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정복자 (3)
"얀마, 이리 와 봐."
하고 머리에 두건을 쓴 상주가 불렀으므로 최기술은 눈부터 치켜떴다.
"왜 그래?"
상주는 30대 초반쯤으로 보통 체격이었지만 눈매가 매섭기는 했다.
하지만 최기술은 키 1m85에 체중이 110kg이나 나가는 거구였다.
하루에 자장면 열 그릇 씩 처먹고 몸만 불린 돼지가 아니라,
최기술은 헤비급 레슬러 출신인 것이다.
최기술이 오라고 해서 갈 인간인가? 어깨만 부풀렸으므로 상주가 다가왔다.
성심병원의 영안실 밖이었다. 이쪽은 손님이 서너 명 뿐이어서 썰렁했다.
무연고자의 장례식장 같았다. 바로 강민의 영안실인 것이다.
상주가 다가섰을 때 최기술은 눈을 가늘게 떴다.
바로 게임을 시작하기 전의 버릇이었다.
그때 상주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최기술의 눈앞에다 펼쳐 보였다.
"난 강남경찰서 강력반 박 형사다."
바로 코앞에다 신분증을 보인 상주가 한 걸음 다가와 섰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손바닥을 휘둘러 최기술의 귀뺨을 쳤다.
"철썩!"
맞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아니."
졸지에 귀싸대기를 맞은 최기술이 주춤 물러섰다.
이내 기세가 꺾였다.
상주가 형사 신분증을 펴 보일줄은 전혀 예상 못했기 때문이다.
귀싸대기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반사작용은 말로 나왔다.
"어? 때렸어? 형사면 다냐?"
눈을 치켜뜬 최기술이 으르렁 거렸을 때
어느새 바짝 다가선 상주가 발길질로 사타구니를 차 올렸다.
"끄응."
순식간에 얼굴이 하얗게 굳어진 최기술이 허리를 굽히더니 곧 쪼그리고 앉았다.
앞으로 엎어지려는 것을 기를 쓰고 참은 것이다.
그때 복도 끝의 무인판매기 앞에서 얼쩡거리던 사내 둘이 다가왔다.
최기술의 일행이다.
"이 새끼들, 너희들 최광규 똘마니들이지?"
상주가 으르렁대듯 말했으므로 다가온 둘이 눈을 치켜떴다.
둘이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상주의 말이 이어졌다.
"최광규한테 전해. 강남경찰서 강력반 박용수 형사가 곧 찾아간다고 말야.
이 시발놈들아."
그리고는 쪼그리고 앉아 끙끙대는 최기술의 머리를 상주가 살짝 밀었다.
그러자 최기술은 땅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뒤로 넘어졌다.
"네놈들이 강민이를 죽인 거 다 안다.
강민이는 네놈들한테 잡혀가다가 도망치는 도중에 차에 치인 거야."
박용수가 낮지만 굵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네놈들이 지금 여기 와 있는 이유도 내가 안다.
강민이 형 강한이를 잡으려고 그러는 거지?
강민이는 강한이를 잡아 인질로 삼으려고 했고."
"아, 시발. 가자."
하고 사내 하나가 엉기적거리는 최기술의 팔을 잡아 일으키더니 말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시바."
그때 다가간 박용수가 이제는 그 사내의 귀싸대기를 쳤다.
다시 소리가 요란하게 났고 정통으로 귀뺨을 맞은 사내가 눈을 부릅떴다.
"아, 왜 쳐!"
사내가 소리쳤을 때 뒤쪽에서 사내 둘이 또 나타났다.
"어이, 김 형사. 이놈들 잡아."
박용수가 말하자 둘은 각각 하나씩 사내들을 잡았다.
"야야."
사내들이 개를 잘 다루는 개장사처럼 자신만만한 태도로 말했다.
"가만 있어. 다친다."
"어, 왜 이래?"
하고 사내 하나가 잡힌 팔을 뿌리치려는 듯 몸을 흔들었을 때
금방 팔이 뒤쪽으로 비틀려 올려졌다.
"아이고!"
사내가 비명을 질렀지만 팔을 비튼 형사는 느글거렸다.
"이 시발놈이 첨 잡히나? 쪽팔리게 소리는 왜 질러? 이 병신아."
서윤남은 60대 중반이었지만 외모는 50대로 보였다.
둥근 얼굴에 혈색이 좋았고 머리숱도 짙었다.
키도 컸고 육중한 체격이어서 풍채가 좋았다.
"어서 오너라."
현관으로 들어선 장미에게 소파에서 일어선 서윤남이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처음 뵙습니다."
장미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자 서윤남은 머리를 끄덕였다.
"거기 앉아라."
서윤남이 턱으로 앞쪽을 가리키더니 자리에 앉았으므로 장미는 무릎을 모으고 조심스럽게 앉았다. 장미는 자주색 투피스 차림이었는데 목의 선이 드러났고 스커트는 무릎 위로 10㎝쯤 올라가 있다.
"미인이구나."
테이프로 미리 보았으면서도 서윤남이 장미를 뚫어지게 훑어보면서 말했다.
"감사합니다."
시선을 15도쯤 내린 장미가 다소곳하게 대답했을 때 서윤남이 물었다.
"너, 처녀라구?"
"네, 회장님."
"허어, 참."
서윤남이 웃음띤 얼굴로 장미를 보았다.
"그 미모에 어떻게 견디어 낼 수가 있었단 말이냐?"
장미는 대답하지 않았고 서윤남의 말이 이어졌다.
"그야말로 천연기념물이구나."
"……."
"정말 남자 친구도 없었단 말이냐?"
"남자 친구는 있었습니다."
시선을 잠깐 올렸다 내린 장미가 또렷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선을 넘지는 않았습니다."
"어느 선까지 갔는데?"
장미가 잠깐 입을 다물었다.
남자는 이런 대화를 좋아하는 것이다.
미국 박사건 국졸이건, 대기업 회장이건 호텔까지 실어다준 백용철이까지 다 그렇다.
장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키스는 해 보았습니다."
"으음."
서윤남이 탄식했다.
마치 합의금 10억중에서 1억쯤의 가치가 달아난 것같은 표정이 되어 있었다.
"키스까지는 해 보았다구?
"네, 회장님."
"거시기."
서윤남이 침을 삼키고나서 말을 이었다.
"혀도 빨아 보았느냐?"
그순간 장미는 시선을 들어 집안을 훑어 보았다.
별장은 넓고 조용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옆쪽에 있었는데 그 옆쪽 선반에 청자가 보였다.
고려청자 같았다.
장미가 입을 열었다.
"네, 회장님."
"으음."
서윤남이 또다시 1억이 깎인 것같은 표정을 짓더니 헛기침을 크게 했다.
"그, 그때, 기분이 좋더냐?"
"아뇨."
장미가 머리를 젓고나서 똑바로 서윤남을 보았다.
"더러웠어요."
"아니, 왜?"
"침이 많이 나와서요."
"침이?"
꿀꺽 침을 삼킨 서윤남의 얼굴이 조금 상기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가 언제였는데?"
"2년 전입니다."
"그리고는 그놈하고 지금도 만나는 사이인가?"
"아닙니다. 그때 끝났습니다."
시선을 내린 장미가 말을 이었다.
"그냥 싫어서 끝냈습니다."
"그것 참."
서윤남이 심호흡을 하더니 정색했다.
"너, 네 몸을 보여줄 수 있겠니?"
"네?"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던 장미가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지금요?"
"그래, 여긴 우리 둘뿐이다."
장미는 속으로 시발놈 했지만 겉으로는 울상을 지었다.
그리고는 5초를 세고나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뜸을 들일수록 유리한 것이다.
별장에 들어온지 10분도 안돼서 벗으라고 할 줄은 몰랐지만
열흘에 10억을 받는 노동자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하루에 1억을 내는 입장인 서윤남으로서는 시간이 곧 돈일 것이었다.
시간당416만원, 1분에 6만9444원을 지급하는 셈이 될 테니까.
그래서 장미는 그야말로 숨도 돌리지 못한 상황에서 옷을 벗었다.
재킷과 스커트를 차례대로 벗고 브래지어와 팬티 차림이 되어 서 있다가
서윤남의 시선을 받고 또 벗었다.
브래지어가 벗겨졌고 맨 마지막으로 팬티 스타킹이 떨어졌다.
그리고는 전라의 몸이 되어서 서윤남의 눈앞에 정면으로 섰다.
"으으음."
눈을 치켜뜬 서윤남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장미는 서윤남의 눈빛이 점점 강해지는 것을 보았다.
마치 먹이를 앞에 둔 개의 눈같다.
옆에서 누가 어른거리기만 해도 물 것 같은 표정이다.
"그래, 과연."
겨우 그렇게 말한 서윤남이 금방 입안에 가득 고인 침을 삼켰다.
그러다가 침이 숨구멍으로 가는 바람에 커다랗게 재채기를 세 번이나 하고나서는
겨우 중심을 잡았다.
"어어험."
스스로도 멋쩍은지 헛기침을 하고난 서윤남이 입을 열었다.
"다리를 좀."
"네?"
했지만 장미는 이미 알아들었다.
다리를 벌리라는 말이었다.
다리 사이의 골짜기를 좀 더 자세히 봐야겠다는 발언이다.
그러나 금방 알아듣고 다리를 쩍 벌려서야 어디 시간당 416만원짜리 명품의 체면이 서겠는가.
이쪽은 처녀막이 곱게 보존된 천연기념물인 것이다.
장미가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부끄럽다는 표시로 오히려 오므렸다.
"어허."
갑갑한 서윤남이 손짓을 했다.
"벌려, 벌려."
"어, 어딜요?"
장미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 순간 얼굴이 붉어진 이유는 이게 무슨 꼴이야?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지 절대로 부끄러워서가 아니다.
그때 서윤남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다리를, 다리를 짝."
그 짝이라는 표현이 오징어를 짝짝 찢으라고 할 때나 써먹던 것 같았으므로
장미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참는 수작이었지만 서윤남은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는 표정으로
오해하기에 딱 알맞았다.
장미는 마침내 다리를 조금 벌렸다.
"으으."
서윤남의 입에서 마치 사람이 죽기 전에 폐에 남은 숨을 뱉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그러나 눈을 치켜떴고 이까지 악물고 있다.
"더 짝."
장미는 그렇게 말하는 서윤남의 사타구니가 불룩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장미가 조금 더 짝 벌렸을 때 서윤남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어기적거리며 장미에게 다가오더니 철퍼덕 그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서윤남의 얼굴이 바로 장미의 숲과 평행선이 되었다.
거리는 10㎝도 안된다.
"으으음."
서윤남이 뚫어지게 장미의 숲을 바라보면서 다시 신음했다.
"아이, 참."
하고 장미가 엉덩이를 뒤로 빼면서 손바닥으로 숲을 가렸지만 서윤남에게 저지당했다.
서윤남이 장미의 두 손을 잡아 젖힌 것이다.
"좋, 좋구나."
"과연."
하고 서윤남이 머리까지 끄덕였을 때 장미는 쓴웃음을 지었다.
서윤남의 머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자세라 들킬 염려는 없다.
"받아라."
박용수가 두 손으로 보석함을 내밀었다.
해가 졌지만 주위는 아직 밝았다.
하늘도 희끄무레해서 아침 같았다. 강한은 보석함을 받았다.
함 안에는 또다시 작은 나무상자가 들어있고 나무상자에 강민의 유골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한잔 할래?"
불쑥 박용수가 물었으므로 멍한 표정으로 서 있던 강한이 시선을 들었다.
박용수의 시선을 받은 강한이 건성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박용수는 방금 화장터에서 강민의 유골을 갖고 돌아온 것이다.
영안실에서 박용수에게 당한 최광규의 부하들은 화장터까지 따라오지는 않았다.
최광규는 잔인했고 철저했다.
그래서 기존 세력들을 무자비하게 제압하고 강남 지역을 석권하게 된 것이다.
최광규가 부하 몇 명이 혼났다고 강한의 추적을 그만둘 인간이 아니었다.
둘은 성남 시장 근처의 허름한 식당으로 들어가 술과 안주를 시켰는데 주위는 떠들썩했다.
공사 현장이 가까이 있는지 식당 안에서도 안전모를 쓴 인부들이 가득차 있다.
"너, 나서지 마."
강한의 잔에 소주를 따라주면서 박용수가 말했다.
박용수는 강민이 어떻게 죽었는지 아는 것이다.
"나섰다간 너만 걸려. 최광규는 그걸 노릴거다."
한 모금 소주를 삼킨 박용수가 길게 숨을 뱉더니 말을 이었다.
"내가 이런 말 하는게 우습지만 증거 남기지 말고 처리해라. 알아 들었어?"
"예, 형님."
한 입에 소주를 삼킨 강한이 더운 숨을 뱉다가 저도 모르게 주르르 눈물을 쏟았다.
당황한 강한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훔치고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그러나 눈물이 쉬지 않고 흘러 내렸다.
"어허, 참."
이제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눈물 범벅이 된 얼굴을 든 강한이 박용수를 보았다.
"형님, 여기가 고장이 난 모양입니다."
강한이 손끝으로 눈을 가리켰다.
"마치 수도관 터진 것 같은데요."
"놔둬라."
정색하고 말한 박용수가 강한의 빈 잔에 술을 채웠다.
"가끔 터지는 것도 괜찮아. 수도관 청소도 되고."
"최광규를 없애겠어요."
눈물로 범벅이 되었지만 강한의 목소리는 또렷했다.
강한이 똑바로 박용수를 보았다.
"차근차근, 껍질을 벗겨낼 겁니다."
"내가 도와주마."
심호흡을 한 박용수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네가 하는 일이 정의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한테는 법을 어기는 행동이 되겠지만."
"형님한테 폐 끼치기는 싫어요."
"나도 가만 있지는 못해."
"제가 도와 달라고 할 때 도와주세요."
강한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훔치더니 다시 길게 숨을 뱉었다.
"민이는 저 때문에 죽은 겁니다. 그놈만은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옆쪽 의자 위에 놓인 보석함에 시선을 준 강한이 말을 이었다.
"나도 같은 방법으로 최광규한테 갚아줄 겁니다."
"……."
"이제는 제가 갈 방향도 정했어요."
"자, 술 마셔라."
강한의 입을 막으려는 듯이 박용수가 자신의 빈 잔을 내밀면서 말했다.
"인생은 짧은 것 같지만 길다."
잔에 술을 채워준 박용수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는 것이 더 고통인 때도 있지.
하지만 박용수가 어깨를 늘어뜨리더니 한마디 한마디를 힘주어 말했다."
"포기하지는 말어. 목표를 세우는 한 희망은 있는 법이다."
현관으로 들어선 최광규에게 한미연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어서 오세요"
최광규는 시선만 주었을 뿐 머리도 까딱하지 않았다.
밤 10시 반. 집안은 조용했다.
80평형 아파트에 둘뿐인 것이다.
"식사 하셨어요?"
거실에서 저고리를 벗는 최광규의 뒤에서 옷을 받으면서 한미연이 물었다.
최광규가 대꾸하지 않았어도 한미연은 말을 이었다.
"청진동에서 해장국을 사왔거든요. 데우기만 하면 돼요."
그러나 옷을 갈아입은 최광규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응접실로 나와 소파에 앉았다.
리모컨을 켜자 TV의 소음이 집안에 울렸다.
최광규는 TV를 쏘아보고 있었지만 마침 켠 것이 정치 토론이었다.
지금까지 한번도 시청한 적이 없는 프로였는데도 최광규는 가만 있었다.
그냥 시선만 주고 있는 것이다. 소리도 듣고 있는 것 같지가 않다.
한미연은 대각선 방향의 자리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는데 역시 TV에다 시선을 주기는 했다
진주색 실크 홈드레스 차림인 한미연은 미인이었다.
3년전, 스물 여섯이었을 때 룸살롱에서 최광규에게 선택된 후부터 한미연의 인생은 급변했다.
최광규는 부도가 나서 풍비박산이 된 한미연의 가족을 재생시킨 은인이었다.
5억대 채무를 지고 도망자 신세가 되어있던 한미연의 아버지 한경호는 최광규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벌써 자살했을 것이었다.
최광규는 채권자들에게 압력을 넣어 채무를 모조리 탕감시켜 주었을뿐만 아니라
한경호를 안국상사 총무부장으로 채용까지 해주었다.
안국상사는 최광규의 빌딩 관리업체인 것이다.
그리고 한미연은 룸살롱을 그만두고 서초동의 80평형 아파트 안주인이 되어있다.
비록 최광규 명의의 아파트였지만 사모님 소리를 듣고 사는데다 외제차에
매월 생활비로 1000만원씩을 받는 신분인 것이다.
"너 말야."
이윽고 최광규가 입을 열었으므로 한미연은 몸을 굳혔다.
최광규는 일주일에 한번은 꼭 들러서 자고 갔지만 3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두려운 존재였다.
섹스할 때도 한번도 절정에 오른 적이 없다.
그저 시늉만 낼 뿐이다.
최광규가 말을 이었다.
"너, 내일 집 옮겨야겠다."
"네?"
놀란 한미연이 눈을 크게 떴을 때 최광규가 헛기침을 했다.
"일이 있어서 그래. 이유는 묻지말고."
"네."
"양평에 있는 내 별장 가봤지? 내일 거기로 옮겨."
"네."
"불편한 건 없을 거다.
아니, 거기가 더 나을 거야. 가정부 아줌마가 다 알아서 해줄테니까."
이번에는 최광규의 말이 길었다. 한미연의 시선을 받은 최광규가 말을 이었다.
"내일 새벽에 애들이 올거다."
"저기, 짐은."
한미연이 주저하며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옷만 가져갈까요?"
"간단하게."
그랬다가 최광규가 말을 고쳤다.
"그렇지. 몇달 있다가 돌아올 테니까 옷하고 필요한 것만."
"이 집은 비워 놓는건가요?"
"그래."
뱉듯이 말한 최광규가 외면했으므로 한미연은 소리죽여 숨을 뱉었다.
감옥에서 포로처럼 지내는 생활이다.
아니 때로는 감옥보다 더 지독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최광규는 외출하는 것도 싫어했고 친구를 불러 들이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가족도 마찬가지. 한 달에 한 번 정도 친정에 서너 시간 들르는 것이 유일한 해방시간이었다.
"자자."
자리에서 일어선 최광규가 말했으므로 한미연은 소스라쳐 일어섰다.
또 고문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5분 정도면 끝나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최광규는 5분이면 싸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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