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장왕(璋王) 19
“대체 저 사람이 누구냐?”
남승이 탄복하며 주위에 물으니
급찬 무은의 아들 귀산이라 하므로 무은을 불러 손을 잡고서,
“경은 참으로 훌륭한 아들을 두었소!”
하며 극찬하였다.
무은이 귀산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자식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나가 싸우는데 어찌 아비가 이를 보고만 있겠소!”
하고는 그 또한 장검을 뽑아 들고 훌쩍 말잔등에 올라 급히 아들의 뒤를 쫓아갔다.
두 부자가 앞서거니뒤서거니 말을 달려 맹렬한 기세로 적진에 이르자
곧 창과 칼을 휘두르며 무차별 백제의 진영을 유린했다.
창날과 칼날이 번뜩일 때마다 사방으로 피가 튀고 대열이 크게 무너졌다.
보고 있던 신라병들이 일제히 환호를 지르기 시작하였다.
바로 그때였다.
“나 또한 신라의 장부로 귀산과는 이미 오래전에 생사를 함께하기로 천지신명께 맹세한 바 있다. 어찌 믿음으로 얻은 벗과 벗의 부친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데 한가로이 이를 구경만 하겠는가!”
다시 한 젊은이가 크게 고함을 지르며 말을 짓쳐 나가니
그는 다름이 아닌 추항이었다.
백제의 4만 대군이 불과 세 사람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항전에 크게 술렁거렸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신라의 잔병들은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무기를 다투어 찾아 들었다.
심지어 부상병들조차도 갑옷을 고쳐 입고 말에 올랐다.
누군가의 입에서 임전무퇴라는 구호가 흘러 나왔고 그것은 추락할 대로 추락한
군사의 사기를 되살리는 신라군 전체의 구령으로 변했다.
일사불란하게 전열을 재정비한 신라병들이 여출일구로 임전무퇴를 외치며 역공을 취해오자
이미 승리감에 도취해 있던 백제군들은 크게 당황했다.
“적의 숫자는 겨우 이삼천이다! 당황하지 말고 한 놈도 남김없이 무찔러 없애라!”
장수들이 큰 소리로 백제군을 독려하였으나 전세는 순식간에 뒤바뀌어 있었다.
외석성의 신라병들은 천산과 옹잠성에서 두 차례나 백제군에게 패한 허약한 잔병들이
이미 아니었다.
“우리에겐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 마지막 힘을 짜내어 한 놈이라도 더 베고 나도 죽으리라!”
한결같이 눈에 핏발이 선 채 필사의 각오로 덤벼드는 신라병의 기세를 백제의 장수와 군졸들은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4만이나 되는 백제의 대군이 이삼천에 지나지 않은 신라의 잔병들에게 밀려 뒷걸음질을 치는
믿지 못할 광경이 바로 외석성에서 벌어졌다.
해수는 하는 수 없이 각 군의 장수들에게 옹잠성으로 퇴각할 것을 명하였다.
그런데 퇴각 명령이 떨어지자 그 많은 군사가 일제히 등을 돌려 달아나는 바람에
진중에선 큰 혼란이 일었고, 도처에서 말과 사람이 한덩어리가 되어
저희들끼리 부딪치고 짓밟느라 아수라장이 되었다.
체계없이 대병을 움직인 응분의 결과였다.
백제군이 정신없이 퇴각하는 모습을 본 신라병들의 사기는 가히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만했다.
저마다 임전무퇴를 목청껏 외치며 승리의 함성을 내지를 즈음 돌연 한 장수가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지금 저들을 궤멸하지 않으면 반드시 뒤에 큰 우환이 생길 것이다!
우리라고 어찌 도망가는 적을 보고만 있겠는가!”
모든 사람이 소리나는 곳을 바라보니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터라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으나
비껴 잡은 장창과 우렁찬 목소리로 보아 무은의 아들 귀산이 틀림없었다.
귀산의 옆에서 역시 피를 덮어쓴 추항이 고함을 질렀다.
“적장 해수의 목을 베지 않고는 나 또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말을 마치자 두 사람은 고함을 지르며 백제군을 추격하였고,
나머지 신라병들도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두 사람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움직임이 둔하고 느릴 수밖에 없었던 백제의 대군은 이내 꼬리를 물고 쫓아온
신라병들에게 또다시 혼쭐이 났다.
옹잠성으로 퇴각하는 동안에도 수천의 병사가 목숨을 잃었고 길바닥에는
가로누운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먼저 옹잠성에 이른 백제군들이 급히 전열을 정비하여 쫓아오는 추격병과
교전을 시도하였으나 역시 당해내지 못하고 천산으로 쫓겨갔다.
천신만고 끝에 천산에 이른 해수가 따라온 군사를 헤아려보니
4만 대군 가운데 살아남은 자가 기껏 1천여 명에 불과했다.
해수로선 고개를 들 수 없는 참담한 패배가 아닐 수 없었다.
피차 마찬가지였다.
비록 귀산 부자와 추항의 분전으로 백제의 대병을 무찔렀다고는 해도
신라군 역시 막대한 피해를 입기는 백제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옹잠성을 거쳐 모산성까지 살아온 군사는 채 2천이 되지 못했고,
항차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던 두 영웅 귀산과 추항마저 만신창이가 되어
모산성으로 돌아오는 중에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전령을 통해 이 소식을 들은 신라왕 백정은 친히 군신들을 거느리고
궐문 밖의 들까지 마중을 나와 귀산과 추항의 시체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백정왕은 두 사람의 시신을 거두어 예와 정성을 다해 후히 장사 지내고 귀산에게는 내마,
추항에게는 대사의 벼슬을 추증한 뒤 그 식솔들에게 곡식과 전지를 하사하여 위로하였다.
'소설방 > 삼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0장 전운(戰雲) 1 회 (0) | 2014.07.19 |
---|---|
제9장 장왕(璋王) 20 회 (0) | 2014.07.19 |
제9장 장왕(璋王) 18 회 (0) | 2014.07.19 |
제9장 장왕(璋王) 17 회 (0) | 2014.07.19 |
제9장 장왕(璋王) 16 회 (0) | 2014.07.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