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장군의 아들

제2부 黑龍의 飛翔-혼돈 57

오늘의 쉼터 2014. 8. 27. 11:29

제2부 黑龍의 飛翔-혼돈 57 

 

 

신경에 도착한 종로꼬마는 왕사부를 만났고,

십팔계를 연마하기 시작했다는 소식만을 전해 왔다.

꼭 1년 동안만 연수하고 돌아오겠다고 했다.

그후로는 소식 한마디 전해 오지 않았다.

그의 약속대로라면 꼭 1년이 지났으니까, 돌아올 무렵이었다.

일본 주먹패로부터 정식 도전장을 받고 있는 지금,

종로꼬마의 직계 부하인 머리 빠진 개고기가 자신의 보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김두한이 자신의 불알 친구이자 심복 부하인

종로꼬마를 아쉬워하며 기다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종로꼬마란 별명이 붙을 만큼 키가 작아서 흠이지만,

그 대신 총알같이 잽싸고 예민하고 눈치가 빨라 싸울 때도

눈치로 잘 피하여 맞는 일이 없었다.

앳된 예쁘장한 얼굴에 내성적인 성격이었으나,

한번 화가 났다 하면 그대로 불이었다.

이제 중국 무술 십팔계를 완전히 습득하고 돌아오면,

김두한의 오른팔 노릇을 하게 될 것은 물론,

종로패의 큰 그릇 역할을 하게 될 것이었다.

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나타난다던가,

바로 종로꼬마가 이날 아침 홀연히 나타난 것이다.

홀연히 돌아오기는 했지만 소리 없이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아니, 너무나 떠들썩하게 나타난 것이다.

이날 아침 새벽 운동에서 돌아오자마자 일본 주먹패의 도전장을 받게 된

김두한은 참모급 주먹들을 조양 여관으로 긴급히 불러들였다.

긴급 소집을 받은 굵직굵직한 주먹들이 삽시간에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망치·김무옥 등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참모들을 위시하여 팔찌·다루마찌·낙원동 칠복이·

단성사의 용돌이 형제·다람쥐·장대·시구문패의 돼지 등등 네 칸이 실한 여관방은,

그들의 굵직굵직한 몸집으로 하여 서너 명부터 만원이 되더니,

더는 발을 들여놓을 틈이 없으리만큼 빽빽하게 들어찼다.

모여든 주먹패들은 붓글씨로 된 달필의 도전장을 앞에 놓고 문자 그대로 이구동성이었다.

“쪽발이놈들이 우릴 우습게 봤어! 그저 깡그리 때려부숩시다!”

“그저 맷돌로 갈아버리듯 몽땅 가루로 만들어버립시다!”

싸움이라면 밥보다 좋아하는 무리들이었다.

맞붙고 싶으면 당장 맞붙을 일이지,

1주일이나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이들로서는 지루해서 못 견딜 일이었다.

“뭐, 그럴 것 없이 지금 당장 혼마찌깡으로 쳐들어갑시다. 쇠뿔은 단김에 빼랬다구.”

낙원동 칠복이가 드럼통 같은 거구를 좌우로 천천히 흔들면서 말했다.

그 역시 성미가 급하기도 했지만,

이번 싸움에서 용명을 떨쳐 종로패의 후참자(後參者)로서,

보다 신임을 얻겠다는 심산이었을지 모른다.

“그래요, 그래!”

“당장 쳐들어가요!”

“모조리 까부셔요!”

하나같이 과격파였다.

마음속으로나마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두목 김두한뿐이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섣불리 서두를 일이 아니지…….)

김두한이 자신의 의견을 막 개진하려 할 그때였다.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후닥닥, 닭이 홰치는 소리와 함께 몇 번 떡 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쿵,

나뭇단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윽!”

누군가가 얕은 신음 소리와 함께 나둥그러졌다.

그것은 실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뒤이어 낭랑한 목소리가 여관집 앞마당에서 울려 퍼졌다.

“두한아.”

조선 주먹패의 총본산이라 할 조양 여관으로 뛰어들면서,

그 총두목인 김두한을 아이 이름 부르듯 부르는 놈이 있다니…….

죽지 못해 환장한 놈이 다 있군.

문 쪽에 앉아 있던 장대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고,

다루마찌가 그 가뿐한 몸가짐으로 뒤쫓아 일어났다.

장대와 다루마찌는 너무나 뜻밖의 상황을 확인해야만 했다.

대문 앞에 큰대자(大)로 나자빠져 있는 거구를 보았고,

그 거구의 몸집에 한 발을 올려놓고 무엇인가 중얼거리고 있는 단구의 사나이를 본 것이다.

나자빠져 있는 자는 왕발이었고,

왕발의 커다란 몸집 위에 한 발을 올려놓고 있는 자는 다름 아닌 종로꼬마였기 때문이다.

“형님! 종로꼬마예요. 종로꼬마!”

다루마찌가 안쪽에다 대고 소리치면서도,

너무나 뜻밖의 상황에 놀라 대문 쪽으로 쫓아 나가면서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일어난 상황의 경위는 이러하다.

두목 김두한이 기거하는 조양 여관 골목 앞에는 항시 똘마니들이 경계를 하고 있었다.

혼마찌깡처럼 항시 주먹패들이 상주하고 있을 수는 없었지만,

골목과 대문 앞에는 늘 몇몇의 주먹들이 교대로 망을 보고 있었다.

거기에 종로꼬마가 들어선 것이다.

조그만 여행용 손가방만 든 그는 방금 만주 신경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김두한을 보고 싶어 달려오는 길이었다.

모습은 초라했지만, 그는 금의환향(錦衣還鄕)하는 기분이었다.

물론 그가 1년 동안이나 서울을 비웠다고는 하지만,

어지간한 주먹패들은 종로꼬마라고 하면 모두 그 얼굴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얼굴을 알 만한 자들이 두목의 긴급 소집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때였다.

그동안을 왕발이 대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발씨름, 발씨름이라기보다 정강이씨름으로 김두한과 맞붙어 싸웠다가 패한 후,

그의 부하가 된 바로 그 왕발이었다.

힘도 좋았지만 7척 거구로 한몫 보는 장사였다.

마침 종로꼬마가 팔랑개비와 같은 가뿐한 걸음걸이로 들어섰다.

“너, 뭐야?”

왕발이 물었다.

너 뭐냐고 묻는 것은, 주먹패들의 상투적이며 도전적인 언사였다.

이 물음에 위협을 느끼고 상대가 고분고분해지면 무사하지만

이 물음에 뻣뻣하게 맛서면 필연적으로 맞붙게 마련인 것이었다.

“넌 또 뭐야? 나, 째보를 만나러 온 종로꼬마야!

종로꼬마를 몰라보다니 너, 어디서 굴러먹다 온 개뼈다귀냐?”

종로꼬마는 고개를 발랑 젖히고 쳐다봐야만 하는 왕발의 높은 키를 바라보면서 조소하듯 말했다.


째보란 김두한의 또 하나의 별명이다.

눈이 작대서 붙여진 별명인 것이다.

다소 얼굴이 얽었대서 곰보라 불리기도 했다.

하긴 상감의 흉도 등뒤에서는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이니까,

두목의 별명쯤 얼마든지 부를 수 있는 것이겠지만,

감히 그의 면전에서 째보니 곰보니 부르는 자는 없었다.

김두한 자신이 그 별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왕 별명으로 불린다면 일본놈이 붙여준 일본말의 별명이지만 잇뽕(한 방)이 마음에 들었다.

주먹 한 방이면 누구나 간다는 뜻의 별명이 주먹계의 두목에겐 더 잘 어울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도 듣도 못 한 조그만 놈이 느닷없이 나타나서 두목을 째보라 부르면서 만나겠다는

것이다.

충직한 왕발은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혔다.
정말 어디서 굴러먹다 온 개뼈다귀인지 모를 놈이…….

그저 파리채로 후려치듯, 커다란 손으로 내려 짓찧기만 해도 파리처럼 납작해질 놈이…….

“요것 봐라…….”

왕발은 단김에 집어던지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거구의 몸집을 종로꼬마의 앞으로 내밀었다.

종로꼬마는 그 나름대로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혔다.

비록 키는 작아도, 종로에서라면 터줏대감처럼 활갯짓을 하고 다녔다.

아무리 1년 남짓 자리를 비웠기로서니,

엉뚱한 놈이 나타나서 앞길을 가로막다니.

더구나 ‘요것 봐라’는 한마디는 굴욕적이었다.

요것 봐라나 이것 봐라나 똑같이 멸시적인 한마디이기는 하지만,

어감의 뉘앙스에서 다르다.

이것 봐라보다 더 굴욕감을 느끼게 했다.
굴욕감을 느낀 것과 동시였다.

제자리에서 뛰어오르지 않은 채 오른발로 왕발의 턱을 걷어찬 것이다.

전광석화란 이를 두고 한 말일까.

실로 눈 깜짝할 사이였다.

불의의 일격을 맞은 왕발은 뒤로 기우뚱했다.

워낙 힘이 좋은 장사였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고서는 벌써 그 한 방에 나둥그러졌을 것이다.

그는 자세를 고쳐 공격에 대비한 방어의 자세를 취하려고 몸을 가누어 세웠다.

그러나 그것은 벌써 늦었다.

붕긋, 하늘로 치솟아 오른 종로꼬마의 두 발이 허공에 뜬 채 교대로 그의 복부와 가슴을 찬 것이다.

왕발은 제대로 대항도 해보지 못한 채 얕은 신음 소리와 함께 나둥그러진 것이다.

그가 쓰러지자,

종로꼬마는 잽싸게 달려들어 그 거구를 짓이겨놓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발길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자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필경은 같은 종로의 패거리인 것이다.

중국 무술을 익히고 돌아온 것은,

같은 패나 조선 사람을 때리고 치기 위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하고 뉘우친 것이다.

“알지? 앞으로 종로꼬마를 몰라보면 언제나 같은 꼴 당한다는 것을 알아둬…….”

커다란 몸집에 발을 올려놓은 채 내뱉었을 때였다.


“아서, 아서!”

등뒤에서 귀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종로꼬마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망치였다.

“오오, 망치!”

“꼬마야, 너 솜씨 한번 늘었구나!”

망치가 반가워하는 얼굴로 다가갔으나,

종로꼬마는 여전히 미간이 찌푸려져 있는 채였다.

“빌어먹을 놈 같으니라구!”

그는 아직도 나둥그러져 있는 채로 있는 왕발 쪽을 돌아다보고

순수한 서울 토박이다운 욕을 내뱉고 나서야 망치를 향해 씩 웃었다.

“두한이 지금 어딨어?”

“두한 형님 지금 안에 계셔.”

종로꼬마는 순간,

지난날 같지 않은 위화감까지는 아니더라도 뭔가 엇갈려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망치의 말투에서 느낄 수 있었다.

김두한에 대한 깍듯한 공대가 우선 그러했다.

망치나 종로꼬마 자신은 김두한을 김두한이라 불러야 직성이 풀렸다.

그만큼 스스럼이 없는 친근한 사이였다.

그런데 망치가 두한을 가리켜 두한 형님이라 부르고 있지 않은가.

김두한만 해도 그렇다.

그가 집 안에 있다면서, 그리고 ‘두한아’ 하고 소리쳐 불렀음으로 해서

물론 자기가 돌아온 것을 알고 있을 터이면서도 달려나오지 않다니…….

기뻐서 쫓아 나온 것은 머리 빠진 개고기뿐이었다.

(뭔가 변했구나, 뭔가 달라졌구나.)

그는 뭔가를 직감하면서 봉당 위로 올라섰다.

물론 김두한은 종로꼬마가 돌아온 것을 알고 있었다.

두한아, 하고 소리친 목소리에서 벌써 그가 종로꼬마인 것을 알았다.

그리고 반가웠다.

정말로, 헐레벌떡 뛰어나가 맞아주고 싶은 순수한 반가움이었다.

그러나 엉덩이를 들 수가 없었다.

두목으로서의 체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 종로패로 흡수된, 보다 솔직히 말하면 새로 자신의 부하가 된

낙원동의 칠복이나 단성사의 용돌이·용희 형제, 시구문패의 돼지 등이 있는 앞에서

호락호락한 두목의 모습을 보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종로꼬마는 망치와 머리 빠진 개고기에 안내되어 김두한의 방으로 들어섰다.

순간, 그는 전에는 느껴볼 수 없었던 중압감을 느꼈다.

중앙 상석에 버텨 앉아 있는 김두한 자신에게서 일찍이 느껴보지 못한 중후한 위엄을

느끼기도 했지만, 방 안의 분위기부터가 우선 달랐다.

주먹계의 선배로 서로 얼굴이나 알고 지냈을 뿐,

이렇다 할 교분이 없었던 칠복이 형이며 용돌이 형제,

게다가 전혀 얼굴도 모르는,

첫눈으로 알아모셔야 할 것 같은 거한·거물들이 김두한을 중심으로 좌우에

기라성처럼 버텨 앉아 있지 아니한가.

배운 것은 없었지만 눈치 빠르고 예민한 종로꼬마는 이미 달라진 상황을 파악했고,

또한 김두한을 양해했고 이해했다.

(두한은 이제 당당한 두목이 된 것이다!)

종로꼬마는 가슴 밑바닥에서 솟아오르는 기쁨을 느끼면서,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절했다.

“두한 형님, 이제 돌아왔습니다!”

“흠! 너, 못 본 동안 정말 늠름해졌구나!”

김두한은 그 작은 눈이 그대로 감길 듯한 눈웃음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그의 말은 진정이었다.

키가 1년 전보다 커진 것은 없었다.

원래가 키보다 가슴과 어깨가 다바라져서 몽땅한 인상이었으나,

그 어깨며 가슴이 더 넓어진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훈련이 고되고 심해서였을까,

야위고 깡마른 느낌이었다.

그러나 예쁘장했던 화사한 얼굴은 거무튀튀하게 영글어 있었고,

전에는 보이지 않던 여드름이 덕지덕지 나 정한(精悍)한 느낌마저 갖게 했다.

무엇보다, 날카로운 시선이며 다부지게 다문 입매가 무술로 다져진 예기(銳氣)를 넘쳐흐르게 했다.

한마디로 소총의 탄환과도 같은, 빈틈이 없는 날카로운 인상이,

이제 소년도 꼬마도 아닌 강력한 장부를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형님이 염려해 주신 덕분입니다.”

종로꼬마는 다시 한 번 머리를 조아렸다.

입술에 올리지 않았던 공대가 전혀 어색할 것이 없었고,

전부터 항상 그러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이젠 꼬마가 아냐! 응, 꼬마가 아냐! 이젠 나이도 찼겠다, 꼬마일 수가 없지!”

김두한은 고개까지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꼬마 대신 이제부터 박사로 부르지, 박사!”

종로꼬마 자신도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좌중의 주먹패들도,

그 어울리지 않는 별명에 불가해한 수수께끼를 대할 때와 같은 얼굴이 되었다.

이에 명쾌한 대답을 주려는 것처럼 김두한은 말했다.

“박사, 그래, 박사, 여드름 박사 말야! 핫핫!”

김두한은 헌걸차게 웃었고, 온 방 안에 폭소가 터졌다.

“그런데, 박사! 정말 잘 와주었어.

종로꼬마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아침결에도 생각했었는데…….”

“무슨 일이 있습니까?”

종로꼬마는 비로소 무릎걸음으로 몇 발 다가앉으며 물었다.

“돌아오자마자 이런 얘기 들려주게 돼서 안됐지만,

쪽발이놈들이 우리에게 도전장을 보내와서 말야.”

김두한은 붓글씨로 된 예의 그 도전장을 종로꼬마, 아니 여드름 박사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나 그는 고개만 떨어뜨려 내려다보았을 뿐, 이를 집어들지 않았다.

하얀 것이 종이이고, 검은 것이 글씨라는 것을 알 뿐,

일자무식인 것은 두목 김두한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머리 빠진 개고기가 재빨리 거들었다.

혼마찌깡의 하야시가 1주일 후 새벽,

쌍방 각각 40명씩 동원하여 장충단 공원에서 일대 결전을 벌이자는 뜻의

도전장을 보내왔다는 내용을 설명했다.

종로꼬마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얘기를 다 듣고 나서야 무겁게 입을 열었다.

“싸우자면 싸우는 것뿐이죠! 여드름 박사가 아닌, 싸움 박사의 솜씨를 보여주는 것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