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요하(遼河) 5 회
“네 이눔! 네 감히 뉘한테 대고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느냐?”
문덕은 눈알이 튀어나올 듯이 양눈을 부릅뜨고 노가를 크게 꾸짖었다.
그리곤 내처 어디론가 갔다가 칼을 들고 달려와서는 눈 깜짝할 사이에 그만 노가의 목을 내리쳤다.
피가 사방으로 튀고 잘린 노가의 목이 술상 위에 뒹굴자 술판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돌변했다.
미희들은 비명을 지르며 숨거나 달아났고 합석한 토호와 하전들은 혼비백산하여 사지를 떨었다.
취한 고신도 망연자실한 얼굴로 문덕을 치바라보았다.
“아무리 사사로운 자리라곤 하나 위계를 어지럽히는 자는 용서치 않으리라.
너희는 이 점을 유념하고 다시 춤을 추고 술을 따르라!”
짐짓 목소리를 근엄히 한 채 말을 마친 문덕은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으며
고신의 왼편에 가서 앉았다.
그리곤 두 손으로 공손히 고신에게 잔을 권하자 고신이 엉겁결에 무릎을 세우고
황급히 두 손으로 술을 받았다.
문덕은 미처 눈을 감지도 못한 노가의 목 앞에도 잔을 갖다놓고서,
“자네가 이제는 고구려 사람의 예절과 풍류의 법도를 제대로 배웠을 것이네.
자, 그만 기분을 풀고 내 술을 한잔 받게나.
그렇게 생사를 술상 위에 올려놓고 있으니 풍취와 술맛이 더욱 살아나네그랴.”
하며 태연히 술을 쳤다.
이 광경을 본 자들은 한결같이 술기운이 달아나고 등짝에선 소름이 돋았다.
이미 분위기를 간파한 토호와 하전들은 저마다 적당한 핑계를 대며 슬금슬금 자리를 떴고,
미희들도 소피를 보러 간다며 나가서 돌아오지 않자 문덕도 흥이 깨어졌다고 푸념하며
인사불성이 된 고신을 홀로 남겨둔 채 숙소로 돌아가버리고 말았다.
이튿날 눈을 뜨자마자 문덕은 칼을 지니고 득달같이 고신의 처소로 달려갔다.
고신이 벌거벗은 채로 아직 미희와 함께 자리에 누웠다가 깜짝 놀라 일어나니
문덕이 전날과는 사뭇 다른 낯으로 말하기를,
“고신은 들으라.
어제는 너의 다스리는 곳에 와서 요동의 풍정을 엿보고 너를 연장자로 예우하여
극진히 섬겼거니와 그런 일은 어제 하루로 족하다.
하물며 내가 하룻밤을 지새는 동안 너의 하는 양을 보아하니
너에게 특별히 성주의 위엄이 있는 것도 아니요,
백성을 다스리는 무슨 비법이 따로 있는 것 같지도 않다.
너에게 배우거나 따를 점이 아무것도 없는데 내 어찌 너를 예우할 것인가?
오늘부터 나는 왕명에 따라 막중대임을 수행할 따름이다.
설령 그간 너의 실덕과 폭정을 탓하여 이 자리에서 목을 자른대도 누가 감히 나를 나무라겠는가?”
하고서,
“이곳은 요동의 8성 중에서도 중하기로 으뜸인 요지 중의 요지다.
이같이 요긴한 곳을 너 따위에게 맡겨 나라를 위태롭게 할 수가 없다.
나는 새로 용맹하고 덕 있는 사람을 뽑아 성을 맡길 터인즉
너는 이 길로 짐을 싸서 요동성을 떠나라.
당장 너의 목을 치지 않는 것은 내 천성이 본시 자비로운 까닭이며,
만일 네가 이에 불복하여 대항하려 든다면 지금 갑옷과 무기를 갖추고 밖으로 나가자.
오늘에 한해 내게 맞서는 것을 기꺼이 용납하리라.”
단호하고 매섭게 말끝을 여물렀다.
고신이 문덕의 얼굴을 바라보니 인자하고 공손하던 전날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범 같은 기상과 시퍼런 서슬만 남았는데,
그 기세가 어찌나 살벌한지 감히 대항할 엄두가 나지 아니하였다.
게다가 노가의 목을 단숨에 베고 그 처참한 장소에 앉아 태연히 술을 권하던 간밤의 일까지
어렴풋이 떠오르자 그는 배짱에서 이미 문덕에게 한풀 꺾이고 말았다.
고신이 황급히 의관을 갖추며 깍듯이 말투를 고쳐 물었다.
“내가 장군에게 대체 무슨 죄를 지어 이처럼 화를 내시는지 알지 못하겠소.
성주로서 원로의 노고를 걱정하여 주연을 베푼 죄밖에 없는데 어제는 하전의 목을 치시더니
오늘은 돌연 성주를 폐하신다고 하니 그 진적한 까닭이나 일러주시오.”
이에 문덕이 그동안 고신의 실덕한 것과 잇단 폭정으로 세간에 조명이
자자한 바를 글 읽듯이 입에 담고 나서,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라도 네가 나에게 공손치 아니하고 오만불손했던 것 하나만으로도
얼마든지 너를 폐할 수 있다.
향당에는 상치(尙齒)요 조정에는 상작(尙爵)이거늘
네 어찌 왕명을 받고 부임한 상관을 능멸하는가?
나는 너를 본보기로 다스려 요동의 해이한 기강을 바로 세울 작정이다.”
하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자 고신이 털썩 무릎을 꿇고 죄를 빌기 시작했다.
“그간 변방에 오래 살다 보니 눈이 멀고 귀가 어두워 장군을 알아보지 못하는 큰 실수를 저질렀소.
낸들 어찌 실덕과 폭정을 하고자 하였겠소?
북방의 오지에 오래 머물다 보니 사는 것이 심심하고 딱히 할 일도 없어 따분함이나 달래려고
더러 난잡하게 놀았지만 이제 장군을 만나 꾸지람을 들으니 찬물을 덮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듭니다.”
이어 그는 바닥에 이마를 조아렸다.
“만일 지나간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하여주신다면 앞으로는 신명을 바쳐 장군을 따르겠습니다.”
문덕이 잠시 입술을 꾹 다물고 섰다가,
“방금 한 말이 진심이렷다?”
하고 다그쳐 물으니 고신이 결연한 표정으로,
“장부의 입으로 어찌 일구이언을 하겠나이까.
내 비록 한때의 실수로 여기에 이르렀으나 장부의 기개는 아직 남아 있는 사람이오.
다만 그것을 펼 때를 만나지 못했을 뿐입니다.”
하였다.
“일찍이 공의 용맹함은 들어 알고 있었소.”
문덕은 드디어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여 일렀다.
“그런데 공이 만나지 못한 바로 그때가 이제 수삼 년 안쪽에 반드시 올 것이니
때를 만나 낭패를 당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촌각을 허투루 쓰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오.
지난 일은 모두 불문에 부칠 테니 공은 시급히 요동성의 흐트러진 민심을 바로잡고
성의 내외각 곳곳을 요새로 만드는 대역사를 일으키시오.
나도 당분간은 요동성에 기숙할 요량이므로 함께 의논하고 더불어 지혜를 모아봅시다.
어떻소, 그리하겠소?”
문덕이 묻자 고신은 쾌히 동의하고 개과천선할 것을 약속하였는데,
그 후 문덕이 요동성에 머문 한 해 남짓 동안에 실제로 사람이 판연히 달라져서
술과 여자는 상종하지도 아니할 뿐더러 성과 보루를 보수하고 개축할 적에는
역부들과 어울려 비지땀을 흘리며 돌을 져나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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