에 그놈들이 리베이트를 요구한다든가 그런 눈치를 보이던가요?” “네, 여러 번요.” 재영이 시선을 내렸다가 들었다. “하지만 저희들은 그럴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눈치를 보입디까?” “서로 상부상조하자는 식으로….” “아하.” “구체적으로 이야기는 꺼내지 않더군요. 이쪽에서 먼저 제의하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습니다.”
“하긴.”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갑중을 보았다. 갑중도 따라서 머리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그놈들은 아쉬울 게 없거든. 이쪽에서 제시하는 것이 순서일 테니까.”
혼잣소리처럼 말한 조철봉이 다시 재영에게 물었다. “이 사장이 나한테 이 일을 부탁한 이유를 아시지요?” “네, 사장님.” 정색한 재영이 말을 이었다. “로비를 맡긴다고 하셨습니다.” “가능성이 있을 것 같습니까?” 그렇게 물은 것은 갑중이다. 불쑥 묻고 난 갑중이 조철봉의 눈치를 보더니 뒷머리를 긁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조철봉은 재영에게 시선을 주었다.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때 재영이 말했다. “작년에 오더 놓쳐서 분했어요.” 재영이 어깨를 올렸다가 내리면서 숨을 길게 뱉었다. “로비만 잘 하면 될 것 같아요.” |
(1566) 열정-8
조철봉이 누구인가?
편법의 달인이며 더 솔직히 말하면 사기의 대가(大家)축에 드는 인간 아닌가?
한때는 강도짓 비슷한 일까지 저지르며 축재를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인간이다.
로비? 말이 좋아서 로비지 그 또한 사기다.
금방 이재영은 상부상조한다는 표현을 썼는데 주고받는 당사자만 좋을 뿐이지
나머지는 다 피해를 입는다.
그 피해자는 구매자 또는 선량한 국민이 된다.
눈을 가늘게 뜬 조철봉이 앞에 앉은 재영을 지그시 보았다.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이 자세 또한 사기. 재영의 알몸을 떠올리고
절정에 올랐을 때의 표정과 신음소리를 연상하는 중이다.
이때는 에너지가 상승되는 느낌이 되면서 만사가 긍정적, 낙관적으로 펼쳐진다.
그러나 조철봉의 입에서는 생각과 다른 말이 뱉어졌다.
물론 표정도 엄숙해져 있다.
“신중하게 처신해야 됩니다.
로비 잘못하면 안 하는 것보다 못해요.”
재영은 눈만 크게 떴을 뿐 대답하지 않는다.
하긴 로비는 조철봉의 몫인 것이다.
“제품은 경쟁력이 있겠지요?”
조철봉이 묻자 재영의 얼굴이 환해진 것 같았다.
상반신까지 앞으로 굽힌 재영이 말했다.
“품질, 디자인, 가격 모두 경쟁력이 있습니다.
전자제품 전시회에서 우수제품상을 다섯 번이나 수상했지요.
물론 국제 전시회에서요.”
“이 부장은 대동전자에서 몇 년이나 근무하셨지요?”
그렇게 조철봉이 묻자 재영이 주춤했다가 대답했다.
“4년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전자계통 회사에 있다가 대동전자에 과장으로 특채되었지요.”
“그렇군요.”
“작년에 부장이 되었지만 아직 부족합니다.
많이 가르쳐주세요.”
“결혼은?”
“아직 미혼입니다.”
그러더니 웃지도 않고 덧붙였다.
“결혼 계획은 없습니다.”
조철봉도 무표정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요즘은 30이 훨씬 넘어서도 미혼 남녀가 많다.
조금도 감동적인 일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의외로 미인축에 드는 여자가 독신으로 사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좋아요. 그럼.”
조철봉이 재영에게 말했다.
“모레쯤 출발하기로 합시다.”
“예, 사장님.”
그러더니 재영이 가방에서 명함 한 통을 꺼내어 조철봉의 앞에 놓았다.
“대동전자의 회장으로 사장님 명함을 만들어 왔습니다.
그래야 활동이 자연스러우실 것 같아서요.”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재영이 옅게 웃었다.
“회장님으로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회장님으로 부르겠습니다.”
“회장이라.”
“예, 회장님.”
자리에서 일어선 재영이 다시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더니 물었다.
“그럼 모레 몇 시 비행기로 티켓을 끊을까요?”
그러고는 재영이 다시 웃었다.
“회장님 여행 경비는 모두 저희 회사에서 부담한다고 사장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흥, 이 사장이 계산은 분명하구먼.”
따라 웃은 조철봉이 힐끗 갑중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후 비행기가 좋겠어요.”
“네, 회장님. 알겠습니다.”
재영의 인상은 좋았다.
일 처리도 수준급처럼 보였으므로 조철봉은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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