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병매 (184)
제21장 무송(武松) 1회
“자, 숲 속에 가서 좀 쉬었다 가세”
“저기 멀리 성문이 보이는데요. 거의 다 왔잖아요”
“아니야, 다 왔으니까 좀 쉬어 가자는 거라구”
“다리가 몹시 아픈 모양이죠? 대륜(大輪)스님”
“허허허··· 다리가 아파서 그러는 게 아니라니까.
소륜(小輪)은 나를 따르기만 하면 돼”
“물론이죠. 여부가 있겠습니까”
대륜 화상(和尙)이 앞장을 서고,
소륜 화상이 뒤를 따라 행길에서 벗어나 숲 쪽으로 간다.
두 승려가 똑같이 머리에 삿갓을 눌러 썻고, 손에는 길고 굵직한 지팡이를 짚었다.
숲 속의 적당한 풀밭에 주 승려는 지팡이를 놓고, 바랑을 벗는다.
그리고 자리를 잡고 앉아서 삿갓도 벗는다.
삿갓 속에서 나타난 승려의 머리가 두 사람 다 거뭇하게 자랐다.
머리털 뿐 아니라 수염도 검실검실하다.
먼 길을 걸어오는 모양이다.
대륜 화상은 한마디로 거인(巨人)이다.
앉은 무더기 소륜 화상의 거의 배는 됨직해 보인다.
소륜은 그저 보통사람 크기다.
“아- 드디어 왔군”
감개가 무량한 듯 대륜은 감탄조로 내뱉으며
그 자리에 팔베개를 하고 벌렁 드러눕는다.
“정말 꿈 같애요”
소륜도 동감이라는 듯이 맞장구를 친다.
“좀 누워. 누워서 한숨 자라구”
“자다뇨? 아무래도 대륜 스님께서 무척 피곤하신 모양이에요”
“피곤해서가 아니라,
해가 진 다음에 성안으로 들어갈려고 그러는 거라구”
“왜요?”
“중으로 변장을 하기는 했지만,
내 체구가 워낙 크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길을 끌 것 같단 말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우선 성문을 통과할 때가 위험하다구.
수문군(守門軍)이 나를 알아볼지도 모르거든.
그들 중에는 그전에 내 부하였던 자도 있을지 모르잖아”
“맞아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야 된다 그거군요”
“그렇지, 만약 내가 누구라는 것이 탄로가 나는 날이면 만사가 허사잖아.
우리가 여기까지 얼마나 고생을 하면서 왔느냐 말이야”
“그렇고말고요. 아 - 그럼 소승(小僧)도 길게 뻗어볼까”
그러면서 소륜도 그 자리에 번듯이 드러눕는다.
잠시 후,
대륜을 잠이 들어 드르릉드르릉··· 코를 골기 시작한다.
그러나 소륜은 잠이 오지가 않아 신록이 우거져 가고 있는
눈부신 숲의 나무들을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다.
무송(武松) 2회
대륜은 무송이었고, 소륜은 내왕이었다.
그들은 유배지인 맹주 땅에서 용케 만났던 것이다.
그 해후(邂逅)는 참으로 우연이었고,
그들로서는 행운이라면 커다란 행운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강제 노동에 시달리다가 끝내는 죽어갈 수밖에 없는 절망의 땅에서
한 고장 사람을 만났으니 말이다.
같은 고장 사람이기는 하지만, 무송은 내왕이를 알 턱이 없었다.
무송은 청하현의 순포도루였고, 내왕이는 서문경네 집의 한낱 하인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내왕이는 무송을 잘 알고 있었다.
자기 고장의 순포도루를 모를 턱이 없고,
게다가 무송은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은 호걸이며,
억울하게 독살당한 자기 형의 원수를 갚으려고 내왕이 자신이 모시고 있는
서문경과 반금련을 죽이려고 집에 뛰어들었다가 실패를 하고서 결국 유배를 당한
그런 분이니 말이다.
그리고 그는 체구가 거인이기도 해서 한눈에 대뜸 알아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내왕이로부터 유배되어 온 까닭을 자세히 얘기들은 무송은 주먹 하나를 불끈 쥐며,
“죽일 놈, 천하에 고약한 놈, 그런 놈을 그대로 살려두다니··· 하늘은 뭘 하는 거야”
하고 이를 뿌드득 갈았다.
그러잖아도 기어이 살아서 청하현으로 돌아가 형의 복수를 하고야 말겠다고
속으로 단단히 다짐을 하고 있던 무송은 내왕이를 만나게 된 것이 더없이 반가웠다.
어쩌면 하늘의 배려가 아닌가 싶기도 했다.
서문경이 때문에 유배되어 와서 그에 대해 짙은 원한을 품고 있는 또 한 사람의 말하자면
동지를 만난 셈이니 말이다.
그래서 무송은 기회를 보아 은밀히 자기의 의중을 내왕이에게 털어놓았다.
그랬더니 내왕이는 서슴없이 동의를 하면서,
“내가 살아서 돌아가면 서문경이 그놈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말겠어요. 두고 보시라구요”
하고 입에서 침을 튀기며 흥분을 했다.
“자네가 서문경이를 처치하면 그럼 나는 뭘 하지? 옆에서 구경이나 할까?”
무송은 싱그레 웃음을 떠올렸다.
어느 비가 내리는 몹시 어두운 밤,
무송과 내왕이는 숙소에서 빠져나와 산으로 튀는데 성공했다.
무송(武松) 3회
산으로 산으로 해서 사지(死地)를 벗어난 그들은 깊은 산사(山寺)에 들어가 얼마동안
일을 해주고 머물면서 염불을 익힌 다음 승려로 가장하여 청하현을 향해 길을 떠났다.
나이는 무송이 내왕이보다 아래였다.
그러나 순포도루였던 무송이 노비 신분이었던 내왕이보다 어느 모로나 위여서
무송이 우두머리고 내왕이는 졸개인 셈이다.
그래서 그들은 승명(僧名)을 그저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무송에게는 큰댓자를 붙여
대륜이라고 했고 내왕이는 작을 솟자가 붙은 소륜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말하자면 가짜 중인 대륜과 소륜은 멀고 먼 험로(險路)를 운수승(雲水僧)이 되어 탁발을 하며
원수가 살고 있는 땅인 청하현으로 돌아온 것이다.
맹주의 사지에서 탈출한지 거의 일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해가 지고 땅거미가 자우룩이 깔린 무렵에야 그들은 일어나 다시 바람을 메고 삿갓을 썼다.
그리고 지팡이를 들고 숲을 나섰다.
성문이 멀리 보이기는 했으나 꽤 먼 거리였다.
그들이 성문 가까이 이르렀을 때는 이미 어두워져서 행인의 얼굴이 잘 분간되지가 않을 정도였다.
성문이 밑에서부터 천천히 닫히고 있었다.
“여보시오. 나리 잠깐만···”
내왕이가 한손을 쳐들고 달려간다.
무송도 얼른 뛰기 시작한다.
문지기가 멈추어 서서 노려보듯 두 사람을 바라본다.
“아이고 미안합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큰일 날 뻔했네”
내왕이가 삿갓을 쓴 채 문지기에게 꾸뻑 머리를 숙이며 성문을 들어서자
무송도 점잖은 걸음으로 뒤따르며,
“수고하십니다. 나무관세음보살-”
하고 가볍게 합장을 해 보인다.
그러자 문지기는 약간 눈이 둥그레지며 무송의 위아래를 훑어본다.
대단히 덩치가 큰 중이로구나 싶은 모양이다.
막사에서 횃불을 들고 나오던 수문군 한 사람이 두 승려,
특히 거구의 무송을 보고 주춤 걸음을 멈춘다.
“햐- 그 중 한번 거창하게 크구나”
혼자 중얼거리더니
“여보”
하고 불러 세운다.
무송과 내왕이는 가만히 멈추어 선다.
그들 앞으로 횃불을 들고 다가선 수문군이 거구의 무송을 힐끗힐끗 훑어보며 불쑥 묻는다.
“어느 절에 있소?”
무송(武松) 4회
“청룡사(靑龍寺)에 있소이다”
무송은 시치미를 뚝 떼고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절 이름 하나를 댄다.
그동안 수많은 절을 찾아 신세를 졌던 것이다. 운수승인 양 하면서 말이다.
“청룡사? 청룡사가 어디 있는 절이오?”
“정주(鄭州)땅에 있지요”
“정주 땅이라··· 아니 그럼 그 먼 곳에서 여기까지 왔단 말이오?”
그 수문군은 정주라는 곳이 어딘지를 알고 있는 듯 놀라는 기색이다.
“거기서 여기까지 올려면 몇 달이 걸린텐데요”
“맞아요. 석 달째 들어섰다오. 이 수염을 좀 보시구려”
무송은 삿갓 밑으로 드러나 보이는 검실검실한 턱수염을 한손으로 슬슬 쓰다듬어 보인다.
“흠- 그 먼데서 여긴 뭘 하러 왔소?”
“볼일이 있어서 왔죠”
“무슨 볼일이오?”
“그것까지 일일이 알아야 되겠소?”
무송은 절로 어투가 좀 무뚝뚝해진다.
몇해 전 자기가 순포도루로 있을 때 같았으면 수문군도 다 부하들이었으니
자기를 보면 그저 쩔쩔맬 터인데,
그런 녀석한테 꼬치꼬치 검문을 당하는 꼴이 되어 슬그머니 화가 나고,
아니꼽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지금 횃불을 들고 자기를 검문하고 있는 녀석이
그 당시의 부하는 아닌 듯 낯선 얼굴이어서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중이 건방지게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할 것이지···”
그 수문군은 도대체 어떻게 생긴 중인지 그 얼굴이나 좀 보자는 듯이
한손을 뻗어 올려 무송의 삿갓을 훌떡 들춘다.
“어허, 이게 무슨 짓이야”
무송은 거침없이 반말로 언성을 높인다.
“뭣이 어째? 이놈의 중이 누구한테 함부로 말을···”
“너 이놈!”
냅다 그만 무송은 호통을 친다.
“아니 이놈이··· 간뎅이가 부었어. 허, 나참 기가 막혀서··· 맛을 좀 모고 싶은 모양이지”
그러자 성문 한쪽을 닫고서 멀뚱히 지켜보고 있던 문지기도 놀라 후다닥 다가온다.
“뭐야? 중놈이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나···”
무송은 두 놈을 싸잡아 노려보며,
“이놈들아 내가 누군지 아느냐?”
하고 으름장을 내뱉는다.
무송(武松) 5회
뜻밖에 성문을 지나면서 수문군과 무송 사이에 시비가 붙어 고성이 오가게 되자,
내왕이는 어쩌면 일이 여기서 틀려 버리는 게 아닌가 싶어 바짝 긴장이 되었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야 된다는 식으로 일부러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려
성문을 통과하려고 했던 무송이 수문군을 상대로 분통을 터뜨려 언성을 높이다니
어리석기 짝이 없다 싶으며 내왕이는 조마조마한 눈길로 그를 지켜본다.
“이놈아, 네놈이 중놈이지 누구란 말이냐?”
횃불을 든 수문군이 눈을 부라리며 내뱉자,
무송은 그만 웃음을 터뜨린다.
“엇헛헛허···”
호걸웃음이다.
그리고 굵은 목소리로 점잖게 뇌까린다.
“내가 누구냐 하면 서문경이의 처남이다.
서문경이가 내 매부란 말이다. 알겠느냐?”
그 말에 두 수문군은 그만 표정이 눈에 띄게 달라진다.
그들의 기가 팍 꺽이는 것을 보자
무송은 더욱 기세를 돋구어 서슴없이 내뱉는다.
“서문경이의 다섯 번째 마누라 반금련이가 내 여동생이라 그말이다.
이녀석들아. 헛헛헛···”
내왕이는 어이가 없는 모양이다.
곧 저도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눌러 참는다.
“아이고 그렇습니까. 몰라 봤습니다”
“부전옥 대감의 처남이신 줄을 알았다면 저희가 그랬을 리가 있습니까.
정말 죄송합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두 수문군은 머리를 굽실거리며 사죄를 한다.
무송은 속으로 부전옥 대감이라니,
그럼 서문경이가 부전옥 감투를 썼단 말인가··· 싶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계제가 아니다.
“오냐, 됐다. 모르고 그랬는데 어쩌겠느냐. 용서하지”
그리고 무송은 내왕이를 돌아보며, 말한다.
“자, 소륜, 어서 가자구”
“예, 대륜 스님”
내왕이는 속으로 휴우- 안도의 숨을 내쉬며 얼른 앞장을 선다.
어둠 속으로 멀어져가는 두 승려를 멀뚱히 바라보며 횃불을 든 수문군이 중얼거린다.
“서문경이의 처남일 줄이야 누가 알았나. 나참 더러워서···”
그러자 다른 한사람도 맞장구를 치듯,
“반금련이의 오래비가 중이었구먼,
중놈이 덩치는 더럽게 크네, 씨팔···”
하고 투덜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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