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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요하(遼河) 4 회

오늘의 쉼터 2014. 7. 21. 13:21

제13장 요하(遼河) 4

 

 

 

요동 지역의 성주들은 대개가 남달리 용맹하거나 문무를 겸전한 지장들로,

 

이는 을지문덕이 앞으로 있을 대전에 대비하여 적임자를 유심히 물색한 결과였다.

 

그들 가운데 신성의 추범동과 오골성의 우민은 문덕의 휘하에 있던 장수들이었는데,

 

문덕이 부임한 뒤 먼젓번의 패덕한 성주를 폐하고 왕의 윤허를 얻어 새롭게 성주로 삼은 자들이요,

 

백암성의 해찬과 비사성의 을사구는 본래부터 덕망이 높은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었다.

 

특히 해찬과 을사구는 궁리가 무궁하고 지략이 뛰어나서 문덕이 성을 보축할 때

 

두 사람의 의견을 물어 그대로 행하였을 뿐 아니라,

 

요하에 보루와 진지를 쌓을 적에도 허리를 낮추어 가르침을 구하니

 

시초에는 문덕의 나이가 적은 것을 시쁘게 여기던 이들도 차츰 그 겸손함에 감복하여,

“향당에는 나이를 따지지만 조정에선 오직 벼슬의 높낮이가 있을 뿐이다.

 

문덕과 같은 사람에게 어찌 나이의 많고 적음을 논하랴.”

하며 진심으로 섬기고 따르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안시성 성주 고각상은 조의선인(?衣仙人) 출신으로 검술이 화려하고 병법에 해박한 사람이었다.

 

그 역시 처음에는 문덕을 고분고분 따르지 아니하다가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신성의 성주를 갈아치우는 것을 보고야 마음이 움직였는데,

 

후에 문덕이 안시성으로 와서 머물자 조석으로 대하면서 그의 진면목을 알고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문덕을 받들고 섬기게 되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문덕과 가장 갈등이 심했던 자는 요동성 성주 고신이었다.

고신은 고국양왕과 광개토대왕의 예손(裔孫)으로 성질이 급하고 힘이 아름드리 거목을

 

가볍게 뽑을 만치 장사였지만 무엇보다 척질간인 좌장군 건무와 절친하여 젊어서부터

 

평양에 가면 건무의 집에서 상객 대접을 받으며 여러 날씩 묵어 오곤 하던 사이였다.

 

그는 본래 도성에서 벼슬을 지내던 사람이었는데, 같이 벼슬에 다니던

 

이와 사소한 일로 취중에 시비를 벌이다가 그만 뜻하지 아니하게 살인을 내게 되었다.

 

이때 제신들의 탄핵을 받아 옥에 갇힐 뻔한 고신을 왕에게 말하여 요동성 성주로 보내준 이가 건무였다.

성주가 되어 요동성으로 온 고신은 처음에는 제법 심기일전하여 부지런히 정사를 돌보았으나

 

차츰 전날의 주사가 되살아나고 변방에 처한 울분까지 겹쳐 나날이 과도한 연회와 폭음을 일삼으며

 

인근의 신성 성주와 짝짝꿍이가 되어 성민들의 처첩과 재화를 탐하는 일이 잦은 탓에 문덕이

 

부임할 시기에는 세간의 평판이 좋지 않았다.

 

소문을 들어 알고 있던 문덕은 먼저 신성으로 가서 성주를 폐한 뒤에 곧장 요동성으로 향했다.

이때 고신의 휘하에 노가(奴伽)라는 거란족 출신의 늙고 약삭빠른 책사가 있었다.

 

노가는 본시 요동성의 한 부자에게 딸을 며느리로 주었다가 고신이 그 딸을 탐낸다는 것을 알자

 

스스로 고신을 찾아가 말하기를,

“예로부터 영웅의 호색함은 죄가 아닙니다.

 

다만 남의 원심을 사게 되면 대개 그 뒷일이 추악해지는 수가 많으니

 

어찌 걱정이 되지 않겠습니까.

 

자고로 맹수를 잡을 때는 그 어린 새끼를 함께 죽이고 토굴을 무너뜨려

 

뒷날의 화근을 미리 없애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올시다.”

하며 사돈네 집이 멸문지화를 당하도록 은근히 부추겨서 남자는

 

코흘리개 어린아이까지 모조리 죽이고 재물과 여자는 빼앗아 고신과 나누어 가졌다.

 

이를 두고 요동성에서 노가를 욕하지 않은 이가 없었지만

 

그는 이 일을 계기로 고신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관청의 구실아치 노릇을 하게 되었다.

 

책사 노가는 신성의 성주가 쫓겨났다는 소문을 듣고 걱정하던 고신에게 넌지시 귀띔하기를,

“을지문덕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자고로 세상에 술과 계집과 재물을

 

마다하는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특히 그는 한창 혈기방장한 젊은 사람이라고 하니

 

제가 생각하기에는 신성의 성주가 기분을 제대로 맞춰주지 않아 불상사가 생긴 것 같습니다.”

하고서,

“주연을 걸게 베풀고 계집을 원없이 안겨서 주지육림에 한껏 파묻히도록 하는 것이 마음을 뺏고

 

환심을 사는 데는 첩경이올시다.

 

다 같이 주색잡기에 빠진다면 누가 누구를 꾸짖을 것이며,

 

통설에는 장부의 의리 중에 청루(靑樓)의 문턱을 넘나들며

 

맺은 의리가 제일 윗길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딴에는 꾀랍시고 안을 내었다. 고신은 노가의 말을 받아들여 문덕이 도착하자

 

곧 술판을 벌였다.

 

그는 평상에 늘 하던 대로 향기로운 술과 기름진 음식을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려놓고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성안의 토호들과 하전들까지 청한 뒤에 아리따운 미희들로 하여금

 

시중을 들도록 하였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벼슬이 높은 문덕이 고신에게 상석을 양보하자

 

고신이 사양도 아니하고 털썩 바른편에 앉았다. 문덕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술을 따를 때도 두 손으로 공손히 따르고 말투도 꼬박꼬박 경어를 썼다.

 

그러자 차츰 우쭐해진 고신은 주는 대로 술을 받아먹고 나중에는

 

문덕의 어깨를 끌어안은 채로 횡설수설 종작없는 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성주가 이미 그 꼴이니 주연의 위계는 자연 말이 아니었다.

 

미희들은 자리를 옮겨 다니며 고신과 노가의 수염을 잡고 흔들기도 하고

 

술상 위에 올라가 병과 잔에 오줌을 싸는 계집도 있었다.

 

노가가 오줌 싸는 계집의 엉덩이에 고개를 처박고서,

“절경이로세. 대관절 이 계곡과 도랑이 뉘 건너던 곳이냐?

 

어허, 그놈의 수풀 한번 무성하게 우거지고 물길 또한 홍수가 난 듯 세차구나!”

주정을 하니 계집이 다리를 벌리고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영감이 뉘 건너던 곳은 알아 무엇하오. 계곡이야 본시 들라고 있는 데요,

 

도랑이야 건너라고 있는 것이니 뜻이 있거든 어서 삿벙거지 노질이나 힘차게 하여 보사이다.”

하며 응수하여 미희들이 일제히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노가가 고신을 돌아보고는,

“이보게, 사위. 자네는 그만 집에 딸년한테나 가보게. 사위가 보고 있으니

 

이놈의 도랑을 신대로 건너기가 아무래도 어렵겠네.”

하며 농지거리를 하였다.

 

노가가 고신에게 사위 운운하며 하대하는 것은 술판에서 매양 있던 일이었다.

 

고신과 토호들은 이를 조금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그저 웃기만 하였으나

 

노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돌연 을지문덕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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