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8. 저런인생(3)
(1371) 저런인생-5
근로자 아파트는 한랜드의 각 사업장 종업원들의 숙소로 건설되었는데 유경진 자매는
30평형 방 두 개짜리를 임대 받았다.
식당에서 따라온 종업원들이 집안에다 술과 안주를 내려놓고 갔으므로 경진 자매는
상을 차리기만 하면 되었다.
최갑중은 아파트까지 따라오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래서 막상 응접실에서 넷이 다시 술을 마시게 되자 초조한 기색이 드러났다.
시계를 슬쩍슬쩍 보다가 조철봉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더니 양주 한 병이 거의 비워질 무렵에 조철봉에게 말했다.
“사장님, 저는 가봐야 되겠는데요.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갑중이 뒷머리를 긁었다.
“숙소에서 처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짓말이다.
갑중에게는 처제만 있고 처남은 없는 것이다.
조철봉도 뻔히 알고 있는 거짓말을 하는 것은 같이 있기가 거북하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갑중은 조철봉하고 수백번 이런 분위기를 만들었지만 같은 집에서 논 적은 없다.
그것이 갑중식(式)의 예의다.
조철봉이 잠자코 머리를 끄덕이자 갑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아침 몇 시에 모시러 올까요?”
갑중이 물었다.
“8시면 되겠습니까?”
“그 정도면 됐다.”
“그럼 정각에 차를 보내겠습니다.”
그러더니 경진과 경미를 향해 차례로 머리를 숙여 보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염려하지 마세요.”
경진이 웃음띤 얼굴로 대답했고 경미는 따라서 인사만 했다.
갑중을 배웅하고 돌아온 자매가 다시 술상에 앉았을 때 조철봉이 경미를 보았다.
조철봉이 경미하고는 아직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지만 갑중이 묻는 말에 대답한 것은 들었다.
28세. 서울에서 조그만 옷가게를 하다가 손해를 보고 3년 만에 문을 닫았다는 것이다.
남자는 없다고 했으나 그 말은 갑중도 건성으로 듣는 것 같았다.
통과의례 내지는 예의상 물었기 때문이다.
젊고 미인 축에 드는 여자한테 남자 관계를 묻는 것이 이런 분위기에서는 오히려 예의인 것이다.
묻지 않는 것이 무시 받는 기분을 준다.
“거긴 실연 당했나?”
불쑥 조철봉이 묻자 경미는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놀란 것 같지는 않았다.
대신 옆에 있는 경진이 키득 웃었다.
경진이 이목구비가 선명한 미인이라면 경미는 은근한 쪽이었다.
선이 부드럽고 약하다.
그러나 찬찬히 뜯어보면 볼수록 감칠맛이 난다.
꾸민 얼굴이 아니다.
그때 경미가 입을 열었다.
“네, 그래요.”
시선을 내린 채 경미가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기 당했다고 하는 것이 맞겠네요.”
“허어, 상대는 사기꾼이겠구먼.”
조철봉이 가볍게 말을 받았다.
그러고는 빈 잔을 내밀자 경진이 술을 채웠다.
갑중은 조철봉이 경미에게도 눈독을 들이는 것을 눈치 챘을 것이다.
갑중이 아니더라도 조금만 예민한 인간 같으면 그 낌새를 알 수가 있다.
본래 조철봉을 모시려고 두 자매를 준비시킨 갑중이다.
제 파트너랍시고 옆에 앉은 경미를 챙길 생각은 없었다고 봐야 될 것이다.
“네, 사기꾼이었습니다.”
경미가 역시 고분고분 대답했다.
“그런 사기꾼한테 당한 제가 너무 부끄러워서 그 땅에 있기가 싫었지요.
언니하고 상황은 전혀 다르지만 분위기는 비슷했어요.”
(1372) 저런인생-6
조철봉은 경미를 정색하고 보았다.
경미가 어떤 사기꾼을 만났는가는 정말이지 알고 싶지 않았다.
그 사기꾼에게 경미는 모든 것을 다 빼앗긴 것이 분명했다.
몸과 마음, 거기에다 재물까지. 여자 상대의 사기꾼은 간교하고 악랄하다.
그때 경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다 지난 일입니다. 다시 그 일을 끄집어내고 싶지 않아요.”
“잘 생각했어.”
마음이 가벼워진 조철봉이 경미의 잔에 술을 채워주며 말했다.
“거긴 아직 젊어. 여기서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산다는 게 뭔지.”
옆에 앉은 경진이 10년은 더 나이든 표정을 짓고 말했다.
“시간이 지나니까 그럭저럭 살게 되더군요. 그 당시에는 정말 못견딜 것 같았는데 말이죠.”
조철봉이 잠자코 경진의 얼굴을 보았다.
문득 자신이 이런 경우를 당한 적이 있는가 되돌아 보았기 때문이다.
없는 것 같다.
수없이 사기를 쳤지만 당한 적은 거의 없다.
물론 여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여자의 몸을 노리고 사기친 적은 있지만 마음이나 돈을 노린 적은 없다.
“난 말야.”
눈을 가늘게 뜬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내 인생을 돌이켜 보았는데,
난 거짓말을 하거나 사기를 친 기억이 한번도 없는 것 같다.”
“그러시겠죠.”
정색한 경진이 머리를 끄덕였다.
“한랜드를 경영하시는 사장님이 그러실 분이 아니죠.”
“난 그런 놈들을 이해할 수가 없어.”
다시 한모금 술을 삼킨 조철봉이 의자에 등을 붙였을 때
안쪽 방에서 아이가 칭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서둘러 일어선 경진이 방으로 들어갔을 때 조철봉이 경미에게 물었다.
“최사장이 뭐라고 했지?”
“잘 모시라구요.”
경미가 금방 대답했다.
이제는 조철봉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경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언니하고 같이는 싫어요. 짐승도 아니고.”
“그래, 나도 동감이야.”
“그럼 누구 방에서 주무실거죠?”
여전히 정색하고 시선을 준 채 경미가 물었다.
“언니? 아니면 제 방?”
“이거 곤란하군.”
“거봐.”
경미가 눈을 흘겼을 때 조철봉의 가슴이 출렁거렸다.
색욕이 치솟아 올랐기 때문이다.
가끔 이렇게 사소한 동작에도 욕망이 솟을 때가 있다.
조철봉은 이런 순간이 행복하다.
경미가 입술을 비죽이며 말했다.
“남자들은 다 똑같아.”
“겪어본 모양이군.”
불쑥 그렇게 말했던 조철봉이 아차 하고는 경미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경미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요, 겪었어요.”
다시 잔잔한 표정이 된 경미가 말을 이었다.
“서울에 있을 때 룸살롱에 두달쯤 나갔었거든요. 거기서 몸을 팔면서 겪었죠.”
“…….”
“여기도 새 세상이라지만 하는 일은 거기하고 똑같죠, 뭐.”
그때 조철봉이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긴 숨을 뱉었다.
“그래, 오늘밤은 언니하고 있을게.”
“그러실 줄 알았어요.”
경미가 태연히 머리를 끄덕였다.
“사장님은 그러실 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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