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강안남자

283. 첫사랑(12)

오늘의 쉼터 2014. 8. 17. 19:52

283. 첫사랑(12)

 

 

 

 

(1161) 첫사랑-23 

 

 

위선(僞善)이란 겉으로만 착한 체한다는 뜻으로 조철봉은 저 자신에게 딱 맞는 말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가만 보면 위선 떨지 않는 사람은 드물었다.

 

껍질을 벗기면 금방 드러났다.

 

요즘은 더욱 그렇다. 겉으로는 먼지 한점 묻지 않은 것처럼 고고한 척하다가

 

조철봉에게 엉겨 갖은 기성을 뱉어내는 여사님들의 행태도 그렇다.

다음날 아침 서울행 비행기 안에서 조철봉은 문득 위선을 떠올렸다.

 

시치미를 뚝 떼고 일등석에 앉아있는 자신을 승무원들은 정중하게 대우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일등석 요금은 일반석의 두배 가깝게 된다.

 

똑같은 비행기에 앉아 같은 시간에 목적지에 닿는 데도 요금은 두배인 것이다.

 

비행기를 자주 이용하는 조철봉이었지만 지금까지 일등석과 일반석 구분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다.

 

처음에는 일등석이나 비즈니스석의 의자가 마사지받는 이발관 의자처럼 넓고 편한데다

 

승무원의 서비스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그냥 탔지만 요즘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몇 년 동안 사업체를 운영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 일등석을 탈 적에는 공항에서 티켓을 받을 때부터 주위에 신경이 쓰였다.

 

길게 늘어선 일반석 손님들의 시선이 곱지 않은 것 같다고 지레짐작하고서는

 

마음 졸였던 때도 있다.

 

일등석 손님은 붉은색 양탄자가 깔린 창구로 가서

 

금방 티켓을 받고 일등석 라운지로 들어가 쉬는 것이다.

 

그리고 비행기를 탑승할 때도 대접을 받는다.

 

비행기의 출입구는 대개 두 곳이 있는데 일등석은 앞쪽으로 들어간다.

 

좌석이 앞쪽에 있기 때문에 진동도 적고 타고 내리기에도 편하다.

어쨌든 조철봉의 지금 생각은 달라졌다.

 

당사자가 사기꾼이건 악덕 사채업자로 돈을 벌었건 간에,

 

또는 월세방에 살고 있으면서 순전히 허세로 일등석을 탔건 간에

 

그 일등석 손님은 돈 낸 만큼은 대우를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 또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법칙이다.

 

아니, 사회주의 사회도 마찬가지다.

 

옛 소련 시대의 아에로플로트 항공은 물론이고 공산주의 국가의 항공사도

 

다 일등석과 일반석이 구분되었다.

 

일등석은 많은 요금을 낸 승객이 탔고 일반석은 적은 요금을 낸 승객이 탔던 것이다.

 

일등석에 타고 좋은 대접을 받으면서 여행을 하려고 공산주의 사회의 시민들은

 

어떻게 했을 것인가?

 

돈 벌기가 마땅치 않았으니 당 간부가 되려고 했을까?

 

아마 공산주의 사회가 붕괴한 것에 비행기 일등석이 약간 공헌을 했을지

 

모른다고 조철봉은 생각했다.

 

일등석이 생긴 지 반세기가 지났을 텐데

 

그동안 없어지거나 말썽이 크게 일어나지 않는 걸 보면

 

돈 많이 낸 사람이 더 좋은 대접을 받아야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고 봐도 될 것이다.

 

그것에 가타부타하는 놈이 있다면 아주 악독한 놈이거나

 

미친 놈이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열심히 돈을 벌어서 세금 많이 내고 돈 낸 만큼 대우를 받는 것이 자유민주주의 사회인 것이다.

 

한 마디로 내가 내 돈을 쓰는데 어떤 시러베 아들이 상관을 한단 말인가?

 

세금 다 내고 내 돈 쓰는 데도 왜 눈치를 봐야 하는가?

 

그럴 필요는 없다고 조철봉은 깨달은 것이다.

 

그래야 경제도 살아난다.

 

돈 있는 놈들이 눈치 안보고 돈을 펑펑 써야 경제에 활력이 생긴다.

 

룸살롱이 잘 돌아가고 룸살롱 아가씨를 태운 모범택시가 바쁘고,

 

아가씨를 손님으로 하는 일수꾼들이 많이 생길 때가 태평세월이다.

 

정치가 별것인가?

 

등 따습고 배부르게 만들면 되는 것이다.

 

도둑놈이나 강도는 신라시대에도 있었다.

조철봉은 창밖의 구름을 내려다보면서 저도 모르게 긴 숨을 뱉었다.

 

강남에 아파트를 두채나 사놓았다가 이번에 작살났다.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발표되면서 억대의 손해를 본 것이다.

 

지금까지 부동산 사 놓았다가 이번처럼 피를 본 경우는 처음이다.

 

거기서 번 돈을 강남 룸살롱에 뿌리면 경제에 도움이 될 텐데,

 

경제정책 담당자들은 또 오산을 했다.

 

사기꾼의 돈은 돈이 아니냐?

 

돈을 풀어야 경제가 일어난다. 

 

 

 

 

(1162) 첫사랑-24

 

“어서 오십시오.”

자리에서 일어선 배 사장이 오늘은 웃음띤 얼굴로 맞았지만 고영민은 불안했다.

 

지난번에도 저렇게 웃으면서 집주인이 바뀌어 보증금이 나올지 모르겠다고 말했던 것이다.

 

목례만 하고 낡은 비닐소파에 앉은 영민에게 배 사장이 사근사근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커피 드실래요?”

“아뇨, 됐습니다.”

손목시계를 보는 시늉을 하면서 영민이 사양했다.

 

오전 11시 5분전이다.

 

11시에 집주인하고 이곳 평화부동산 사무실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배 사장이 다시 말을 걸었다.

“집주인이 그 집을 창고로 사용할 모양이더군요.

 

집을 비우면 바로 내부 공사를 한답니다.”

“…….”

“내일까지 비우실 수 있지요?”

“네.”

영민이 짧게 대답했을 때 미닫이문이 열리더니 사내 두명이 들어섰다.

 

둘 다 30대 쯤으로 그중 하나가 상전인 것 같았다.

 

말쑥한 양복차림이었고 키도 컸는데 낯익은 얼굴이었다.

“아이구, 사장님이십니까?”

반색을 하며 일어선 배 사장이 앞장선 사내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배 사장도 초면인 모양이었다.

“아, 예, 청수 아파트 건으로.”하고 사내가 대답했을 때

 

영민이 조금 눈썹을 모으고는 사내를 보았다.

 

목소리도 많이 들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예, 앉으시지요. 여기 세입자께서도 와 계십니다.”

배 사장이 영민을 가리켜 보이면서 사내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때서야 사내의 시선이 영민에게 옮겨 왔다.

“아.”

그순간 영님의 입에서 짧은 외침이 뱉어졌다.

 

그때서야 사내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조철봉, 조철봉이다.

 

입을 딱 벌린 영민이 하얗게 굳어진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그때 영민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의 머리가 옆으로 조금 기울어졌다.

 

그러고는 눈썹을 모으더니 영민을 똑바로 보았다.

“어디서 많이 뵌 분 같은데요.”

조철봉이 머리를 기울인 채 말했다.

 

아직도 시선을 영민에게서 옮겨가지 않는다.

“저, 혹시 저를 아십니까?”

 

하고 조철봉이 물었을 때였다.

 

갑자기 얼굴이 붉어진 영민이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시선을 내렸다.

 

그때서야 자신의 입장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세입자와 집주인의 관계로 재회한 것이다.

 

그리고 이쪽은 5백짜리 월세 세입자였고 두달째 집세를 못내어서 70만원이 깎였다.

 

손에 쥘 돈은 4백30에다 관리비를 빼면 4백밖에 되지 않는다.

 

그때였다.

 

조철봉의 눈이 크게 떠지더니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 고영민, 고영민씨 맞지요?”

 

하고 조철봉이 물었을 때 영민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아, 저기.”

 

하고 놀란 배 사장이 뒤에서 불렀지만 영민은 도망치듯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모른다.

“엄마, 어디 아파?”

오늘은 학교를 쉬고 이삿짐 꾸리는 것을 돕고 있던 애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을 때에야

 

영민은 정신을 차렸다.

 

서둘러 화장실로 들어가 거울을 들여다보자

 

얼굴은 아직도 상기되었고 눈에는 핏발까지 서 있다.

 

영락없는 환자 얼굴이었다.

“으응응.”

거울을 보던 영민이 갑자기 소리내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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