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금병매(金甁梅)

금병매 (183) 흉몽(凶夢) <41~45회>

오늘의 쉼터 2014. 7. 4. 22:47

금병매 (183)

 

 

흉몽(凶夢) 41회 

 

 

 

 부스스 일어나 앉은 이병아는 그 검정옷을 입은 사내를 보자

 

왠지 기분이 절로 으스스해져서 자기도 무르게 얼른 침상에서 내려섰다.

 

그리고 의자를 두개 가져다가 두 사람 앞에 놓으며 앉으라고 권했다.

양세걸은 의자에 앉았다.

 

그러나 그 검정옷을 입은 사내는 말없이 그대로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이 여잡니다”

하고 양세걸이 그 사내에게 말한다.

알았다는 듯이 사내는 가만가만 고개만 두 번 끄덕였다.

이번에는 양세걸이 이병아를 보고 말한다.

“내일 밤에 이분이 당신을 데리러 올 터이니 목욕재계를 하고 기다리고 있으라구”

이병아는 두려운 눈길로 힐끗 그 검정옷을 입은 사내를 바라보고는 얼른 고개를 돌린다.

“알아들었지?”

“···”

“왜 대답이 없어?”

이병아는 이미 속으로 짐작을 하고 있으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묻는다.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데요?”

“몰라서 묻는거야? 나하고 같이 살기로 했잖아”

“···”

“며칠 전 밤에 나하고 같이 살겠다고 사정을 하듯이 말했었잖나 말이야”

그러자 이병아는 그날 밤의 그 황홀하던 정사가 머리에 떠오르는 듯

그만 얼굴에 수줍은 미소가 활짝 어린다. 그리고 서슴없이 지껄인다.

“그럼 이분이 당신 계시는 곳으로 나를 데려가는 군요. 맞죠?”

“예, 알았어요. 목욕재계를 하고 기다리고 있을께요”

이병아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자 그 사내는 얼굴에 보일 듯 말 듯한

싸늘한 웃음을 떠올리며 이번에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또 두 번 가만가만 끄덕인다.

그리고 말없이 돌아서서 그림자처럼 방을 나간다.

얼른 양세걸도 의자에서 일어나 뒤따라 사라진다.

이튿날 아침 이병아는 자리에서 일어나자 곧바로 거실에 놓여있는 경대 앞에 가

앉아서 헝클어진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세수도 안한 무표정한 얼굴로 거울에 비치는 자기의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며

머리만 빗고 빗고 또 빗었다.

수춘이가 다가와도 몰랐다.

“마님, 왜 머리만 자꾸 빗고 계세요? 세수를 하고 아침을 잡수셔야죠”

그러자 이병아는 수춘이를 돌아보며,

“나 목욕을 해야 된다구. 목욕을···”

하고 중얼거리는 듯이 말한다.

 

 

흉몽(凶夢) 42회 

 

 

 

 “하하하··· 아침부터 무슨 목욕은요?

 

목욕을 하신다면서 머리는 왜 자꾸 빗죠?

 

머리는 목욕을 하신 다음에 빗어야죠. 안 그래요?”

이병아는 못 들은 척 다시 거울을 향해 머리를 빗는다.

 

마치 정신이 살짝 어떻게 된 사람 같다.

 




수춘이는 이병아 마님이 오늘은 아침부터 망령을 부리는구나 싶어서,

“마님, 어서 일어나세요. 세수를 하시고 아침을 잡수셔야죠”

하고 한쪽 팔을 잡아 일으켜 세운다.

이병아는 마지 못하는 듯 빗을 놓고 일어나 수춘이에게 이끌리다시피 하여 세수를 하러 간다.

아침을 조금 먹는둥 마는둥 하고서 이병아는 식탁에서 일어나며 혼자 중얼거리듯이 말한다.

“나 목욕을 해야 된다구. 목욕재계를 하고서 기다려야 된다니까”

수춘이가 웃으면서 묻는다.

“아까부터 목욕 목욕 하시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기다리다니 누구를 기다리신다는 거예요?”

“나를 데리러 오는 사람이 있다니까. 오늘밤에···”

“오늘밤에요? 누군데요? 그게···”

“검정옷을 입은 분이지”

“검정옷을 입은 분요?”

“응, 나 오늘밤에 말이야 그분을 따라간다구”

“어디로요?

“어디겠어, 저승이지”

“어머”

“정말이라구. 저승에 가서 말이야 첫 남편이었던 어른하고 다시 같이 살게 된다구.

그리고 거기 가면 우리 관가도 만날 수가 있을테니까 내가 다시 데리고 키울 작정이지”

이병아는 생각만 해도 벌써 기분이 좋기만 한 듯 초점이 흐릿한 눈에 미소를 떠올린다.

“마님, 정신 차리세요.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수춘이는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 표정이 어쩐지 섬뜩하게 느껴져서

약간 긴장이 되어 내뱉는다.

그리고 어서 침상에 가서 누워 계시라고 침실로 데리고 간다.

그날 오후 이병아는 수춘이를 시켜 기어이 물을 데우게 해서 목욕을 하기 시작했다.

머리를 감고, 목욕통 안에서 몸을 씻고 있는데, 수춘이가 들어섰다.

“마님, 제가 등을 밀어드릴게요”

“오냐, 고맙다.”

수춘이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이병아의 등을 씻어 주기 시작한다.

“수춘아”

“예?”

“나는 네가 걱정이다.”

 

 

흉몽(凶夢) 43회 

 

 

 

 “마님, 내가 걱정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에요?”

“내가 가고 난 다음에 네가 어떻게 될 것인지 걱정이란 말이다”

 




“하하하···”

수춘이는 이병아의 등에 물을 끼얹으면서 소리를 내어 웃는다.

그리고 말한다.

“가기는 어딜 가신다는 거예요.

그런 귀신 낮밥 먹는 것 같은 소리가 이제 그만하시라구요”

“아니야, 정말이라구. 오늘밤에 나를 데리러 온다니까 그러네.

어젯밤에 그렇게 현몽(現夢)을 하고 갔다구. 목욕재계를 하고 기다리라 그랬단 말이야.

그래서 이렇게 목욕을 하는 거잖아”

“허황한 꿈을 가지고 뭘 자꾸 그러세요”

“허황한 꿈이 아니라니까, 내가 안다구.

좌우간 말이야 내가 가게 되면 오월랑 마님이 수춘이를 돌봐줄 거야.

얼마 전에 내가 큰형님한테 너를 잘 부탁해 놓았다구.

그러니까 그 마님 시키는대로 잘 따르도록 해 알겠지?”

수춘이는 별안간 목이 콱 메이는 듯해서 대답을 못한다.

“넌 그동안 나한테 너무 잘해줬어. 동기간이라도 그렇게 하기는 어려울 거야.

정말 고맙게 생각해. 내가 저승에 가서 너를 돌봐줄 생각이라구”

“어머, 마님 그런 말씀 마시라구요”

그만 수춘이는 울먹이는 소리가 되고 만다.

목욕을 마친 다음 이병아는 또 거실의 경대 앞에 앉아서 머리를 빗고,

오래오래 화장을 했다.

마치 시집을 가는 새색시라도 되는 듯 곱게 곱게 정성을 다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가 간직하고 있는 보석과 패물,

그리고 돈을 모조리 꺼내어 수춘이에게 주었다.

꽤 많은 분량이었다.

수춘이는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값진 것들을 모조리 자기에게 주다니,

고맙기도 하면서 한편 정말 오늘밤에 무슨 일이 있으려나 싶어서 두렵기도 한 모양이었다.

그날 밤 수춘이는 도무지 잠이 오지가 않았다.

십중팔구 마님의 정신이 좀 이상해져서 허황한 소리를 지껄여댄 것이려니 여기면서도

혹시나 싶은 것이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아무래도 불안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서 그녀는 살그머니

이병아 마님의 침실로 다가가 문 밖에 가만히 멈추어 섰다.

귀를 곤두세우고 방안의 기척을 엿들어 보았으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가 않았다.

한참 뒤에 마님의 코고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흉몽(凶夢) 44회 

 

 

 

 “그러면 그렇지, 아무 일도 없는데 괜히···”

속으로 중얼거리며 수춘이는 안도의 숨을 가만히 내쉬었다.

 

그리고 혹시나 마님이 깰까 싶어서 다시 살금살금 발자국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해서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도로 침상의 이부자리 속에 파묻힌 수춘이는,

“그럼 어떻게 되는 건지 모르겠네”

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마님이 보석과 패물, 그리고 돈까지 모조리 자기한테 주었는데,

만약 오늘밤에 아무 일도 없다면 내일 아침에 그것들을 도로 마님에게 돌려드려야 되는지,

아니면 자기가 그대로 가져도 되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마님이 자기가 오늘밤에 죽는 걸로 생각하고서 마지막 선물로 준 거니까,

만약 안 죽고 그래도 살아있다면 돌려드리는 게 옳을 것 같았다.

그러나 수춘이는 그것을 도로 돌려드리는 한이 있더라도

마님이 오늘밤 부디 무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밤이 들었다.

밤이 얼마나 깊었을까.

이병아는 소변이 마려워서 잠이 깼다.

그런데 실제로 잠이 깬 것인지,

아니면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잘 분간이 안 되는 그런 비몽사몽(非夢似夢)의 상태였다.

부스스 일어나는데,

마침 침실 안으로 그림자처럼 들어서는 사람이 있었다.

검정 옷을 입은 사내였다.

“어머”

이병아는 놀란다.

오늘밤에 데리고 온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왠지 몹시 두렵다.

그 사내는 천천히 서너 걸음 다가와서 가만히 멈추어 선다.

그리고 말없이 이병아를 바라보기만 한다.

“오셨군요. 좀 앉으시죠”

이병아는 떨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한다.

사내는 가만가만 고개를 두 번 내젓는다.

그리고 어서 일어나 같이 가자는 그런 고갯짓을 해 보인다.

“제가 지금 오줌이 마렵지 뭐예요.

오줌을 누고 올테니까 좀 기다려 주세요”

그 말에 또 사내는 고개를 두 번 내젓는다.

그리고 약간 눈을 부릅뜨는 듯하더니

얼른 따라오라는 그런 몸짓을 해 보이며 조용히 돌아선다.

“에, 예, 알았다구요”

울먹이는 듯한 소리로 말하며 이병아는 침상에서 내려선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떨군 채 다소곳이 그 사내의 뒤를 따른다.

 

 

흉몽(凶夢) 45회 

 

 

 

 이튿날 아침 수춘이는 일어나자 곧바로 이병아 마님의 침실로 가보았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지 궁금해서였다.

보나마나 아무 일도 없었으리라고 생각하며 가만히 침실 문을 열어본 수춘이는,

 




“아니···”

절로 이맛살이 살짝 찌푸러졌다.

침상의 이부자리 밖으로 마님이 상반신을 드러낸 채 누워 있는데,

얼른 보아도 어쩐지 안색이 여느 때와 달라 보였던 것이다.

후다닥 수춘이는 뛰어 들어갔다.

“어머 어머”

가까이 다가가 본 그녀는 그만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마님이 두 눈을 허옇게 뒤집어 까고 싸늘하게 굳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아이고머니-”

질겁을 한 수춘이는 냅다 소리를 지르며 방에서 뛰어나갔다.

곧바로 정신없이 그녀는 오월랑 마님의 거처로 달려가 그 사실을 알렸다.

오월랑은 이미 얼마 전에 이병아로부터 얘기를 듣고 있었고,

또 수춘이를 돌봐 달라는 부탁까지 받았던 터이라 전혀 뜻밖의 일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역시 적잖이 놀랐다.

서문경은 아직 자고 있었다.

오월랑은 사람이 죽었는데, 깰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여보, 여보, 일어나 보세요”

하고 조심스레 흔들어 깨웠다.

“으응-”

크게 기지개를 켜면서 서문경은 눈을 떴다.

“여보, 저··· 이병아가 죽었대요”

“뭐라구? 지금 뭐라 그랬어?”

서문경은 작취(昨醉)가 미성(未醒)인 그런 눈으로 멀뚱히 오월랑을 바라본다.

“이병아가 죽었다지 뭐예요. 간밤에···”

“아니, 뭐? 그게 정말이야?”

깜작 노라며 서문경은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 잔뜩 이맛살을 찌푸리고 잠시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아이구- 그것이 기어이 속을 썩이는군. 죽기는 뭣 때문에 죽느냐 말이냐. 어이 속상해!”

아침부터 울화통이 터진다는 듯이 뇌까리며

주먹으로 공연한 이부자리를 냅다 쾅! 하고 한 번 내리친다.

서문경은 이병아가 귀신에 씐 것 같다고 못마땅해 하던 것과는 달리

그녀의 죽음을 몹시 비통해 했다.

관가에 이어서 그 생모(生母)까지 가다니,

 자기네 가문에 무슨 저주(咀呪)의 그늘 같은 것이 드리운 게 아닌가 싶어

슬그머니 두렵기도 했고, 한탄이 되기도 했다.


이병아의 장례는 오일장으로 성대히 치러졌다.