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서울무형문화재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40호 수표교 다리밟기

오늘의 쉼터 2014. 8. 17. 11:55




종 목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40호

명 칭  수표교 다리밟기
분 류무형유산 / 전통연행/ 놀이/ 세시놀이
수량/면적

개인

지정(등록)일

2009.03.05

소 재 지

서울특별시 은평구

시 대

대한민국

소유자(소유단체)

수표교 다리밟기 보존회

관리자(관리단체)

수표교 다리밟기 보존회



설명


수표교(水標橋) 다리밟기는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에서 전해 내려오는 세시풍속의 하나로서 고려때 부터 매년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각자 자기 나이 수대로 다리를 밟으면 그 해에 다리에 병이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년 내내 재앙을 막는다고 하는 신앙적인 풍속이 있었다.

정월대보름 다리밟기에는 일반서민은 물론 양반들을 포함한 많은 남녀노소가 밤을 지새며 다리밟기에 참여 하였기 때문에 다리마다 북새통을 이루었으므로 양반들은 대보름 하루전인 14일 저녁 수표교에서 다리를 밟았는데 이것을 "양반 다리밟기" 또는 "양반 수표교 다리밟기" 라고 하였다. 이러한 다리밟는 풍습은 조선조 후기에 이르러 다리만 밟는것이 싱겁다 하여 육조에서 가무별감에서 명하여 흥겨운 가무연회를 곁들이라 해서 답교 놀이의 각 배역이 정해지면서 선소리산타령패도 등장하게 되었으며, 이 때 부터 순수한 수표교 다리밟기에서 다리밟기 놀이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선조 때 시인이자 예조판서를 역임한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1571~1637)도 정월 대보름날 장가를 들었는데, 친구들과 수표교(水標橋)의 다리밟기에 어울렸다가 술에취해 다리 부근에 쓰러져 잠이 들 정도였다고 한다. 이안눌(李安訥)은 이 날 밤의 해프닝으로 남의 신방에서 다른 신부를 만나게되고, 결국 이 신부를 소실로 맞이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첫날밤 신부를 놔두고 놀러 나간 원래 신랑은 또 어디에가서 놀았단 말인가? 이 일화를 보면, 조선 중기의 정월대보름 다리밟기 놀이가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해방의 시간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날은 한양성 사람들의 밤을 구속하던 밤 10시 통금 시간도 없었고, 이 날은 도성 안의 양반과 일반 백성이 함께 어울려 놀았다. 또한 이날은 고요이 숨죽여 지내던 여인들이 바깥공기를 시원스레 호흡할 수 있는 날이었다. 한양성은 양반과 일반 백성들의 사는 구역이 따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이 날의 다리 위는 "모든사람" 들이 한꺼번에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이다. 수표교는 원래 목조다리였다가 돌다리로 바뀐 후 1959년에 청계천 복개공사를 하면서 장충동2가 옮겨놓고 수표석은 홍릉의 세종대왕기념관에 옮겨졌다. 청계천 복구후 돌다리를 옮겨오지는 못하고 같의 모양의 나무 다리로 복원하였다. 현재도 매년 정월대보름이면 다리밟기행사를 중구청에서 각 동 주민들과 하고있다. 1420년(세종2년)에 처음 다리를 만들었는데, 당시 그주위에 소와 말을 사고파는 우마전이 있어서 다리도 ‘마전교(馬前橋)’라고 불렸다. 그 뒤1441년(세종23년)에 이 다리 옆에 청계천 수심을 재는 수표를 세우면서 다리이름이 ‘수표교(水標橋)’로 바뀐 것이다.

 

 

수표교 다리밟기

 

수표교 다리밟기

 

수표교 다리밟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