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9장 장왕(璋王) 17 회

오늘의 쉼터 2014. 7. 19. 13:42

제9장 장왕(璋王) 17  

 

금성을 출발한 원군이 모산성을 거쳐 남승이 가 있는 옹잠성에 이르니

남승이 이리벌을 보고 마구 화를 내며,

“어찌하여 이제야 왔나? 진작에 왔으면 백제군을 벌써 섬멸하고

지금쯤은 사비성 아이의 못된 버르장머리를 단단히 고쳐놓았을 터인데.”

하고 다짜고짜 원군이 늦게 온 것을 책망하였다.

이리벌이 보니 적의 공격을 받아 위급함에 처해 있다던 아군이 도리어

접경을 넘어 백제군을 추격하고 있으므로,

“금성에서 듣던 바와 다르니 대체 어찌 된 영문입니까?”

하고 내막을 물었다.

남승이 급히 말을 얼버무리며,

“영문이나마나 어서 군사를 네 갈래로 나누어 백제군을 치세.

여기는 2천만 남겨두고 나머지 군사는 소타성과 외석성, 천산성으로 고루 보내게나.

내가 며칠을 두고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저것들은 군율도 없고 병법도 알지 못하는

만판 허깨비들일세!”

멀리 적진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그간의 경위를 말하였다.

이리벌이 남승의 말을 들으며 적진의 형세를 가만히 관찰하니

그 짜임새가 지나치게 어지럽고 문란하여 일부러 유인하는 술책임이 한눈에 보였다.

황급히 남승을 바라보며 상기된 얼굴로,

“큰일났습니다, 장군! 저것은 유인책의 전형이올시다.

시급히 군사를 빼내어 모산성으로 퇴각해야 해를 입지 않을 것이오!”

하고 고함을 지르니 남승이 껄껄 목청을높여 웃으며,

“어찌 난들 자네가 알아보는 유인책을 모르겠나?

그래서 시초에는 나도 각 성의 장수들에게 섣불리 공격하지 말라는 군령을 내렸으나

막상 겪어보니 계략이고 술책이고가 없네.

자네가 눈으로 보면 모르겠나?

모산성에서 야금야금 먹어 들어온 땅이 이미 오륙십 리일세.

복병을 내었다면 벌써 내었지.

내가 각 성으로 사람을 보내어 물어보니 모다 마찬가질세.

더 볼 것도 없이 내일 해가 뜨는 것을 기화로 네 곳에서 성하게 몰아붙이면 웅진까지도

수중에 넣을 수가 있을 것이네.”

장히 득득만만하여 큰소리를 치고서,

“이제 온 자네가 알면 무엇을 얼마나 알겠나? 군소리 말고 하라면 하라는 대로 하게나.”

하고 말끝을 여물렀다.

이리벌이 간곡한 말로 여러 차례 만류하였으나 남승이 듣지 아니하고 종내 버럭 화까지 내며,

“네 감히 총관의 군령을 어길 참이냐?”

험악하게 목자를 부라리므로 하는 수 없이 옹잠성에 2천의 군사를 남겨두고

나머지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 각 성으로 향하였다.

건품이 있는 소타성에는 3천의 군사를 보내고,

이리벌 자신은 2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비리야가 있는 외석성으로 갔으며,

무은에게는 3천의 군사를 데리고 천산성의 무리굴과 합류하도록 하였다.

이튿날 해가 뜨자 네 군데 성을 거점으로 신라군들이 북소리를 울리며

총력을 다해 백제군을 공격하였다.

사방에서 쫓긴 백제군들이 몸을 피하여 일제히 몰려든 곳은 천산의 커다란 못가였다.

백제군을 쫓아온 신라군들이 못가에 이르러 문득 이상한 낌새를 느끼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사방에서 수도 헤아리기 힘든 적군이 몸을 드러내는데,

그 틈에서 늠름하게 생긴 한 장수가 마상에 높이 앉아 큰 소리로 이르기를,

“어서 오너라. 백제국의 병관좌평 해수가 이곳에 너희들의 무덤을 마련하고

기다린 지 실로 오래다!”

말을 마치자 왼팔을 번쩍 치켜드니

그것을 신호로 복병들이 산지사방에서 함성을 지르며 달려나오기 시작했다.

당황한 신라군들이 미처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이 복병들은 닥치는 대로 칼로 베고

창으로 찌르고 갈고리를 내어 신라군의 사지를 처참히 내리찍었다.

피가 사방으로 튀고 울부짖는 비명이 천지를 가득 메웠다.

무수한 신라군들의 목과 몸이 각각 따로 못 속으로 풍덩풍덩 빠져들었다.

대택 주변에는 순식간에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시체가 널브러져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네 갈래로 도착한 신라군 1만 5천은 해수가 대택 주변에 설치한 백제의 복병 2만에게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가까스로 명을 부지한 자들 중에도 다시 절반 가량이 불구가 되었다. 신라의 장수들은 군졸들을 돌보기는커녕 제 한 몸을 보전하기에도 손발이 바빴다.

비리야는 쇠갈고리에 허벅지를 찍혀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절뚝거렸으며,

건품도 적장 백기의 손에 다 죽게 된 것을 마침 이리벌이 삼지도를 휘두르며

몸을 아끼지 아니하고 달려들어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다.

“아아, 내 어찌 복병이 있을 것을 끝까지 경계하지 않았던가!”

병부령 남승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후회했으나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군사의 절반을 잃고 사력을 다하여 천산 못가를 빠져나온 신라군들이

백제군의 추격을 받으며 옹잠성 근처의 들판에 이르렀을 때였다.

미처 한숨을 돌리기도 전에 갑자기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더니

백제 기병들이 개미떼처럼 자욱하게 몰려와 순식간에 퇴로를 가로막았다.

남승을 비롯한 신라의 잔병들은 백제군을 보자 오금이 떨려 제대로 서 있을 힘조차 없었다.

그때 말쑥하게 생긴 옥골선풍의 한 선비가 마상에서 큰 소리로 말하기를,

“신라군은 들으라! 백제국의 내신좌평 개보가 이곳에서 너희가 오기를 지루할 정도로 기다렸다.

어찌 한 놈인들 목을 붙여둔 채로 되돌려 보내겠는가.

이제 너희의 썩은 육신으로 이 넓은 들판에 거름을 먹여 명년 가을 우리 백성들의

허기진 배를 한껏 부르게 하리라!”

말을 마치자 팔을 들어 신호하니 기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맹렬한 기세로 돌진하였다.

이미 전의를 상실한 신라병들은 또다시 큰 혼란에 빠져 어쩔 줄 모르고 갈팡질팡하였다.

칼에 베여 넘어지고 창에 찔려 죽는 자가 이번에도 부지기수였다.

모산성으로 돌아가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남승은 서북편 외석성으로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외석성은 간신히 주춧돌만 올려놓은 성이었고,

모산성이나 만노군과는 점점 더 멀어지는 셈이었으며,

외석성으로 간다고 별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런저런 사정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믿을 데라고는 외석성 주변의 야트막한 구릉 하나가 전부였다.

신라의 명장 이리벌과 무리굴이 악전고투하며 외석성으로 향하는 길을 열자

남승이 잔병들과 더불어 정신없이 그 뒤를 따랐다.

추격해오는 백제군은 무은의 군대가 맡아 처절한 혈전을 벌였다.

천신만고 끝에 외석성에 이르러보니 살아남은 잔병의 숫자가 고작 3천여 명이었다.

게다가 신라군의 수장인 병부령 남승마저 이름 없는 군졸의 칼에 등짝이 찔려

갑옷 안이 모두 피로 물들어 있었다.

3천 명 가운데도 부상자를 빼고 나면 손에 무기라도 잡을 수 있는 자는

겨우 2천여 명에 불과했다.

남승은 성안으로 들어오자 구릉으로 군사들을 숨기고 장수들을 불러 대책을 강구했다.

그러나 절해고도와 마찬가지인 외석성으로 피한 마당에 특별한 대책이 있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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