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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3장 오염(7)

오늘의 쉼터 2014. 7. 25. 17:43

[27] 3장 오염(7)

 

(53) 3장 오염-13

 

 

책상 앞에 선 화란이 서동수를 똑바로 보았다.

“회의실에서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좋아.”

농담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서동수는 억제한다.

 

부하 여직원과의 관계가 직장생활의 성패(成敗)를 좌우한다고 믿는 선배가 있었다.

 

그는 실적 부진이라는 전혀 다른 이유로 회사를 떠났지만 그의 직장여성관은

 

서동수의 모델이 되었다.

 

둘은 곧 회의실에서 단둘이 마주보고 앉는다.

 

화란의 눈에 습기가 차서 반짝였고 볼은 조금 상기된 것 같다.

 

루즈를 바르지 않았는데도 붉고 윤기가 흐르는 입술이 꾹 닫혔다가 열렸다.

“저기, 오늘 점심시간에 회사 앞으로 홍 사장이 찾아와서 만났어요.”

단정히 앉은 화란의 시선이 떼어지지 않는다.

 

서동수는 호흡을 조정했다. 선배가 말했다.

“직장 부하 여직원만큼 당기는 상대가 없다.

 

그것은 와이프보다 더 유혹적이며 남자의 우월성, 정복성의 대상으로 적합하기 때문이다.”

선배가 입가에 거품을 일으키며 말을 이었다.

“와이프는 대등한 관계지만 부하 여직원은 지배한다는 잠재 본능을 충족시키는 상대야.

 

그러니 ‘벗어’하고 싶은 충동을 참기 힘들단 말이다.”

팀장이었던 선배는 섹시한 부하가 둘이나 있었는데도 소 닭 보듯이 했다.

 

아니, 꾹꾹 눌러 참았을까? 선배가 말했다.

“건드리지 말고 존경을 받아봐라. 그럼 넌 성공한 직장인이 되어있을 것이다.”

그러던 선배는 실적부진으로 잘렸고 서동수는 남은 섹시걸들에게 선배를 존경했느냐고

 

물어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화란이 입을 열었다.

“저기 홍 사장이 저한테 이걸 주고 갔는데요.”
 

하면서 화란이 테이블 위에 검은색 비닐봉투를 놓았는데 묵직했다.
 
화란이 밀어 준 비닐봉투를 편 서동수가 입맛을 다셨다.
 
예상했던 대로 돈이다.
 
100원권 뭉치가 세 개 들어있다.
 
3만 위안, 화란의 월급이 5000위안 정도니까 6개월 월급이다.
 
화란이 말을 잇는다.

“놓고 가셔서 미처 돌려주지 못했어요.”

“회사에 돌아와 전화를 했더니 선물이니까 부담없이 받으라고 합니다.
 
돌려보내면 되돌려 보내겠다는데요.”

화란의 검은 눈동자가 똑바로 서동수에게 박혔다.

“어떻게 하죠?”

그 순간 서동수는 목구멍이 좁혀지는 느낌을 받는다.
 
심장 박동이 빨라졌고 머릿속이 뜨거워졌다.
 
서동수는 숨을 들이켰다.
 
이 반응을 아는 것이다.
 
성적 충동이다.
 
그 다음 단계는 하체에 피가 몰린다.
 
서동수가 말을 내놓는다.

“받아.”

“네?”

놀란 듯 화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금 받으라고 했어요?”

“그래, 받아.”

“아니, 왜요?”

했다가 화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두 눈이 더 번들거리고 있다.

“이해가 안 돼요. 그 돈을 받으라니요? 날 모르시는군요.”

“알아, 화란.”

“그런데 왜 그렇게 말했지요?”

“그놈이 나쁜 놈이기 때문이야.”

다시 호흡을 고른 서동수는 아직 화란에게 내막을 알려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말을 길게 할 필요도 없다.
 
이윽고 머리를 끄덕인 서동수가 말했다.

“알았어. 내가 이 돈을 홍 사장에게 돌려주기로 하지. 그게 낫겠다.”
 
 
 

 

(54) 3장 오염-14

 

 

이렇게 정리가 되는 것인가?
 
아파트에 돌아와 소파에 앉았을 때 서동수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다.
 
인간사는 꼭 만나서 글(文)이나 말(言)로 매듭을 짓지 않아도 저절로,
 
물 흐르듯이 정리가 되어갈 수도 있는 모양이다.
 
아니, 꼭 말이나 글이 필요하지 않은 것 같다.
 
바로 정은지의 경우가 그렇다. 연락이 끊어진 지 35일,
 
생활비 지급일도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정은지는 소식이 없다.

다른 때 같았으면 생활비 지급일 이틀쯤 전부터 연락이 왔어야 정상이다.
 
출장이 아니라 아예 중국 공장으로 발령받고 옮아간 신세라는 것을 알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전화해주기도 멋쩍고 하니까 놔 두었으리라.
 
벽시계가 오후 8시 반을 가리키고 있다.
 
이제는 시내 식당을 알아놓아서 낙지 백반으로 저녁을 먹고 들어왔기 때문에 씻고 자기만 하면 된다.

이제 중국으로 넘어온 지 한 달 반, 가장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이 딸 미혜의 모습과 목소리다.
 
하지만 박서현이 철저히 차단 시킨 터라 어쩔 수 없다.
 
무리해서 만나고 들을 수야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박서현의 방법(?)을 이해하는 터라 참기로 한다.
 
이해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라고 하는 것이 낫겠다.
 
칼자루는 그쪽이 쥐었으니까,
 
서동수는 바지 뒷주머니에 넣어둔 지갑에 딸 미혜의 사진을 끼워놓고 있다.
 
지금도 지갑을 꺼내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지만 참는다.
 
참고, 참고, 또 참는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자리에서 일어선 서동수가 옷을 벗는데 핸드폰이 진동으로 떨었다.
 
탁자 위의 핸드폰이 산 벌레처럼 옆으로 움직인다.
 
다가간 서동수가 발신자를 보았다.
 
눈에 익숙하지 않은 번호다.
 
머리를 기울였던 서동수가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들었다.
 
저장시키지 않은 번호는 수첩에 적어놓았기 때문이다.

핸드폰은 한 바퀴를 다 돌고 있다.
 
수첩을 뒤진 서동수는 곧 번호 주인을 알아내었다.
 
‘링링’이다. 카페 ‘블루’에서 우명호와 함께 만났던 파트너, 하룻밤 500불짜리,
 
그날밤 ‘링링’의 아파트에서 보낸 장면이 순식간에 눈앞에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서동수는 핸드폰에 손을 뻗지 않았다.
 
이것으로 끝이다.
 
이 인연도 가만있으면 정리가 될 것인가?
 
그때 핸드폰의 진동이 멈추더니 죽은 벌레처럼 납작하게 엎드려 있다.
 
다시 옷을 벗어든 서동수가 욕실로 들어섰다.
 
샤워기의 꼭지를 내리면서 서동수가 말했다,

“그래, 보여주겠어.”

불쑥 뱉어진 자신의 말에 서동수는 눈을 부릅떴다.
 
물이 머리끝으로 세차게 쏟아지고 있다.

가정도, 회사도, 다 실패해서 쫓겨났지만 그래. 두고 보자고.”

서동수는 이제 얼굴로 물을 받는다.

“내가 이곳을 내 기회의 땅으로 만들 테니깐, 내가 누군지 너희들 잘 보라고!”

물줄기에서 얼굴을 뗀 서동수는 문득 중국땅에 와서 샤워를 하다가
 
혼잣말을 하는 버릇이 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에는 이런 적이 없었다.
 
“할 수 없지 뭐.”

서동수가 다시 큰소리로 자신을 위로했다.
 
그리고 내친김에 다시 소리쳤다.

“미혜야, 아빠 잊어라.”

이제 몸에 비누칠을 하면서 서동수가 말을 잇는다.

“네 엄마는 좋은 엄마야,
 
새 아빠는 데리고 오지 않을 거다.
 
만일 그런다면 내가 널 데려와야지.”

말을 그친 서동수가 어깨를 부풀렸다가 내렸다,

“미안하다. 미혜야. 네가 크면 꼭 찾아갈게. 난 절대로 널 잊은 것이 아니란다.”

서동수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세게 문질렀다.
 
이제 물 쏟아지는 소리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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