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세 공주 8
숙흘종의 말에 대왕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반은 욕심이 많고 야망이 큰 인물이올시다.
신의 어머니인 별궁의 노태후가 살았을 적에는 상께서도 백반을 함부로 다스리지 못하여
늘 고민하지 않았습니까?
백반은 다음 왕통이 자신에게 미칠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을 겝니다.
그런데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이 덕만을 비롯한 세 공주요,
또한 근자에 이르러 난데없이 상의 주변에 나타난 전왕의 아들 용춘도
여간 눈에 거슬리지 않을 것이며, 항차 자신의 듬직한 후원자였던 별궁의 노태후마저
돌아가시고 나니 백반으로서는 훗날의 방비와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겁니다.
신이 여러 곳에서 듣기로 불법에 심취한 덕만을 상악의 장안사까지 데려갔던 자가
백반의 처였다고 하니 이는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없지 않습니다.
하물며 선화 공주는 그 절륜한 미색이 나라 밖에까지 파다하여 중국의 아이도
그 이름을 입에 담는다 하거니와, 만일에 선화가 용춘이나 또 다른 성골 도령과
혼인이라도 한다면 이는 백반에게는 큰 우환이요,
훗날을 위협하는 새로운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겠지요.”
“종조부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백반이 특히 용춘의 일을 경계하는 듯합니다.
용춘이 세 공주 가운데 하나와 혼인하여 나의 사위가 된다면 백반에게는
실로 낭패가 아니겠습니까?”
“바로 보셨습니다. 이런 까닭에 경사의 아이들 사이에서 선화에 대한 해괴한 노래가 나돌자
사람들을 시켜 널리 퍼뜨리고 마침내는 조정까지 이를 가지고 들어온 듯합니다.
신이 백반이 아니므로 딱히 단정하여 말씀드리기는 어려우나 이는 덕만을 뺀 두 공주 가운데
인물이 나은 선화부터 왕실에서 쫓아내려는 계책이요,
이번의 일이 끝나고 나면 다음에는 천명에게 또 다른 화가 미칠 공산이 큽니다.”
“하면 종조부께서는 노래를 지은 자도 백반이라고 보십니까?”
“지은 자는 신도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백반은 아닌 듯합니다.
백반이 없는 것을 만들어낼 만큼 치밀한 지략까지 갖추었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아마도 추측컨대 선화 공주를 마음속으로 흠모하는 자가 원풀이나 하자고
지은 노래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자야 꼽으라면 금성에만 하더라도 여러 수백, 수천 명이 있을 테지요.”
이에 대왕이 침통한 얼굴로 크게 탄식하며,
“언제나 백반이 말썽입니다!
과인이 즉위한 후로 이날 이때까지 백반 때문에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습니다.
아, 백반이 남도 아니고 과인의 아우인데, 대체 이 노릇을 어째야 한단 말입니까!”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숙흘종이 말하기를,
“이번 선화의 일은 중신들의 뜻을 따를 뿐 다른 도리가 없을 겝니다.”
하고서,
“그러나 하나 남은 천명 공주한테까지 화가 미치는 일은 사전에 막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곧 천명의 일로 나라와 왕실이 또 한 차례 큰 곤욕을 치를 것입니다.
상께서는 모쪼록 크게 마음을 가지십시오.
신이 보기에는 그래도 백반과 대적할 만한 이가 용춘밖에는 없지 싶습니다.”
하였다.
대왕이 숙흘종의 조언을 깊이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리고 뒷날, 선화의 일로 괴로운 중에도 천명을 불러 묻기를,
“너의 배필로 용춘이 어떠한가?”
하니 천명이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조금 생각하다가,
“용춘 도령으로 말하자면 저의 당숙으로 그 기개와 인품이 신라에서 으뜸이요,
전날에는 상대등의 아들 역부를 단칼에 응징하여 왕실의 권위를 만천하에 높이 세웠을 뿐 아니라,
백성들 사이에서도 신망이 매우 두텁다고 들었습니다.
아직 소녀가 나이 어리고 용춘 당숙이 사사로이는 숙부인지라 배필로는 생각해본 바가 없으나,
고래로 이 나라 왕실의 법도가 촌수를 따지지 아니하니 만일 아바마마께서 허락하시고
용춘 당숙이 이를 마다하지 않으면 소녀로서는 마땅히 지아비로 받들어 평생의 고락을
함께하겠나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대왕이 천명의 대답에 크게 흡족하여 당석에서 사람을 시켜 용춘을 불러들이고 물었다.
“너는 만약 나의 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배필로 정한다면 과연 누구를 택하겠느냐?”
용춘이 처음에는 생판 뜻밖의 질문이라 잠깐 당황하였으나
이내 자세를 가다듬고 읍하여 아뢰는데,
“공주 셋 가운데 덕만은 인품과 지기가 출중하고 선화는 미색이 절륜하나
신이 보기에는 모두 천명의 미덕인 기품과 화이부동(和而不同)함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천명은 그 후덕한 성품이 덕만의 지기를 제압하고 바른 몸가짐과 조신한 태도가
선화의 절륜한 미색을 능가하니 감히 저에게 한 사람을 고르라고 한다면
마땅히 천명을 고를 것입니다.”
마치 대왕이 바라던 대답을 미리 알고 온 듯이 말하였다.
이에 대왕이 낯빛을 부드럽게 하여,
“하면 네가 천명을 배필로 삼아 나의 사위가 되겠느냐?”
하고 묻자 용춘이 당장 희색이 만면하여,
“이는 신이 꿈에서나 바라던 일이옵니다.”
하고 수락하므로 대왕이 그날로 왕실과 나라에 이 사실을 두루 알리고
시급히 두 사람의 혼인 날짜를 정하였다.
왕실의 제일 어른인 사도 태후는 소식을 듣는 순간 기뻐 어쩔 줄을 몰라하였으나
동륜비 만호 태후는 본래 용춘을 탐탁찮게 여기던 사람이라,
“어찌하여 하필 용춘이냐?”
하고 대왕을 불러 몇 번이나 반대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게 대왕의 뜻이 이미 굳은 것을 알고는,
“이는 범의 새끼를 왕실로 끌어들인 것이나 진배없다.
상이 이 일로 반드시 후회할 일이 생길 것이니 두고 보라.”
입맛을 다시며 뒷전에서 거듭 악담을 늘어놓았다.
용춘을 마음에 안 들어하기로는 마야 왕비 또한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왕비는 천명의 일보다도 선화의 일이 더 걱정거리인 데다
대왕이 왕실의 잔치를 치르고 나면 선화의 일은 잠잠해질지도 모른다는 말에
희망을 걸고 나중에는 도리어 악담을 퍼붓는 만호 태후를 설득하기까지 하였다.
용춘과 천명이 길일을 택하여 왕실의 법도에 따라 혼례를 치르니 모처럼 왕실의 잔치를
구경하느라 만조의 백관들은 물론이요
나라 각지에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금성이 통째 북적거렸는데
유독 왕의 아우인 백반만이 칭병하고 집에서 나오지 아니하였다.
왕이 이 사실을 알고 별도로 사람을 보내어 궐로 청하였으나
사신이 백반은 만나보지도 못하고 혼자 돌아와서,
“집안 사람들의 전언에 따르면 진정왕께서 병이 위중하여 변도 제대로 가리지 못한다 하옵니다.”
하였다.
이때가 건복 12년 을묘(595년) 초겨울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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